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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칼럼] 학투와 미투
[서포터즈 칼럼] 학투와 미투
  • 강일구(르디플러)
  • 승인 2020.08.1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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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디플러 1기=강일구] 이상한 일이다. 똑같이 뒤늦게나마 자신의 피해를 호소해, 폭력에 대한 인정과 적절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행위인데,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같지 않다.


학교폭력을 처음 목격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화장실에 들어가려하자, 사람이 사리를 때릴 때 나는. 그 뭉툭하고 흉측한 소리가 들렸다. 어디 소리만인가! 맞는 사람이 있고, 때리는 사람이 있고, 망을 보거나 이를 보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목격한 인간의 비열함이었다. 일방적인 폭력은 대상이 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몸을 움츠려 들게 했다. 폭력이 벌어지던 시간에 화장실은 폐쇄되지도 않았으나, 한 층 학생 모두가 들어가지 못했다. 폭력의 해악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사물함 안에 있어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교무실이 있어도 움직이는 남학생은 없었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자신의 자유를 폭넓게 제압할 권력이 어디 있는지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학폭의 불의에 대해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교실에서 엄석대 같은 녀석과 그 패거리의 눈치를 봐야 하는 피곤함과 답답함. 부당하고 일방적인 폭력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도 이를 제재할 힘이 없어 느껴야 하는 무력감. 상상 이상의 수위 높은 폭력에 대한 공포 등. 10년 혹은 20년이 지나서 학폭 가해자에 대한 고발이 있어났을 때, 많은 시민들이 공감하고 분노하는 이유는 바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학창시절 트라우마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가해자를 정신 차리게 해, 피해자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고, 또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 학투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박 시장 사건이 터지고 피해자에게 “4년간 뭐했냐?”란 반론 같지 않은 반론이 설득력을 얻었다는 게 이상했다. 학투를 당한 사람에게 “3년간 당하는 동안 뭐했냐?”라고 당신은 물을 수 있나. 최근 한 프로그램에서 스펙 좋은 사람이 학투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당신은 스펙이 좋다고 그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나. 폭력의 본질은 언제나 비슷하며, 이로 인해 피해자가 받는 모멸감이나 공포감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사과와 회복 책임은 4년이건 10년이건, 혹은 미국 대법관 청문회 때 터진 미투처럼 몇 십 년 만에 터졌건, 그 진정성을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 학투든 미투든.


4년이란 시간만이 아닌, 그 안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더한 폭력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는 처세의 방법을 택할 수도, 소극적 저항을 할 수도 있다. 학폭을 피하기 위해 학생이 빵셔들이 됐다고 하여, 둘 사이가 원만했다고 당신은 생각할 것인가. 학폭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가 반을 바꿔 달라고 한 일을 두고, “전학가지 않았다”며 적극적 회피가 없었다고 반문 할 것인가. 학폭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히다가 정이 들었다고 하여, 당신은 적당한 선에서 문제가 덮히길 바라는가. 학투와 달리 미투는 다 성장한 어른의 문제이기에 원만히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직장 상사의 어떤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든 야당 의원이 대통령 공격하듯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인가.


으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이 그렇듯, 미투의 문제 또한 명쾌할 수 없고, 또 명쾌하게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미투 또한 학투처럼 권력에 의한 폭력과 그 본질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분노해야 하는 지점, 혹은 당신이 갖고 있는 판단 기준인 도덕률은 사안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르다면 당신이 학창시절 일진과 가까웠는지 아니면 폭력을 두려워했던 일반 학생에 가까웠는지 돌아보기를 바란다.


며칠 전, 한 언론에서 김지은 씨가 미투를 할 때 도왔던 한 남성 동료의 근황을 보도 했다. 그는 마치 학교에서 일진에게 반기를 들어 왕따를 당한 신세와 다를 게 없었다. 내가 피해자가 될 일이 없어도, 불의롤 참고 일진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이, 이제는 학교만이 아닌 사회, 그것도 ‘민주’를 내건 당에서 똑같이 통용되고 있다. 폭력과는 가장 멀 것 같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가 조직적으로 폭력을 옹호했다. 학교폭력이 원시적인 폭력이듯, 성폭력 또한 그 원시성을 다르지 않다. 학투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미투에 공감하지 못할 이유와의 거리가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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