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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칼럼] 증오를 넘어 연대하는 힙합으로
[서포터즈 칼럼] 증오를 넘어 연대하는 힙합으로
  • 민보영(르디플러)
  • 승인 2020.08.10 15: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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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디플러 1기=민보영] "내 도시 HLM(habitation à loyer modéré, 프랑스 저가 임대 주택)의 바닥으로부터 / 너의 깊은 들판에 이르기까지 / 우리의 현실은 모두 다 마찬가지죠 /(중략) 친애하는 동지, 유권자 여러분 / 친애하는 시민, 소비자 여러분 / 싸움이 있는 한 희망은 있고 / 우리가 서 있는 한, 결코 포기하지 않죠."

자신뿐만 아니라 '깊은 들판'에 있는 '너'에게까지 시선이 가 닿는다. 노래 속 화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처럼 소외받는 타인과 연대해 '우리'를 만든다. 프랑스 음악그룹 HK & Les Saltimbanks’의 노래 'On ne lâche rien!' 일부 가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기사에 소개된 음악이기도 하다.

가사를 쓴 리더 HK는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로 프랑스 북부의 도시 루베에서 인종 차별을 당하며 자랐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픔뿐만 아니라, 같은 체제에 놓인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노래가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이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효과적인 '힙합' 장르의 특성을 빌려 타인과 연대하려던 시도가 성공한 셈이다.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 저명한 대중가수인 'DJ DOC'가 랩으로 참가자들의 단합을 이끌어낸 것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힙합은 급진적인 장르다. 극심한 가난과 인종차별을 겪으며 마약, 총 등을 가까이 하며 법의 테두리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온 흑인들에게서 나왔다. 소외된 이들의 에피소드가 담긴 노래가 불린다는 건, 그만큼 그들의 목소리가 다른 계층에 알려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힙합은 어떤 면에서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최초의 아랍 래퍼 '하람'이 팔레스타인 청년의 생활고를 이야기하자 유태인 래퍼들이 들고 일어나 중동의 갈등을 촉발하는 영화가 나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장애인이나 여성 등 사회적 약자를 조롱의 소재로 삼는 뮤지션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데 있다. 최근 한 남성 래퍼는 성적 대상으로 희화화한 여성에게 고소당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래퍼는 과거 '에이즈 환자처럼 성관계'하는 게 모토라고 밝히는 등 거친 가사로 여러 차례 비판받아온 장본인이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재력과 여성 편력을 과시하며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린 남성 래퍼의 랩은 K-힙합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일각에선 한국의 소득 격차나 인이 복지 시스템, 인종차별의 측면에서 미국보다 나은 수준인 만큼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감성이 미국의 그것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본토의 거친 분위기를 현지화하는 과정이 녹록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저 그 차이를 인정하되,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게 좀 더 괜찮은 현지화 방법이 아닐까. 여성, 청소년 등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래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들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런 방향은 힙합 등 예술 분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힙합 생태계의 다양성을 더욱 확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최근 종영한 여성 뮤지션의 경연 프로그램 <굿걸>에서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을 암시하는 노래 가사가 나오고, 채식주의나 페미니즘 등 특정 가치에 대한 랩을 하는 뮤지션이 등장한 건 그래서 반갑다. "내게 필요한 건 많은 돈보다/내가 사랑하는 네가 날 사랑하는 거야/서로 미워하는 애들은 걍 미워하게 둬/그 시간에 난 차라리 덕질을 하겠어." 증오와 부정의 서사를 바탕에 둔 장르가 힙합이지만, 이런 감정을 딛고 타인을 보듬을 수 있는 장르도 역시 힙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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