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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플레이스와 핫플레이스, 저항과 소비 사이
힙플레이스와 핫플레이스, 저항과 소비 사이
  • 김지연 | 예술평론가
  • 승인 2020.07.3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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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랜드>는 LA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로 그린다. 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LA를 그렇게 부르기로 정한 것은 아니다. 영화나 음악에서 각자의 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LA라는 도시로 모였고, 그들의 서사가 오랜 시간 쌓이고 쌓여 도시의 서사를 이뤘다. 그 도시에는 구석구석 꿈의 이야기가 묻어 있고, 마침내 꿈을 이뤄 별이 된 사람들의 그림자가 곳곳에 걸쳐 있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렇게 서사가 쌓인 공간(Space)은 장소(Place)가 된다. 공간이 단순히 물리적 영역을 의미한다면, 장소는 인간이 이룬 문화와 가치관, 경험, 시간 등이 공간에 쌓여 맥락(Context)을 형성한 곳이다. 즉, 인간의 활동에 의해 어떤 의미가 부여된 곳을 말한다. 지도에 표시된 LA라는 도시가 공간이라면,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로 그곳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LA는 장소가 된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반영하며, 인간의 활동과 계속해서 뒤섞여 미래로 나아가는, 생동하는 존재다. 

건축가 유현준은 그의 저서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도시를 걷는 경험에 관해 이야기한다. 로마와 같은 옛날 도시는 골목길과 공간의 단위가 작아서 길이 금방 꺾이고 풍경이 변하면서 다양한 재미와 경험을 준다. 그 사이사이 자리한 작은 상점들은 이벤트의 밀도를 더한다. 그러나 큰 건물이 많은 뉴욕이나 서울의 테헤란로 같은 경우 블록의 단위나 건물이 너무 커서 오래 걸어도 계속 같은 풍경만 보이고, 다양한 일상의 경험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작은 상점 대신 커다란 프랜차이즈가 입점해 있고, 그것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도 지하철이나 자동차로 인해 맥이 끊긴다. 

 

<신사역 사거리>, 2011 - 정희우

도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서사

사람들이 선호하는 매력적인 장소, 즉 ‘핫플레이스’라고 불리는 공간들이 오래된 골목과 작은 상점들로 이뤄지는 이유, 그리고 반대로 커다란 프랜차이즈나 대기업 플래그십 스토어(본점)가 들어서면 핫플레이스의 매력이 반감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도시의 서사는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향하며 종적으로 쌓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가 모여 횡적으로도 팽창한다. 복잡한 매력의 지층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듯이, 도시도 마찬가지다. 서사의 레이어가 다층적으로 쌓인 도시일수록 사람에게 더 풍부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 일상과 밀착한 경험들이 각자의 서사를 만들고 그것이 쌓여 공간은 장소성을 띤다. 도시 공간은 그렇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도시, 서울은 어떨까. 현대미술 작가 정희우는 자신이 나고 자란 서울이라는 도시에 담긴 서사를 읽어내는 작업을 한다. 작가는 도시의 오래된 공간에 남은 이야기는 물론, 상대적으로 새롭게 형성된 강남대로와 같은 공간도 주목한다. 위의 책에서 언급한 대로라면 강남대로는 맥락이 형성되기 어려운 공간이다. 작가 역시 오래된 동네에서 강남으로 이주하면서 사람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든 결국 이야기가 생겨나고 또 쌓인다. 한때는 신도시였던 강남도 수십 년이 지나며 누군가에겐 장소가 됐다. 정희우 작가는 그런 서사가 담긴 강남대로 전체를 무려 20여 미터에 이르는 연작으로 그려냈다. 작가가 거리를 직접 걸어서 측정하고, 건물 위에 올라가 관찰하며 그리는 4년 동안에도 거리는 계속 변화했다. 상점이나 간판이 바뀌었고, 새로운 건물이 생겨나며 그 틈마다 사람들의 서사가 쌓였을 테다. 

작가는 이어서 더 오래된 서사를 탐구했다. 종로를 돌며 수십 년 전부터 걸려 있었던 오래된 나무 간판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동양화 기법으로 그려낸 강남대로와 달리, 나무 간판들은 탁본을 떴다. 약재상, 카메라 가게, 부동산, 가발 가게 등 실제 크기로 걸린 나무 간판의 탁본들은 종로라는 장소를 전시장으로 소환하며 나뭇결 틈에 켜켜이 쌓인 옛날이야기들을 펼쳐낸다. 작가는 이렇게 도시의 작은 풍경들로 공간 안에 쌓인 서사의 지층을 읽어낸다. 나무 간판들이 담고 있는 서사 위로 우리의 서사도 쌓인다. 도시의 서사는 시대별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위에 새로운 서사가 유기적으로 얽히며 계속해서 새로운 장소를 탄생시킨다. 

종로나 명동이라는 공간은 한때 누군가에게는 청춘의 서사가 얽힌 장소였다. 그러나 현재 두 곳은 특색을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누구도 일부러 그곳을 찾지는 않는 매력 없는 공간이 됐다. 과거에 그곳이 가졌던 장소성은 이제 흐릿해졌고, 같은 맥락의 장소성을 찾는 이후의 2030들은 서울의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2000년대 이후의 핫플레이스는 대부분 대형 상권이 아닌 오래되고 낡은 골목에서 시작됐다. 골목에 작은 가게나 문화공간이 생기면서 이야기가 생겨나고, 장소성이 부여된다. 장소성이라는 매력이 담긴 공간을 소비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그곳은 곧 핫플레이스가 된다. 핫플레이스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90년대의 압구정, 강남역을 거쳐, 2000년대의 홍대와 인사동,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그리고 2010년대에는 북촌과 서촌, 이태원 해방촌과 연남동 등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성수동, 그리고 을지로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작은 저항

도심에 위치한 을지로는 수십 년간 작은 공장들이 모여 공업지대를 형성했으나, 문화가 있는 거리, 혹은 식음료 사업이 번창해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바로 근처의 광화문이나 종로, 동대문에는 유동인구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을지로의 구석구석에 개성 있는 가게와 갤러리 등 문화 공간들이 생겨나며 을지로 특유의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을지로는 현재 서울에서 가장 핫한 장소, 아니 그보다 더한, ‘힙플레이스’*가 됐다. 

을지로가 알려지기 직전, 성수동이나 이태원 해방촌 등도 그러했지만 힙플레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비슷하다. 이미 형성된 커다란 상권을 피해 아주 작은 상권이 있는 골목이나 상권이 거의 형성되지 않은 곳에 SNS를 통해 알려진 작은 공간들이 먼저 자리 잡는다. 주로 오래되고 낡은 지역이다. 이들은 포털 지도에 주소나 상호를 등록하지 않고 인스타그램만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유행의 최전선에 선 힙스터들은, 힙플레이스를 가장 먼저 찾아가 SNS에 업로드한다. 이들은 문화적 반향을 일으키는 장소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이 타인들에게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장소 태그를 하지 않는다. 알려지고 싶은 마음과 숨고 싶은 마음이 모순적으로 공존한다. 

그러나 팔로워의 팔로워를 거치며 숨겨진 장소가 서서히 알려지고, 알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특정한 분위기를 형성한 장소가 되며, 주변에 결이 비슷한 문화공간과 가게가 더 생겨난다. 점차 상권이 커지면서 이곳을 알고 있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늘어나고 결국 알려진 상권이 되고 만다. 힙플레이스가 핫플레이스가 됐다가, 모두에게 알려지는 당연한 수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오래되고 낡은 곳을 찾아 구석으로 구석으로 들어가며 공간을 장소로 개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시의 공간은 단순히 상권으로 보기는 어렵다. 도시계획과 공간의 구획, 그곳을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는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다. 철학자 르페브르는 저서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의 지배가 일상생활을 넘어 사회적 권력의 원천이라고 본다. 지배층은 규율이나 지식으로써 공간을 지배하려고 하고, 피지배층은 공간을 실제로 전유하고 변화시킴으로써 이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전략과 아래에서부터의 실천이 얽히며 공간에 의미가 부여되고, 마침내 새로운 사회적 산물이 된다. 

그러니 어찌 보면, 커다란 상권과 대로를 벗어나 뒷골목과 작은 상권으로 향하는 움직임은 거대한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을 벗어나 실천으로써 공간을 전유하고 새로운 장소성을 만들어내려는 저항이다. 아직 지배되지 않은 공간을 찾아서 아래에서부터 형성된 질서가 새로운 문화에 목마른 젊은이들을 불러 모으고 힙플레이스를 형성한다. 장소는 하나의 정체성이자 그곳을 이루는 사람들의 자아의 일부분이다. 

 

힙플레이스의 운명은 어디로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힙플레이스(hip place)는 곧 핫플레이스(hot place)가 되고, 이어서 자본이 들어오며 대중적인 상권으로 변모한다. 예를 들어 킨포크 라이프(자연친화적이고 건강한 생활 양식)로 대변되는 미국의 핫플레이스 포틀랜드가 일정한 공간에 문화적 상징성을 만듦으로써 장소성을 부여해왔다면, 우리의 핫플레이스는 소비와 상당히 밀접한 특이점을 보인다. 문화적 저항성을 가지는 ‘힙스터’도 소비 중심적인 우리의 힙 문화에서는, ‘문화의 최첨단에서 소비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에 가깝다. 때문에 힙이 있는 곳에 소비가 있고, 소비가 있는 곳에는 자본이 들어온다. 일종의 저항으로서 공간을 전유하지만, 한편으로 가장 자본이 따라오기 쉬운 것이 힙플레이스다. 

과거의 핫플레이스였던 종로와 강남 등은 뒤따라온 자본의 힘으로 인해 다시 지배층의 질서로 재편됐고,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처음 문화적 상징을 이룬 곳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홍대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홍대의 중심부에서 문화를 일궜던 이들은 전부 밀려났다. 그들은 여전히 홍대 인근을 떠나지 않았지만 망원동, 성산동, 연남동과 연희동 등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존재하는 곳까지 통틀어 ‘홍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슬프게도 진짜 홍대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은 결국 가장자리다. 홍대의 중심구역은 문화가 사라진 빈 공간이 돼 버렸다. 여기서 장소가 가지는 의미가 드러난다. 홍대라는 것은 결국 지도에 표시되는 행정구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식하는 문화적인 구역이다. 

2020년, 가장 힙하다는 을지로는 오래전부터 소시민의 삶과 작은 움직임들이 차지해온 곳으로, 피지배층의 서사가 과거에도, 지금도 이어지는 장소다.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질서, 작은 일상의 경험들이 밀집해 수십 년 이상 서사의 레이어가 쌓여 온 을지로라는 공간에는 특유의 장소성이 있다. 이곳에 모이는 이들은 과거의 서사를 향유하며 오늘의 서사를 더하고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을지로가 가진 이야기의 지층은 지금도 계속해서 쌓이는 중이다. 이야기가 쌓인 공간은 우리에게 장소가 되고, 도시에 매력과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힙플레이스의 운명에 따라 을지로에도 자본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다. 대형 갤러리나 프랜차이즈 회사가 을지로 3가 인근을 기웃거린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 없이 단지 자본으로 만들어낸 것들은 거리의 서사를 훼손한다. 맥락 없이 잘려나간 서사는 다시 연결되기 쉽지 않고, 아무리 많은 유동인구가 지나가고 수익을 벌어들인다 해도 그곳은 더 이상 장소가 아니라 그저 공간이 된다. 

힙플레이스나 핫플레이스를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각자 어떤 자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장소성을 찾는 움직임은 결국 본능적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와 연결된 자기 서사를 만들고, 나아가 그곳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도시 공간이 갖는 힘은 결국 그곳을 이루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로부터 형성된 서사와 맥락이다. 살고 있는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 속으로 소환할 때, 그곳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을 때 공간은 비로소 장소가 된다. 그런 장소가 많을수록 도시의 내부는 풍성해진다. 

한때 오래된 수제화 골목이 있었던 성수동은 힙플레이스와 핫플레이스를 거쳐 자본과 공생하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을지로가 성수동과 같은 과도기에 한동안 머물게 될지, 홍대처럼 더 넓은 영역을 자기 이름 아래 포함 시키며 중앙부터 공동화될지, 결국 종로나 명동, 강남처럼 자본의 논리에 편입된 공간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장소의 서사와 오래된 지층이 쉽게 잘려 나가지 않고 조금 더 질기게 이어져, 또 다른 장소가 되길 바라본다.  

 

*대중적인 유행을 따르지 않고 개성과 비주류를 지향하는 젊은 세대를 뜻하는 ‘힙스터(hipster)’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힙(hip)하다’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힙플레이스(hip place)’ 역시 ‘힙한 곳’이라는 뜻의 신조어다. 기존의 ‘핫플레이스(hot place)’가 잘 알려진 트렌디한 공간을 의미한다면, 힙플레이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비주류 공간, 그러나 문화의 최첨단을 선도하는 곳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핫플레이스와 힙플레이스를 혼용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를 구분해, 도시 공간을 변화시키는 시작이 힙플레이스라면, 이것이 2030세대에게 조금 더 대중적으로 알려져, 유동인구가 늘어나고 매체나 문화콘텐츠, SNS에서 빈번하게 언급되는 수준을 핫플레이스라고 칭하려고 한다.

 

 

글·김지연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홍익대 예술학과와 경북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술전문지 <그래비티 이펙트>의 미술비평공모에서 입상했다. 미디어아트 전시 《뮤즈》 시리즈를 기획하고, 책 『마리나의 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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