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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저항 사이에서 분열하는 텍스트, <길소뜸>
[성진수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저항 사이에서 분열하는 텍스트, <길소뜸>
  • 성진수(영화평론가)
  • 승인 2020.08.06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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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중인 화영(김지미)의 클로즈업 위로 박사(최불암)의 보이스 오버가 흐른다.

“심지어 방송으로 친족임을 확인하고도 서로 찾지 않거나 찾아도 상봉을 피하거나 재회를 하고도 결합을 원치 않는 예를 봤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분단 이후에 장기저긴 이질화가 빚어낸 후유증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민족의 동질성만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핏줄을 타고난 단일 민족이니까요.” 

끼익! 박사의 목소리가 끝나자마다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화영의 차가 차선을 가로지르며 멈춘다. 차는 곧 다시 서울로 향한다. 

영화 <길소뜸>(임권택, 1986)은 이렇게 끝난다. 영화를 지배하려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를 중단시키는 인물 간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엔딩은 <길소뜸>의 분열적 성격과 ‘화영’이라는 캐릭터의 역할을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전체에 걸쳐 이야기를 봉합하고 지배하려는 목소리에 저항하면서 영화에 갈등과 모순의 씨앗을 뿌리는 인물. 그것이 화영이다.

<길소뜸>은 1983년 6월 30일 시작해서 138일에 걸쳐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던 KBS-TV의 ‘이산가족찾기 특별방송’에서 출발한 영화다. 황해도 작은 마을 ‘길소뜸’에 살았던 화영은 ‘이산가족찾기 특별방송’을 통해 전쟁 중에 잃어버렸던 아들 석철을 찾기로 한다. 화영은 방송국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전쟁 중에 길이 엇갈려 결국 헤어지게 된 아들 석철(한지일)의 아버지 동진(신성일)이었다. 3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화영과 동진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서로 이야기한다.

 

어린 화영이 동진의 아이를 임신한 채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서로를 찾아 나선 동진과 화영은 길이 엇갈린 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동진을 만나지 못하고 가족과도 떨어진 채 아들 석철과 살아가던 화영은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음악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주다가 간첩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어린 아들 석철과도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화영을 찾아 나섰다가 북한군에 끌려가 의용군이 되었던 동진은 큰 상처를 입은 채 어떤 마을에 숨어들었다가 한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화영, 동진, 석철 세 가족은 이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과거 이야기는 플래시백, 그리고 화영과 동진의 보이스 오버로 소개되는데, 이 부분이 영화 러닝 타임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 러닝 타임을 채우는 것은 30년여 년 만에 다시 만난 화영과 동진이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아들로 보이는 석철을 찾게 되고 그들이 진짜 혈연 관계인가를 확인하는 이야기이다. 세 인물이 재회한 이후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는 여러 논쟁거리를 고려할 때, 이 영화가 과거 이야기에 왜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 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사건중심에서 벗어나 영화의 사운드에 귀를 기울여보면 그 이유를 추측할 만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러닝 타임의 절반을 차지하는 플래시백은 영화의 주제와 관계가 있다. <길소뜸>이 한국전쟁이라는 과거 역사와 이산가족 찾기라는 진행 중인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한국전쟁은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약소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 둘째, 한국전쟁은 남과 북이 아니라 외세가 한반도에 들어와 치른 전쟁이다. 셋째, 다시 만난 이산가족들이 결합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역사와 사회 탓이다. 넷째, 우리는 한 핏줄의 민족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영화의 관점은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영화 스스로가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소개한 영화의 엔딩 씬은 그 사례 중 하나일 뿐,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대사, 극중 텔레비전 사운드 등 영화 전반에 배치된 언어적 사운드를 이용해 영화는 자신의 주장을 차곡차곡 만들어간다. 이렇게 구축된 영화의 태도는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면서 결국 우리는 모두 희생자라는 인식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린 화영과 동진의 과거는 현재의 그들에게 희생자의 지위를 만들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러닝 타임의 큰 분량을 차지하는 플래시백과 다양한 사운드 요소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구축하는데 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길소뜸>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봉합된 영화가 되지 못한다. 물론 그것은 화영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영으로 인해 영화에 새로운 관점이 덧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화영은 말 그대로 영화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것으로 봉합을 방해한다. 화영이 한국전쟁의 배경을 설명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꺼버릴 때, 부자의 상봉을 보여주는 이산가족찾기 방송 화면을 무표정한 표정으로 응시할 때, 죽은 개를 차에 실으려는 석철에게 비명과 고함을 지를 때, 그리고 혈액을 이용한 친자 확인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석철이 화영과 동진의 아들이라는 박사에게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가 반문할 때. 이 순간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전제된 명제, “혈육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으로 본능적인 유대”라는 믿음에 균열이 가해지고, 텍스트는 분열 상태에 봉착한다.

 

석철을 장남으로 입적하겠다는 동진의 태도는 석철을 부정하는 화영과 사뭇 대비된다. 화영과 동진이 석철을 처음 만난 날 석철은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없다면서 동진을 아버지라고 불러본다. 그리고 동진은 아직 아들인지 확실치 않은 석철에게 조부와 증조부가 어떤 분이었는지, 가족의 돌림자가 무엇인지, 얼마나 손이 귀한 집안인지 등에 대해 말한다. 동진이 말하는 가족, 즉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 중심 가족 속에 엄마인 화영의 존재는 없다. 동진의 말이 은연중에 내비치듯이, 영화가 주장하는 가족, 혈연, 민족 속에 사실 여자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민족주의 관점과 연루된 보이스 오버나 대사가 대부분 남성의 목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 근거라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영화 전반에 걸쳐 표출되는 화영의 저항이 시청각적이고 서사적인 층위에서 영화를 지배하려는 남성의 목소리에 균열을 낸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길소뜸>은 사건과 행위의 영화라기보다 설명과 내적 갈등의 영화에 더 가깝다. 보이스 오버와 대사에 의지한 설명이 분명하고 직접적이라면 캐릭터에 기대는 내적 갈등은 모호하고 간접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단일민족과 혈육의 중요성에 대한 길고 지루한 설교 영상이 될 뻔한 영화이기도 하다. 화영의 존재와 지치지 않고 반복되는 그녀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글·성진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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