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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인 감수성’이 필요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노인 감수성’이 필요한 영화 <남매의 여름밤>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09.14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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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캥거루족, 리터루족

자립할 나이가 되어도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힘들어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기대어 사는 사람을 캥거루족이라 부른다.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중년 캥거루족도 늘어 40대 캥거루족이 42.7%로 증가했다.(1) 이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결혼 후 독립했다가 다시 캥거루족으로 돌아오는 ‘리터루족(리턴과 캥거루족의 합성어)’도 늘고 있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중년 캥거루족이자 리터루족인 아빠(양흥주)와 함께 사는 남매 이야기다. 사업에 실패한 병기는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 남매를 데리고 여름방학 동안 할아버지(김상동) 집으로 살러 들어간다. 친구처럼 자상한 아빠이긴 하지만 중학생 딸에게조차 미덥지 못한 아빠 병기, 딸 옥주는 연신 물어본다. “할아버지한테 말한 거 맞지?” 아빠는 할아버지한테 다 말씀드려놨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여름방학 동안만 잠시 할아버지 집에서 지낼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된 여름방학 동안 어린 남매가 할아버지의 오래된 2층 양옥집에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새로운 물건에 호기심을 보이며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고모 미정(박현영)도 남편과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와 친구 집에 있다가 오빠와 합류한다. 조카들에게 때론 친구같이 때론 보호자처럼 안정감을 불어넣어 주고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다. 고모와 함께 집밥을 해서 먹은 첫날, 전을 부치고 잡채를 해서 거실에 상을 펴놓고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카메라가 양옥집 밖에서 들여다본 집안은 너무나 평온하고 화목해 보이는 풍경이다.

 

식구(食口), 한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

이 영화는 여름 한 철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게 된 남매의 성장기이다. 영화가 얼마나 평범한 일상을 편안하게 잘 그려내는지 영화를 보는 내내 남매들의 일상이 뭐 그렇게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아예 없지도 않은 그냥저냥 살아내는 날들의 연속이다. 아빠 병기의 사업 실패도 고모 미정의 이혼도 가족과 이층 양옥 한 채만 있으면 그냥저냥 견뎌낼 만한 시련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특히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가 삶의 힘든 빈자리를 채워주는 에너지임을 보여준다. 여름에 흔히 먹을 수 있는 시원한 콩국수, 비빔국수, 수박, 방울토마토, 포도를 함께 먹는 아름다운 일상이 스크린에 잘 담겨있다. 영화의 풍요로움은 단순히 사서 먹는 식재료가 아니라 텃밭에서 직접 키운 방울토마토, 고추, 포도를 따서 가족이 함께 나누는 장면들로 더 강화된다. 한여름 밤 식구들이 함께 먹었던 음식들과 그 시절은 아마도 오랜 시간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

윤단비 감독은 “가족들이 모였을 때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고, 말 그대로 가장 일상적인 식사 장면을 담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가족이 이렇게 함께 모여 음식을 장만하고, 텃밭에서 가꾼 음식으로 차려진 밥상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고 영화는 솔직히 말한다. 가족의 일상에 할아버지의 ‘똥’이 파문을 일으킨다.

 

남매의 대비 : 부모 것과 내 것의 경계 없음

어느 날 할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싼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별일 아니라며 빠르게 수습하는듯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빠는 옥상에 올라가 포도를 따와 할아버지 혼자 드시게 문을 닫아드리고는 이층으로 올라와 나머지 가족과 둘러앉아 포도를 먹는다. 고모가 조심스럽게 “할아버지 여기 계속 계시는 게 나은지, 아니면 요양원으로 옮겨서 모시는 게 나은지?”를 조카들에게 묻는다. 오빠인 병기와 고모는 이미 의견을 주고받은 상황이다. 옥주는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라며 반문한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거 괜찮다고 대답하고, 어른들에게 “할아버지 집에 우리가 얹혀 있는 거”라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옥주와 동주 남매

그러나 장면이 바뀌면 병기와 미정은 요양원을 둘러보고 있다. 전날 할아버지만 포도를 따로 먹게 하고 나머지 가족은 함께 먹는 장면은 ‘식구’에서 할아버지를 배제하기로 결정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영화는 거동이 조금 불편해지고 똥 한 번 실수한 할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비정한 결정을 내린다. 노인의 의견은 물어본 적도 없다. 이 노인은 변변한 집 한 채 건사하지 못했던 아들과 달리 이층 양옥에 살며 얼마 전까지 아들이 힘들다고 손을 벌릴 때마다 사업 자금을 대주었다. 최근까지 마당에 자신이 먹을 과일과 채소는 키워서 먹을 줄 아는 노인이었다.

요양병원 입원이야말로 고려장의 일종일 수 있다. 자식에게 버려진 박탈감과 고독감 속에 죽어가는 요양병원 입원보다 어쩌면 고려장이 더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자연 친화적으로 죽는 방법일지 모른다. 집에서 내쳐질 할아버지가 느낄 고독감과 우울증을 배려하지 않은 영화의 둔감한 ‘노인 감수성’에 조금 놀랐다.

요양병원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빠는 동생에게 기분이 좀 그렇다고 말한다. 노인인 '아버지의 처지'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는 의미가 아닌 자기가 그런 처지가 될 거라는 상상을 하니 기분이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동생은 “아직 날짜 남았잖아. 그리고 자주 와보면 되지.” “응” 그러나 현실적으로 부모를 요양병원에 모셔놓고 자주 면회 가는 일이 쉽지 않은 일임을 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병기와 미정 남매
병기와 미정 남매

그날 밤 바로 슈퍼 평상에 앉아 오빠 병기와 동생 미정은 아버지 재산인 이층 양옥의 소유권을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다음 날 둘은 암묵적인 합의를 했는지 아버지 몰래 집을 내놓고 집을 보러 온 사람에게 집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본 옥주는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했어?”라며 묻는다. 아빠가 우물쭈물하자 “할아버지한테 말도 없이 그러면 안 되지, 할아버지 요양원 보내놓고 아빠 마음대로 집 파는 건 좀 심하잖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아빠는 “뭐가 심한데. 너는 신발 가져다가 네 마음대로 안 팔았어? 똑같은 경우라고” 말한다. 영화는 아빠 병기와 고모 미정, 옥주와 동주 남매가 몇 군데 겹쳐 보이는 사건을 마련해 놓았다. 사전에 마련해 놓은 설정인 신발을 자기 마음대로 가져가 판 딸과 병기 자신이 집을 마음대로 파는 것과 똑같은 경우라고 자기 합리화로 사용한다.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판타지, 적절한 죽음의 타이밍

“이야기의 시작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탐내는 가족들의 블랙코미디였다.” 실제로 만들어진 영화는 부모의 재산을 탐내는 자식들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안감이 없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관객들도 영화를 편안한 마음으로 보셨으면 좋겠다.”라는 연출 의도대로 보인다. 영화는 가족 구성원에게 조금씩 위기가 찾아왔지만, 극적인 상황으로 내몰거나 절박한 상황으로 풀어가지 않는다. 실제로 남매가 아버지를 요양병원으로 보내고 이층 양옥을 팔았으면 관객에게 불편한 영화가 되었을지 모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옥주가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오던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고모가 고모부가 함께 앉아 슬피 울고 있다. 울먹이는 아빠와 슬픔이 그렁그렁한 눈의 옥주. 저녁에 되자 장례식장에 온 엄마와 모든 가족이 할아버지 영정을 배경으로 각자 밥을 먹는 장면과 함께 먹는 장면이 이어진 후 장례식장에서 동주가 춤을 추고 가족 모두 흥겨워한다. 꿈이었다.

이 영화에서 ‘노인의 죽음’은 일종의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극적 해결이다. 데우스엑스마키나는 극의 사건 진행 과정에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뒤틀어지고 비꼬인 문제가 파국 직전 무대의 꼭대기에서 기계 장치를 타고 무대 바닥에 내려온 신의 대명에 의해 해결되는 기법이다. 이 영화는 신의 영역인 죽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이로써 영화가 한 번의 똥 실수를 한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보내는 평범하고 일상화된 악을 실행했다면 이후에 느껴질 도덕적 딜레마를 모면한다.

 

“Love is so short. Forgetting is long.”

이 영화에서 노인은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욕망을 발현하는 캐릭터가 아닌 리터루족인 남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공급자 역할만 있을 뿐이다. 리터루족 남매는 부모가 연어가 되길 바란다. 연어는 태평양을 여행하다 수천 킬로 떨어진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그 위에 엎어져 죽는다. 자기 시신이 새끼가 될 알들의 영양분이 되라는 죽음을 뛰어넘는 부모 희생의 발현이다. 연어의 죽음처럼 노인의 죽음으로 어떤 도덕적 딜레마 없이 자연스럽게 남매 소유가 된 이층 양옥은 당분간 남매 삶에 영양분이 될 것이다.

다마스를 타고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초라한 옷 보따리 몇 개 챙겨들고 온 아들과 그의 두 자녀, 트렁크 하나 달랑 들고 돌아온 딸. 그들의 미래에 아버지의 이층 양옥은 영양분이다. 노인이 그렇게 죽었으니 망정이지, 더 살아있었다면 살아있는 동안 허무함과 외로움을 품고 쓸쓸한 요양병원의 한 침대에서 죽는 날만을 세고 있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감독이 원했던 불안감이 없고 평범한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노인이라는 한 인격체가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가능했다.

 

실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야기의 시작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탐내는 가족들의 블랙코미디였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된 착상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살아있다. 일상이 너무나 평온하게 잔잔히 흐르고 저류에 흐르는 급물살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더 평온해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영화를 곱씹을수록 그 속에 흐르는 자식들의 빠른 계산과 이기적인 속내의 빠른 유속이 감지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저 사춘기 소녀의 성장담으로만 보아 넘기기 힘든 지점이 있다.

품위 있게 늙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노년을 그리는 <죽여주는 여자>, <69세>, <남매의 여름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노인의 인권이 짓밟아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영화가 연달아 소개되고 있다. 남들 눈에는 노인이 살만큼 살았다 싶지만, 고령화 시대라 노인의 삶도 살아내야 할 날들이 생각보다 길다. 그리고 노인이라고 삶에 대한 인간이 지닌 욕망이 모두 죽은 게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은 노인의 의사 한 번 묻지 않고, 세상은 불필요한 짐짝처럼 취급받는 노인의 서글픈 마지막이 섬뜩하게 다가온 이유는 그것이 나의, 그리고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당신의 멀지 않은 어느 날의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1) 캥거루족도 고령화?... 2049세대 절반 이상 "나는 캥거루족", 매일경제, 2020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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