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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의 강의평가, 지구인에서 외계인으로
언택트 시대의 강의평가, 지구인에서 외계인으로
  • 김혜영 | 시인
  • 승인 2020.07.31 16:0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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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신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머나먼 우주 끝에서 우리는 이미 만나도록 예정된 것은 아닌지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한다. 비가 내리는 순간, 나비가 잠시 앉았다 떠나는 순간처럼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2017년 3월 어느 날 <컨택트>(Contact)라는 SF 영화를 봤다.

 

프랑스계 캐나다 영화감독 드니 뵐뇌브(Denis Villeneuve)가 공상과학 소설가 테드 창(Ted Chiang)의 단편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를 토대로 만든 영화다. 영화의 제목은 2016년 1월 개봉한 ‘Arrival’(도착)인데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된 후,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을 <컨택트>로 수정했다.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과 인간이 접촉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이 독특한 상상력으로 전개된다. 

외계 생명체를 처음 조우할 때 여성 과학자가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다름 아닌 감염이었다. 지구인과 다른 생명체를 접촉함으로써 감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나 미확인 물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몸을 방역복으로 감싸던 장면이 생각난다.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가 전 지구를 공포로 몰아갈 때 의료진들이 몇 겹씩 입던 흰옷들이 영화 속의 이 장면과 겹쳐진다. 새로운 만남과 접촉이 가져오는 설렘과 긴장,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외계인과 소통하는 언어체계의 이질성도 충격적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우월한 종(種)이라는 자부심에 찬 인간에게 외계인의 존재는 낯설고 괴기스럽다. 그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이뤄질까? 최근 미 국방부에서 국가기밀 차원에서 ‘쉬쉬’ 하면서 외면해왔던 미확인 비행물체 UFO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영상을 봤다.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순간이동을 하는 물체는 한국의 고추 말리는 농가의 지붕 위에서도 관찰된 적이 있다. 미국은 무엇이 두려워 UFO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그토록 미뤘던 것일까? 최강국인 미국의 첨단기술을 넘어선 존재를 인정하기 싫은 자만심 때문이었을까? 

 외계인과의 접촉을 희구하는 열망은 우주 과학자들의 내면에서 등불처럼 이어져 왔다. 지구 너머의 생명체를 탐사하는 나사의 SETI 프로젝트에서도 수년 내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에서 그 누군가와의 접촉이 가능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외계 생물체와의 교류를 위해 미국 우주선의 현판에 칼 세이건의 아내가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간단한 태양계의 그림과 남녀의 누드와 화학 원소 기호가 그려져 있다. 

과연 외계의 존재들은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컨택트>에서의 의사소통은 소리와 음성체계가 아니라, 커다란 붓으로 화선지에 먹물을 뿌리듯 순간적으로 전달하는 것으로 처리됐다. 감각체계가 완전히 이질적이며 기존의 인식체계를 전복하는 상상력이었다. 

 

학생들의 ‘학점 구걸’ 메시지 홍수 

지난 봄 학기 동안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전 세계에 휘몰아쳤다. 아직도 그 광풍은 진정되지 않고 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방 국가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과 환경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두드러졌다. 그 가운데 내게 닥친 가장 큰 부담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동영상강의와 Zoom 화상강의를 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외계 생물체를 처음 만나듯, 이십년 넘도록 해온 강의의 방식에서 이탈해 새로운 접촉으로 나아가야 하는 순간이었다. 사실 난 기계를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우선 강의를 위해 로지텍 화상 카메라를 사고, 혹시 대면강의를 할지 몰라 휴대용 마이크도 샀다. 강의실에 비치된 마이크는 여러 사람이 사용하니 위험할 것 같았다. 로지텍 화상 카메라를 사용하는데, 목소리가 퍼지는 것 같아 다시 동영상 촬영용 마이크를 사고, 옷에 꼽는 핀 마이크까지 샀다. 사실 이런 장비는 대학에서 마련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로지텍 카메라를 실수로 물에 떨어뜨렸다.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지만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이상한 중국 여성의 목소리만 들려줬다. 급한 마음에 재구매를 했고,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모바비까지 구매했다. 

이런 나의 투자와 노력을 학교나 학생들이 과연 세세하게 알아줄까? 지난 3월 초의 짧은 시기에 장비 구입에서부터 작동방법까지 익히느라 밤늦도록 작업했던 기억이 스친다. 무엇보다도 PPT를 완벽하게 만드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고, 직접 제작한 동영상을 대학 사이트에 올릴 때 변환하는 방법도 낯설었고, 올리는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렸다. 

 

최고 지성의 사회를 파고든 학점 제일주의 

특히 새로 강의를 맡은 과목은 신입생 반이라 학생들이 메시지 쪽지를 계속 보내오는데, 그것에 일일이 대응해주는 것도 심리적 부담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수를 과외학원 선생님처럼 대하는 듯하다. 자녀가 1~2명인 시대여서 가난하든 부자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대체로 자존감이 아주 높다. 좋은 점일 수도 있지만, 지나친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적인 요구로 이어지기 쉽다. 자신만이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수십 개다. 공정한 경쟁 혹은 타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대학교육의 한 지표임이 분명한데, 온갖 구실과 변명으로 학점을 구걸하는 메일을 받는다. 이런 학생들의 부당한 요구 때문에 대부분 교수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 그런가? 학기 중간과 기말에 학생들이 교수나 강사에게 부과하는 강의평가가 주된 요인이기도 하다. 강의평가 점수로 강사를 해고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교수의 경우에는 승진이나 탈락의 요건으로 활용한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즉 수업의 질을 개선하거나 학생인권을 보호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 반대 측면도 엄연히 존재한다. 학생은 돈을 지불하고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받는 고객이 되고, 교수나 강사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서비스를 하는 존재로 몰아가는 추세다. 자본의 논리가 ‘최고의 지성 사회’라는 대학에 깊숙이 파고들어 작동하는 현상이다. 이것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강의평가를 잘 받기 위해 교수나 강사가 학생들에게 과잉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데로 아주 편안한 교수법을 시행하는 경우도 많다. 이 시스템을 잘 아는 학생들은 그 빈틈을 노려 학점을 구걸하거나 부정청탁을 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심지어 어느 교수는 같은 등급 내에서 A+, B+, C+ 만 주고 A, B, C는 거의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것들이 학생들만 보는 사이트에 공유돼 그 강좌는 학생이 꽉 찬다고 한다. A학점은 훌륭한 점수임에도 어떤 학생은 A+ 점수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인가? 

특히 학생 인구의 감소로 인한 대학의 위기감을 부추기면서 이런 현상이 점점 심해지는 추세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는 강의평가마저 믿을 수 없어, ‘학생평가단’이란 것을 만들어 교수와 강사를 평가하고 통제하려한다는 소문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봄 학기가 지난 후 교수와 강사들은 온라인으로 시험까지 치르게 됐다. 오픈북 시험인지라 교양영어를 가르치는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시험문제를 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사전이나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는, 적절한 평가방식을 위해 아주 창의적인 문제를 내야 했다. 

한편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시험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덕분에 채점을 하니 성적을 부여하는 데 충분한 객관적 기준을 정할 수 있었다. 지난 이야기라 쉽게 말하지만, 바쁜 일정 속에서 이리저리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무척 힘들었다. 모든 것을 끝내고 강의평가 결과를 기다리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서술형 평가에서 다수는 우호적인 감사 인사를 하지만, 일부 학생은 냉소적인 말을 써 놓기도 한다. 생전 처음으로 한 동영상 강의인지라 어떤 말이 나올지 긴장됐다. 

서술형 평가를 보니 어떤 학생이 “교수님이 귀여웠다”라는 말이 있어 놀랐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농담이나 웃긴 소리를 잘 못하는데 몇몇 학생들이 “수업이 재미있었다”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물론 마이크 소리가 작았다든지, 수업이 조금 길어질 때도 있었다거나 시험이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었다. 시험문제를 어렵게 낸 것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다. 다음 학기에도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되면, 마이크는 더 고민을 해 보고 개선할 생각이다.

 

열중하는 비정규직 강사들 느긋한 정규직 교수들

다른 사람들의 강의평가는 어떨까? 묻고 싶지만 다른 동료들에게 묻기가 그리 쉽지 않다. 사적인 영역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강의 동영상의 질에 있어 어떤 차이가 날까? 지난 3월 초에 동영상을 제작하면서 다른 교수나 강사들은 수업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고 학생들의 반응도 알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대학에 진학한 조카를 만나 다른 교수의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됐다. 어느 교수의 동영상을 봤는데,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그 분은 자신의 얼굴에 카메라의 초점을 두고 촬영한 것 같았다. 그 영상을 보며 잠시 웃었던 기억이 난다. 화면 전체에 가득한 얼굴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이 사실 조금 부담스러웠다. 

다른 영상에서는 PPT에 음성녹음을 했는데 간단한 개념을 적고 조곤조곤 설명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내 수업에는 PPT 제작에 시간이 엄청나게 드는데 저런 방법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공수업은 교수의 그 방법이 좋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컴퓨터공학 전공자의 동영상을 봤는데 TV에 나오는 전문제작진이 만든 자료처럼 보였다. 솔직히 기계를 다루는 질적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세련되게 잘 만든 동영상이지만 교수님의 시선 처리가 어색한 점도 보였다. 

이처럼 대면수업에서 보여줄 수 있는 교수의 자질과 비대면 수업에서 나타나는 역량 차이가 크며, 학생들과의 소통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편 대학원의 어느 교수는 정년이 보장된 탓인지, 기계에 대한 공포가 심했는지 아주 무성의하게 수업을 진행해 학생들이 애를 태우는 모습도 봤다. 

강의평가가 해고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강사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려고 엄청 노력하는 반면, 일부 정규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런 위계가 엄연히 존재하는 대학의 구조는 문제가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상아탑인 대학에서 교수와 비정규 교수 사이의 차별이 두드러지고, 그 틈새에서 떠밀려 나가는 연구자가 많은 슬픈 현실이다.      

 

소아병적 학점 경쟁보다는 협력과 배려의 패러다임 필요 

요즘 대기업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왜 그렇게 높은 학점을 선호하는지 이유가 궁금하다. 20~30년 전처럼 대기업 채용기준 학점은 평점 3.0 정도가 합리적이라 판단된다.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들이 방황도 하고, 연애도 하고 때로는 실패도 겪는 게 좋은 것이 아닌가? 서클활동에 매진해서 리더십을 기른다든지 혹은 진심 어린 봉사활동도 하고 저마다의 취미생활에 미쳐보는 기회가 대학에서 충분히 주어질 필요가 있다. 그런 생활이 자연스레 반영돼 C, D, 또는 F 학점도 있는 게 더 멋지지 않은가! 

학점세탁을 위해 재수강까지 하느라 부모들의 학비 부담만 늘어난다. 대학생들을 사소한 경쟁에 함몰하게 만드는 평가의 기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미친 듯이 놀아본 학생이 일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학생들이 국가적인 이슈에 대한 정의감에 불타 청춘을 바치던 그 열정이 그립다. 예전에는 대의를 위해 감옥에 갈 각오를 할 정도로 뜨거웠던 심장이었는데, 요즘 대학생들이 학점 1, 2점에 온갖 엄살을 피우는 모습이 안타깝다. 

너무 작은 그릇 안으로 학생들을 가두는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한다. 한국 사회의 병폐 중 하나가 지나치게 소모적인 경쟁에 있다. 타자와의 사소한 경쟁보다는 협동심, 배려심을 대학에서 충분히 함양해, 사회에서 헌신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지도해야 한다. 자본과 수치적 계산에 휘둘리는 대학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진정한 갈망을 느끼고, 방황하는 청춘에게 아늑한 여백을 제공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A+로 가득 채운 성적표보다는 더러 ‘F도 있는 인간미가 풍기는 성적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혜안을 대기업이나 공기업 인사팀 직원들이 갖추길 기대한다.

미래 사회에서는 어쩌면 우리 모두 낯선 외계인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 이탈해 떠돌이별처럼 방황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생존이 가능할 것이다. 대면과 비대면의 접촉이 혼재할 것이며 예측이 불가능한 속도로 어디론가 질주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타자를 배제하기 위한 평가 방식이 아니라 보다 다원화된 세계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낙오자를 지구 바깥으로 추방하는 시스템이 아닌 무수한 외계의 존재들까지 환대하는 대학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화성인에게 전하는 동영상 강의를 준비할지도 모른다. ‘지구라는 푸른 별에는 아름다운 수국이 피었다’는 상냥한 인사를 전하고 싶다. 

 

 

글·김혜영
시인, 부산대 강사. 1997년 <현대시> 등단. 제8회 애지문학상 수상. 주요 시집으로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등이 있고, 평론집 『메두사의 거울』, 『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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