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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이별은 사랑의 해피엔딩
[이주라의 문화톡톡] 이별은 사랑의 해피엔딩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0.09.1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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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께하는 사랑의 종말

로맨스 서사의 해피엔딩은 두 남녀의 행복한 결합이다. 일부일처제 가정이 사회의 이상으로 여겨지던 시대에는 행복한 결합이 결혼으로 마무리되었고,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을 추구하는 요즘에는 행복한 결합이 커플되기 혹은 연애하기로 마무리된다. 물론 웹소설을 중심으로 한 장르로서의 로맨스의 경우는 아직까지도 에필로그의 형식을 통해 완벽한 커플인 남녀 주인공이 결혼 후까지 얼마나 아름답게 사는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들을 닮은 아들과 딸은 꼭 낳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한 후에도 부부의 사랑은 뜨겁게 달아올라야 한다. 로맨스의 해피엔딩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해피엔딩은 불변할 것 같다. 로맨스 장르의 가장 관습적인 법칙, 그래서 로맨스를 즐기는 독자의 가장 보수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로맨스 장르의 역사적인 변화 속에서, 구릿빛 근육과 태생적 무뚝뚝함을 장착한 마초적인 남성 주인공이 돈과 권력과 세련됨과 냉소 그리고 서늘함을 장착한 도시의 알파남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내면의 상처라는 예상치 못한 나약함으로 여성의 모성애를 흔드는 베타남의 면모까지 획득하게 되나, 해피엔딩의 법칙은 바뀌지 않는다. 여성주인공의 캐릭터 또한, 손대기만 하면 기절하는 청순가련형에서, 어떤 시련에도 꿋꿋하게 웃는 캔디형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는 유능한 캐리어우먼으로 그 성격을 변화시켰으나, 어쨌든 여주인공도 결국 로맨스의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산다. 장르의 관습 속에서 캐릭터 변화의 폭은 시대적 변화에 맞춰 재빨리 변화하지만, 기본 서사의 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라라랜드 공식포스터 ⒸSummit Entertainment
라라랜드 공식포스터 ⒸSummit Entertainment

이렇게 로맨스 서사의 기본적인 틀에서 봤을 때 가장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바로 <라라랜드>의 결말이다. <위플래시>(2014)로 히트를 쳤던 데이미언 셔젤이 직접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은 두 번째 장편 영화 <라라랜드>(2016)에서, 두 남녀 주인공은 결혼하지 않는다. 나름 이 영화의 반전 구조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말미에 미아(엠마 스톤 분)가 유복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는 당연히 그 행복이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과 함께 하는 삶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만들지만, 사실 미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감독은 로맨스 서사에 익숙한 관객들을 낚기 위해 로맨스 서사 속 해피엔딩을 예상하게 할 만한 미끼를 곳곳에 던져 놓고, 마지막에는 그 예상을 뒤엎으며 관객을 배신한다. 이것이 감독이 관객에게 안긴 첫 번째 놀라움이다.

두 번째 놀라움은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두 남녀 주인공이 결합하지 않았다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깔끔하게 끝나면 될 것을, 굳이 미아와 세바스찬이 잦은 다툼에서 벗어나 화해하고 함께 살아가는 로맨스의 전형적 해피엔딩의 결말을 ‘환상’의 형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로맨스의 해피엔딩은 이제 더 이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고 환상 속에서만 실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영화를 오로지 장르로서의 로맨스 서사로만 읽어내고자 하면, 이 지점에서 난처해진다. 이제 로맨스의 해피엔딩은 장르 클리셰를 넘어 패러디의 영역으로 넘어갔는가. 그렇다면 로맨스의 결말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앞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의 미래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이러한 곤혹의 지점은 로맨스 서사가 이미 어떤 경계를 넘어서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두 사람의 합일이라는 낭만적 사랑의 서사는 이제 끝난 것이다. 사랑은 더 이상 첫 눈에 반한 남녀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영원히 함께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평생을 함께한다는 그 개념이 실현 가능해지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로맨스 서사는 어떤 식으로 결말 맺을 수 있을까.

 

2. 변화하는 사랑의 시작

 

노멀피플 공식포스터 ⒸBBC&HULU
노멀피플 공식포스터 ⒸHULU

샐리 루니(Sally Rooney)의 장편소설 『노멀피플(Normal People)』은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샐리 루니는 아일랜드의 신예 작가이다. 2017년 첫 장편소설인 『친구들과의 대화』로 데뷔해 평단과 대중 모두의 지지를 얻었으며, 두 번째 장편소설인 『노멀피플』이 2018년에 맨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J.D. 샐린저, 제인 오스틴, 프랑수아즈 사강의 후예로 일컬어지고 있다. (참고로, 샐리 루니의 전형적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스냅챗 세대의 샐린저, 프레카리아트의 제인 오스틴, 더블린의 프랑수아즈 사강) 『노멀피플』 또한 평론가의 찬사와 독자의 열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이에 힘입어 이 작품은 2020년 4월에 Elment Pictures에서 제작해, BBC와 HULU에서 드라마로 방영하였다. 이 드라마 또한 큰 인기를 모았다. (한국에는 2020년 9월에 OTT 플랫폼인 웨이브(wavve)에 전편이 공개되었다.)

일단 드라마를 강추한다. 원작인 소설도 좋지만, 드라마 또한 원작의 섬세함을 예민하게 포착하였다. 이 작품은 아일랜드 서부의 작은 마을과 더블린을 배경으로, 메리앤과 코넬이 고등학교에서 만나 대학에 이르기까지 4년간의 시간 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쉽게 이별하지 못하는 오래된 연인의 모습과 비슷해서, 언뜻 보기에 평범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끊임없는 흔들림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20대 초반이라는 주인공들의 나이, 예민하고 섬세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주인공들의 성격을 통해, 이들의 사랑과 이별이 각각의 존재에게 남기는 커다란 각인에 집중한다. 그리고 각 존재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과 변화에 주목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내면의 흔들림을 담담하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 속 두 남녀의 사랑은 특별하다. 매우 똑똑하고 오만하여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아예 어울리지 못하는 메리앤은 사실 자존감이 낮아 타인의 폭력적인 공격 앞에서 자기 보호의 방어막을 펼치지 못한 채 점점 자학이나 자기 파괴라는 마조히스트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코넬은 고등학교 시절에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학생이었고 그래서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잘 맺는 것 같지만 그 역시 자존감이 낮아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확인해야만 하는 근본적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이런 두 남녀는 서로가 함께일 때만 서로에게 가장 진솔하게 행동한다. 그들이 함께하는 순간 그들은 사회적 가식을 내려놓고, 각자의 깊은 곳 상처를 솔직하게 터놓으며, 모두가 가장 완벽하다고 느낀다. 메리앤과 코넬은 낭만적 사랑에서 흔히 말하는 운명적 상대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결혼이라는 완전한 결합을 통해 로맨스의 이상을 실현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메리앤과 코넬의 이별이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메리앤과 코넬은 3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데, 이 세 번째 이별이 작품의 결말이며, 그 이별은 진정한 이별이다. 다시 만나서 사랑을 할 것 같은 여지를 남기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완전하고도 완벽한 이별인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 번째 이별은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기도 하다.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진짜 사랑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메리앤과 코넬은 서로 헤어지지만, 이제는 각자가 지닌 고독과 그로 인한 고통, 내면의 불안과 여기에서 도피하기 위한 서로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서로가 다른 내면을 가지고 서로가 다 알 수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서로가 인정해 줘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각자 존재의 독립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의 독립성을 믿는 것이다. 메리앤과 코넬의 사랑은 낭만적 관점에서 보자면 불완전했던 개인들의 완벽한 결합이지만, 주체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각자의 불안을 사랑이라는 허상으로 덮으려고 했던 서로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존적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 그래서 고독이 주는 고통을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라 해석하지 않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삶에 당연히 내재하는 감정이라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런 주체성의 정립이 이들 사랑의 해피엔딩이다.

『노멀피플』은 이것을 성장이라 의미화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로맨스 서사에 자주 등장하는 상처 입은 남녀의 치유와 성장이라는 주제로 이 작품을 읽어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수용과 변화이다. “지금껏 그들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말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어.”(샐리 루니, 『노멀피플』, 김희용 역, 아르테, 2020, 324쪽) 소설의 결말을 장식하는 메리앤의 깨달음은 소설의 시작을 여는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의 한 구절과 쌍을 이룬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의 인격에 강한 영향을 받아 그 인격을 순순히 수용한 다음에야 하늘이나 땅의 계시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인간 정신 변화의 비밀이다.”

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사랑은 낯선 존재인 타인에 대한 온전한 수용과 그로 인한 주체의 변화이다. 타인에 대한 수용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여 그 상처를 치유해 주려고 하는 극복의 서사와도 다르며, 사랑으로 인한 변화는 특정한 방향으로의 발전을 내재해야만 하는 성장의 서사와도 다르다. 타인의 인격에 대한 수용은 타인의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며, 그 과정에서 나의 인격을 상실할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도 타인의 영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위험의 과정을 통과하며 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나간다는 의미이다. 폭풍 같은 사랑은 자아의 상실을 초래한다. 자아의 상실은 타인의 수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타인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 가끔 우리는 사랑의 열정 속에 자아를 내팽겨 칠 때도 있으나, 타인을 통해 변화한 나 자신을 건져 올려, 그렇게 변화한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될 때, 드디어 행복한 사랑은 시작된다. 『노멀피플』은 두 사람의 완벽한 결합이 아닌, 두 사람의 완벽한 이별을 통해 변화와 수용을 통해 자신과 타인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랑의 해피엔딩을 그려내었다.

 

3. 사랑하는 개인의 시간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공식포스터 ⒸtvN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공식포스터 ⒸtvN

이제 사랑의 핵심은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가 행복한 시간이다. 사랑을 통해 서로가 자신의 삶에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사랑은 자기만족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 사람과의 만남이, 내 삶의 수용 가능 범위를 넓혀 줘서, 나를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 그로 인해 내 삶을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켜 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것,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내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이 시점에서 최근 tvN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결말을 떠올려 본다. 이 드라마는 굳이 장르를 분류한다면, 로맨스 드라마가 아닌 가족 드라마에 속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해피엔딩을 맺는 방식은 한국 특유의 가족 드라마의 결말로도, 그리고 현재 변화하는 지형의 로맨스 드라마의 결말로도, 신선하고 새롭다. 이 드라마를 가족 드라마로 읽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작품이 중년 부부인 상식(정진영 분)과 진숙(원미경 분)의 갈등을 둘러싸고 진행되기 때문인데, 오히려 이 둘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고 이 애정이 해피엔딩을 맺는 과정은 현재 로맨스 서사에 나타나는 수용과 변화의 결말과 유사하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는 상식과 진숙의 둘째딸인 은희(한예리 분)의 나레이션을 통해 정리되는데, 이 나레이션에서 은희는 자신의 가족 그리고 졸혼의 위기까지 갔던 부모님의 해피엔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족은 각자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진숙은 드디어 가족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진숙의 기약 없는 여행에도 상식은 자신만의 일상을 꾸려나간다. 그들은 헤어져 있지만 헤어지지 않았다. 떨어져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소통한다. 이렇게 각자의 시간을 가질 때 사랑은 더욱 풍성해진다. 한국의 사랑 이야기 속에서도 이제 조금씩 사랑하는 개인들의 시간을 그려내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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