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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칼럼] 옳은 존재의 개소리에 대하여
[서포터즈 칼럼] 옳은 존재의 개소리에 대하여
  • 민현기(르디플러)
  • 승인 2020.08.1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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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렇게 본성적으로 중대한 과오를 면치 못할 처지이며,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그렇게 서로 다르니 그렇게 다양한 오류들과 다채로운 잘못들과 각양각색의 실수들이 인간의 삶에는 빠지지 않는 형편인데, 그런데도 누군가 아르고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단 한 시간이나마 우정의 달콤함이 지속되겠습니까?
- 라스무스, 우신예찬

 

[르디플러 1기=민현기]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에는 눈이 백 개 달린 거인 아르고스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진정으로 우정을 나눌 수 없을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 또는 사상을 평가하는 행위는 종종 대리석을 깎는 조각가를 연상케 한다. 판단과 평가는 그것을 행위 하는 이의 가치관이 개입하는 일로, 대리석이라는 질료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다비드 상 또는 변소 바닥에나 깔릴 타일을 끄집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눈이 백 개 달린 거인의 초월적인 심미안을 만족시키고자 한다면 대리석은 그것이 제아무리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구체로 깎아낸들 무리수인 원주율 값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반쯤 먼 눈이 안와 구멍도 아니고 후두부쯤에 달려있는 이는 으스러져가는 흙무더기를 완벽한 조각상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 공리주의, 롤즈 혹은 라드브루흐 등 어떤 정의관으로 보더라도 존재의 당위성이나 목적의 정당성을 헤아리는 것은 명백한 일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침이 현재를 가리키는 나침반을 통해 역사를 역산해가며 인류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만 했는가 하는 판단은 현재적 패러다임의 기준으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나침반이 향하는 방향에서, 역사에서 획득한 미분방정식을 이용해 미래에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래프를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상청의 일기예보처럼 그 그래프는 직전까지 무한한 수정이 요구되며, 비 오기 1시간 전 또는 사후에야 제대로 된 예보(사후엔 더 이상 예보도 아닐 것이다)를 해내어 집에 놓고 온 우산 생각만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지는 위치가 인류가 그려온 '선형'의 정의, 스티븐 핑커적인 역사관에 따르지 않는다면 비선형적인, 에 부합하고 존재적으로 옳은, 정당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추구하는 가치, 목적 혹은 그것을 전하는 인물을 보다 엄밀한 프리즘으로 비추어 보면 내재된 모순이나 옳지 않은 언행 또는 수단이 동반되어 있는 것을 곧잘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존재 그 자체로 선언적인 당위적인 '표상'은 그것이 실재적으로 가지는 생태와 논리적인 가치관을 분리하여 판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 혹은 인간의 산물일 당위적인 존재에게서 필연적인 인간의 오류를 발견하게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나타내는 표상마저 쉽사리 연동시켜 부정하게 되어, 만약 그 표상이 올바른 것이라 하더라도 세상사람(das Man)들로 하여금 반동적인 인식 근거를 통해 나침반의 북쪽이 아닌 곳에 자장을 형성하게 할 것이며, 이는 역사의 방향성을 교란해 세상사람들의 길을 잃게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상 혹은 누군가의 '개소리' 즉 잘못된 행위를 발견하는 것과 그것이 '표상', 상징하는 것의 가치 평가는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치 평가를 위해 하나의 인식 체계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에토스(성격),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를 말하는데1), 나는 여기에서 '에토스'와 '로고스'의 개념을 편의적으로 빌려서 '표상성'을 가진 존재의 당위성 또는 그 목적에 '에토스'라 이름 붙이고, 그 에토스가 '실재성'을 띄고 가지는 논리 또는 수단에 '로고스'라 이름 붙여서, 에토스가 옳거나 틀린 경우 그리고 로고스가 옳거나 틀린 경우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1863년 1월 1일 새해에 노예해방이란 영웅적인 선언을 관철시킨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해방'으로 표상되는 당위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에게서 오류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북부에서는 온 마음으로 흑인을 향한 동정과 인간의 평등을 말하던 링컨이, 남부에 가서는 백인과 흑인은 동등할 수 없으며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며 차별적인 권리를 가질 것을 옹호한다.2) 이는 남부의 분위기에 호응하여 정치적 타협을 이루고자 한 현실주의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이지만 옳은 발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링컨은 옳은 '에토스'이지만 그에겐 틀린 '로고스'들이 있다.

링컨뿐만이 아니다. 세종대왕, 테레사 수녀, 마틴 루서 킹, 간디 등 '위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도 시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수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실재적인 오류, 즉 '로고스'들은 그들의 '에토스'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개인을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는, 개인이라는 존재가 가진 표상(에토스)과 그의 행위(로고스)의 관계로 이어지지만 실존적 존재인 개인과 달리 이데올로기는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인간에 의해 매개되어 존재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그 운동에 있어서 인간 개인과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까닭에 이데올로기의 존재적 표상 '에토스'에는 목적 없이 태어나는 인간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의 목적성을 편입할 수 있을 것이며 '로고스'에는 이데올로기가 가진 내재적 이론 또는 그것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이데올로기 추종자의 수단적 행위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은 피식민 민족의 해방을 위한 조직적 투쟁이라는 점에서 '에토스'적으로 옳은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에토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옳은 '로고스'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특히 임시정부 같은 자칭 정부 조직이나 의열단 같은 무장단체에 의해 행해지는 테러라는 점에서 유럽이나 중동에서 행해지는 테러와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을 찾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다. IRA나 알카에다 등의 테러와 한국의 독립운동을 비교했을 때의 일반적인 한국인의 반응은 대개 그것들과는 성질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일 테지만, 정말로 그런가?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기도 전인 1908년, 미국의 외교관인 더럼 스티븐스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것에 대해 일본에 우호적인 의견을 밝힌 것을 두고 장인환과 전명운 두 명의 한국인은 더럼 스티븐스를 찾아가 살해한다. 선량한 외교관의 개인적인 의견을 이유로 그를 살해하는 것은 프랑스 신문사 '샤를리엡도'가 이슬람 비판적인 만평을 실었다는 이유로 테러를 가한 일이 떠오르는 전형적인 '테러리즘'의 모습이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 그들의 야만성에 분노해 큰 비난이 일었지만 전명운과 장인환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건국훈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박노자 교수는 이재명이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죄 없는 인력거꾼 박원문을 살해한 일이나, 의열단이 다나카 기이치 남작을 폭살하려다 미국인 여성 스니더 부인을 죽인 일,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때 주변의 무고한 일본인 민간인이 피해를 입은 일, 우파 지도자 김구의 부하가 좌파인 한인사회당 간부 김립을 살해한 일 등을 들며 침략을 벌인 지배계급의 탓임에도 침략국 일본인 민중과 같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적인 행위에 대해 고찰한 바가 있다. 특히 그것이 정당하다면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것은 한국의 지배계급임에도 일반 한국인이 아프간 등지에서 납치당해 살해당하는 것 역시 똑같이 정당하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서 보듯이 제아무리 독립운동이라는 옳은 에토스를 가졌다고 해도 로고스적인 오류를 분리해서 고찰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물론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어느 정도 폭력적 수단이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전형적으로 '옳은 목적에 의해 정당화되는 수단'으로서 마키아벨리적인 성질을 가지는 것이며, 괴테를 인용하면 '양심은 관찰자들의 덕목일 뿐 행동하는 사람의 덕목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또한 메를로퐁티의 '진보 폭력'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주의하게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사례는 순전히 악하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여겨지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유주의적 좌파이며 공개적인 정치 발언을 즐겨 했던 자신의 스승인 러셀과 달리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삼갔는데,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정치적 행적 중 하나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이론적으로는 반대했지만, 실행에 있어서는 '찬성'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를 로고스적으로는 반대했지만 에토스적으로는 찬성한 것이다.

여성주의, 비판적 인종 이론이나 '취소 문화(Cancel culture)'도 에토스와 로고스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특히 '메갈'과 같은 급진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체계의 평등한 변혁을 꾀한다는 점에서 에토스에 있어서 당위적으로 정당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역시도 에토스가 정당하다고 해서 꼭 로고스가 옳은 것은 아니다. 특히 폭력성과 혐오를 되받는 미러링 전략은 독립운동의 '테러'와 마찬가지로 로고스 자체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형법에서 정당방위 혹은 위난에서 피하기 위한 '긴급피난' 조항의 관점에서 미러링을 합리화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전형적인 목적을 위해 정당화되는 수단인 것인데 형법의 논리로 보자면 어디까지나 현재의 위난을 피하기 위해서만 합리화될 수 있다. 이런 '혐오'의 미러링이 정당방위를 넘어, 심연이 오히려 제 속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금언처럼, 제 본 얼굴보다 거울의 좌우 반전 상이 이제는 더 익숙해져 미러링식 '혐오'의 정서가 '디폴트'한 로고스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이런 혐오의 정서 속에서 'TERF'라 불리는 비과학적인 젠더 구분에서 시작된 트랜스젠더 혐오 같은 성소수자 혐오가 적지 않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에토스가 가지는 로고스적 오류의 대표적 사례이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는 비판적 인종 이론과 '취소 문화'도 궤를 같이 한다. 백인 중심 사회의 체계적인 인종차별에 맞서 인종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그 당위, '에토스'는 옳은 당위를 가지고 있지만 로고스에 있어서는 완전히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이를 인종차별의 가해자 또는 배신자로 몰며 문제 발언을 한 인물을 모든 영역에서 '취소'시켜 배제하는 급진적인 전략은 버락 오바마와 놈 촘스키로 하여금 토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취소 문화에 반대 성명까지 내게 했다.3)

래디컬 페미니즘, 비판적 인종 이론, 마르크스주의, 민족해방파(NL)나 여타 운동권 등은 자기만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제 머리 꼭대기에 '여성차별', '인종 억압', '계급 문제', '분단 모순'의 틀을 올려놓고 사회의 모든 것을 그 틀에서 해석하며 바라본다. 이런 식의 편중된 '도그마'식 사고 구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조금만 더 편집증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나치의 시오니즘 음모론이나 프리메이슨 음모론 같은 여타 음모론과 그 차이가 없어진 다는 데 있다.

극단화된 페미니즘과 NL, 비판적 인종 이론가 등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음모론적인 동기를 가진 사고가 횡행하는 것도 이런 도그마의 편집증적 진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놈 촘스키는 현대 과학을 '백인 남성의 과학'이라 비판하는 식의 사고에 대해 나치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유대인식 물리학'이라 치부하던 것에 비교하기도 했다.4) 하지만 로고스적으로 틀린 사고를 가졌음에도 여전히 이들은 에토스적으로 필요하다.

법학자 칼 슈미트가 자신의 저서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정치의 구분법을 '성자'연하며 거부한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의 노고를 대신해 줄 것이라고 했듯이, 모든 것을 특정 이론의 틀로 해석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자신의 정신을 '급진주의 이데올로기'의 숙주로 내어주며 세계를 조금 더 올바르게 변혁하는 것에 자기희생하는, 조금은 미친, 전위대들이 있었기 때문에 '노고'를 거부하며 안락한 삶을 구가하는 이들이 어쩌면 보다 진보된 세상을 얻게 된 것이다. 그 광기와 평균성 사이에서 진보를 경주해나가기 위해서는 나는 에토스와 로고스의 분리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에토스는 옳고, 로고스가 틀린 사례가 있는가 하면,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강렬하게 틀린 사례도 있다. 나치, 파시즘, 역사의 수많은 범죄자 등 그 수가 너무도 많아 일일이 꼽는 것조차 우스운 일일 정도이다. 반대로 에토스와 로고스가 둘 다 옳은 경우는 예로 들만한 것이 매우 적은데, 특히 인간 개인은 어떤 '사상', '주의'보다 '로고스'적으로 더욱 복잡하기에 에토스와 로고스가 둘 다 옳은 인간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는 권리도 책임도 없으며 그저 생각으로 쌓아가는 것이지만 인간은 유아기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조리한 세계에 거하며 동물적인 본능과 집단적인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에 외부에 전시되든 안되든, 본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에토스'와 달리 수많은 '로고스'적 잘못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고스적으로 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수, 석가모니와 공자 같은 성인들은 그들의 존재가 '에토스'적으로 옳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만으로 평가할 때 적어도 소크라테스는, 니체는 의견이 다르겠지만,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가지 않아 죽은 아기들은 틀릴 에토스도, 로고스도 없으므로 자연적으로 모두가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은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개인보다는 덜하겠지만 어떤 이데올로기가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았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평화주의 등 옳음의 사표로 여겨지는 사상들도 에토스적이든 로고스적이든 저마다의 오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임마누엘 칸트의 마음속에 별처럼 빛났을 정언명령이라면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토스는 틀리지만 로고스만 옳은 경우이다. 이것을 일상어로 번역하면 '존재적으로 정의에 도움 되지 못하지만 그저 착하기만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한스 켈젠을 비롯한 실증주의 법학자들의 실정법에 대한 존중은 곧 나치의 법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나치에 의한 '법률적 불법'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는 곧 로고스적으로 옳지만 에토스적으로 틀린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법학자 라드브루흐는 그러한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며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브루흐 공식'과 같은 자연법적인 사상을 독일 법에 도입한다.

로고스적 '순수성'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 할 수 없지만 만약 형법의 '미필적 고의'가 의심될 정도로 극도로 진화하여 '적극적인 로고스 추구'로 '에토스'적으로 틀리게 된다면 그것은 나치에 저항하던 본회퍼 목사의 '악을 앞에 두고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링컨의 '저항해야 할 때 침묵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인간은 겁쟁이가 된다', 김대중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란 말들과 동치의 상황이 되어 정말로 그 자체가 '악'이 되고 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인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평화주의'에 대한 강렬한 신념으로 양차 대전에서 전쟁에 대해 지속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히틀러와 파시즘의 대두라는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그의 '로고스'적 평화주의는 '에토스'적으로 틀렸음이 명백해졌고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를 폐기하고 전쟁을 적극 지지하게 되는데, 심지어 1948년에는 미국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선언해 소련의 핵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다분히 '주전론'적인 주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나사렛의 예수는 특이사례인데, 로고스적으로 옳지만 에토스적으로 옳은지 틀린 지는 판정하게 힘든 사례다. 의미는 다르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로고스' 그 자체라고 선언되는 예수는, 당시 로마제국의 피지배 식민지인 이스라엘에서 적어도 정치사회적인 상황에 한정해서 보자면 '에토스'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갑작스레 나타나 유대 율법을 '완성'이란 이름으로 폐지시키고, 로마제국에 맞서 저항할 것을 주장한 열심당원의 주장을 물리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고(마태복음 5장 3절)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고(마태복음 19장 24절) 심판받지 않으려면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며(마태복음 7장 1절)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고(마태복음 19장 19절) 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어야 하며(마태복음 5장 40절) 완전하고 싶다면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마태복음 19장 20절)고 한다.

지독하게도 바보처럼 '로고스'적으로 옳은 주장을 펴다가 가야바 등의 제사장의 고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데, 죄목은 유대의 왕을 사칭하며 나라를 뒤엎고자 한 내란선동죄이다. 재밌는 것은 예수가 죽은 뒤부터다. 로마제국의 압제를 맞서 폭력적으로 저항한 열심당은 유대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로마에 처참하게 패배한 후 유대인들은 자기 땅을 잃고 세계 곳곳으로 2천 년간 디아스포라를 시작하게 됐다. 반대로 예수의 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서양 정신문명의 두 토대 중 하나를 히브리 철학으로 영원히 바꿔놓는다.

에토스와 로고스가 서로 옳거나 틀린 이 네 가지 상황을 논리적으로 종합하면 그것들이 정의에 기여하는 순서는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은 것', '에토스가 옳고 로고스가 틀린 것', '에토스는 틀리고 로고스가 옳은 것', '둘 다 틀린 것'으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서가 말하는 것은 곧 에토스와 로고스 둘 다 옳을 수 없다면 적어도 에토스적으로 옳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존재가 가지는 '에토스'의 결과적 효과가 로고스의 오류를 넘어서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와 '진보'의 요체라 할 것이다. 물론 에토스의 결과론적 효과와 로고스를 수학적으로 엄밀히 계산해서 평가를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량화가 불가능할 것이며, 가능하다고 해도 무한한 지성을 가진 이가 아닌 유한한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내가 말하는 에토스와 로고스의 논리에는 명백한 오류가 존재한다. 성공과 실패가 윤리의 주요 결정요인이라는 알린스키의 말처럼 에토스의 옳고 틀림을 정하는 데 있어서 사후의 결과가 주요한 판정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첫 번째 오류를 볼 수 있고, 에토스는 그의 로고스를 통해서 형성될 수밖에 없는데 로고스가 틀렸음에도 표상하는 에토스가 옳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 두 번째 오류이며, 그저 에토스와 로고스를 분리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전형적인 '공칠과삼'의 독재자 미화 논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실용적 의미가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오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방법론으로 에토스, 로고스, 파토스뿐만이 아니라 한 가지를 더 제시하는데, 시간이란 뜻인 '카이로스'다.5) 크로노스도 그리스어로 동일하게 시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크로노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양적인, 인과적 시간을 뜻하며 카이로스는 그와 달리 질적인 '기회'로서의 시간이란 뉘앙스인데, 그러니까 '행동에 나설 적절한 시간'이란 의미이다. 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이로스'를 통해 설득의 방법으로 시간과 장소의 적절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에토스와 로고스의 오류를 보정하기 위해서 에토스와 로고스에 이어 세 번째로 '카이로스'란 개념을 차용해 이용하고자 한다. ​

카이로스는 내가 제시하는 에토스, 로고스, 카이로스의 세 가지 개념들 중에서 가장 간단하지만 평가의 틀에 있어서 셋 중 가장 효과적인 개념이다. 존재의 표상성 '에토스', 그 수단이 되는 논리적 실재성 '로고스'에 이어 '카이로스'란 그 '표상성'을 가진 존재가 위치하는 시공간에서의 상대적 진보성이다. 존재가 자신의 시공간에서 올바른 나침반을 쥐고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로고스만으로는 위태로웠던 에토스를 조금 더 정확하게 보정해 주는 것에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3차원에 거하는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3개의 축이 필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카이로스적으로 옳다는 건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링컨이 2020년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링컨 스스로가 처해있는 시공간의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진보하려는 노력'을 했냐는 것이다. 성경적 믿음에 기반한 링컨의 인종평등적인 사상은 비록 완전하지 못했고 흠결은 있었지만 당대의 미국민을 기준으로 했을 때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고, 링컨은 정치적으로 노예해방을 위해서 전쟁도 감수해야만 했다. 이는 링컨이 카이로스적으로 옳았으며, 에토스적으로도 옳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어떤가? 박정희의 유일한 공은 정말로 그의 공인지 의문스러운 경제발전인데, 그것으로 그의 에토스가 옳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그는 419 혁명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를 쿠데타로 폐기하고 유신헌법을 급조해 종신독재를 꾀했으며 사법 살인은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전분야에서 퇴행을 겪게 만들었다. 이는 분명히 419로 민주주의를 이룬 당대의 한국 시공간 기준에 있어서 퇴행적인 것이다. 카이로스적으로 틀린 것이다. 자연적으로 에토스적으로 틀리며, 로고스적으로 틀렸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박원순도 마찬가지이다. 참여연대 출신의 인권 변호사로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산에서 내려온 후에 서울시장을 꿰찬 그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볼 때 인권과 진보를 표상하던 '에토스'가 그의 성추행이란 '로고스'로 인해 더 이상 인권이나 진보가 아니라 퇴행적인 진영논리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면 그가 표상하는 것이 더 이상 2020년 한국이란 시공간에서 '카이로스'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박원순 본인도 비서의 성추행 고소 사실이 세상에 밝혀져 변질될 그의 에토스에 대한 '부조화'의 비애감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프랑스의 국민주의, 민족주의도 카이로스적인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통적으로 좌파적인 성향이 짙었던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로 우익의 사상으로 전환되게 된다. 유대인 드레퓌스에 자행된 민족적 차별과 공격을 통해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카이로스적 시효를 잃었음이 명백해진 것이었고, 한때 에토스적으로 올바르던 민족주의는 더 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고 에토스적으로 틀리게 된 것이다. 이제 서구 선진국에서 민족주의란 전형적인 극우의 사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도 똑같이 카이로스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일본과 제국주의에 피지배 민족의 저항에서 시작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이전의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좌파가 주류인 사상인데, 제국주의에 억압된 시기에는 에토스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성'에서 벗어나 확대된 G7이라는 새로운 강대국 판도에 편입되려 하는 선진국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갈수록 카이로스적 정당성을 잃어가고 있다.

민족적으로 '약자'일 때는 에토스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더 이상 약자의 '대항'적인 사상과 수단이 아니라 자기 집단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동남아시아인, 조선족, 다문화 가정 등과 같은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억압의 도구로 이용되는, '강자'의 민족주의로 이행되어 가고 있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약자를 괴롭히는 사상으로 변하고 있는 지금, 한국의 민족주의는 카이로스적으로도, 에토스적으로도 그 정당성을 잃고 여타 서구 국가들과 같이 극우의 로고스가 될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최근 흑인 시위의 분위기에서 확산되는 '인종차별' 동상 철폐의 문제에 대해 '제국의 위안부'로 악명을 구가하는 박유하 교수는 모든 동상은 그 나름대로 역사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아무 동상도 철폐하지 말라는 의견을 제시하는데, 나는 그것이 '급진적 수구주의'로 부를만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동상은 어떤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것이 정의롭지 않다면, 다시 말해 동상이 표상하는 것이 '카이로스'적으로, '에토스'적으로 틀리다면 철폐하는 것이 나는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우슈비츠나 518 국립묘지의 전두환 비석처럼 비판적으로 보존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에토스, 로고스, 카이로스적 평가를 부검에 유비하면 수술대에 누운 시신의 외부와 내부를 검안하는 것은 에토스와 로고스의 일이며 날선 칼로 허파를 갈라 그가 들이 쉬던 숨을 포착하는 것이 바로 카이로스다. 내가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 시사적인 분석을 하기 보다 이러한 일반론적인 체계를 만들고자 한 것은 첫 번째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매우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이라는 그림에 대한 해석틀을 명확히 정리해보고자 하기 위함이다. 둘째로는 그런 틀을 공유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씌어 있을 저주를 벗기고, 누군가에게는 마땅한 축복이 주어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 발명품일 뿐인 이러한 인식 체계는 절대적으로 엄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이 본질에서 당위를 희구할 수 없다는 건,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증명한 수학의 부조리성 혹은 그것을 넘어 파르메니데스가 무한 소급의 '일자'로 논증 한 우주의 부조리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근원에서 조리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부조리한 실존을 위해 스스로 옳은, 자명한 공리를 필요로 한다.

유클리드의 공리, 민주주의의 입헌주의, 칸트의 정언명령, 종교의 경전들이 그것이다. 철학자 존 설은 본질에 내재된 구문을 얻는 것은 마치 그 속에 호문쿨루스라는 소인을 탑재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스스로가 만들어 낸 소인 '호문쿨루스'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내가 만든 '에토스, 로고스, 카이로스'의 호문쿨루스는 예를 든 공리들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지만 적어도 독단적이고 증명되지 않은 생각의 틀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거인 아르고스는 그가 가진 100개의 눈을 통해, 100개의 잣대로 심판의 '폭정'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터무니없는 잣대로 이뤄지는 '심판 폭력'을 넘어야 하며, 모든 악행을 합리화하는 반동적인 아노미도 배격해야 한다. 세눈박이 소인 호문쿨루스의 에토스, 로고스, 카이로스라는 3개의 눈으로 세계라는 그림을 명료하게 해석하여 X, Y, Z의 3차원 좌표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카이로스적인 진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솔 알린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아갈 방향은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는 나아가야만 한다.'

 

 

참고문헌

1) Aristotle’s Rhetoric.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2002년 5월 2일. 2010년 2월 1일 수정. https://plato.stanford.edu/entries/aristotle-rhetoric/

2) Fourth Debate: Charleston, Illinois. Lincoln Home National Historic Site (U.S. National Park Service). 1858년 9월 18일 https://www.nps.gov/liho/learn/historyculture/debate4.htm

3) A Letter on Justice and Open Debate. Harper's Magazine. 2020년 7월 7일. https://harpers.org/a-letter-on-justice-and-open-debate/

4) 노엄 촘스키는 누구인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0년 5월 10일.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75

5) Poulakos, John. "Toward a Sophistic Definition of Rhetoric". Philosophy and Rhetoric. 1983년

옳은 존재의 개소리에 대하여 - 칼럼|작성자 M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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