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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급기야 '상간남' 부부까지 살해한 ‘상간녀’가 존엄한 이유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급기야 '상간남' 부부까지 살해한 ‘상간녀’가 존엄한 이유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0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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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상간녀 살인사건'

상간녀 살인사건이란 몰취미한 제목의 이 영화는 제목에서 받을 첫인상과 달리 스릴러로서 수작에 속한다. 2019년에 발표된 상간녀 살인사건은 반전을 거듭하다가 마지막에서까지 허를 찌르는 속도감 있고 탄탄한 작품이다. 국내에도 2019년에 개봉된 상간녀 살인사건의 원제는 ‘An Affair to Die For’로 한국어 제목보단 영어 제목이 더 품격이 있다고 해야 할까.

 

An Affair

 

상간녀 살인사건이란 한국어 제목은 취향을 떠나서 비문에 가깝다. 굳이 정정하여 상간녀 살해사건으로 한다고 하여도 상간녀가 거슬린다. 제목만으로 판단하면 상간녀가 누구를 죽였다는 것인지, 상간녀가 살해당했다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또 드는 의문은 상간녀라는 단어를 썼으면 상간(相姦)이란 행위가 선행하고 맥락상 동성애가 아닌 만큼 상간에는 상간녀뿐 아니라 상간남이 필요할 텐데, 영화는 상간녀만을 제목으로 뽑았다.

영화의 내용으로는 상간녀이자 주인공인 할리(클레어 폴라니)가 상간남 에버렛(제이크 아벨)과 에버렛의 아내(멜리나 메튜스)를 죽이니 상간녀가 누구를 죽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야 하겠다. (부도덕하다는 판단을 내포한) 상간녀가 상간남 부부를 죽인다는 사회면 신문 1단 기사를 연상시키는 한 줄 요약은 주인공 할리에게 악의 화신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한데 영화를 보면 알게 되지만 주요 등장인물 4명 가운데서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인간적인 인물은 할리이다. ‘정상인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따져봐야 하겠지만 그래도 그다지 틀린 판단은 아니지 싶다.

일부러 거슬리는 제목을 써서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맥락의 뭉개짐은 피할 수 없었다. 살짝 문제로 삼자면 비()페미니즘 작명법이기도 하고.

영어 제목 ‘An Affair to Die For’는 어떻게 번역해야 정확할까. ‘affair’‘love’와 연결되지 않아도 정사, 연애, 나아가 불륜이란 뜻을 갖지만 동시에 사건이나 벌어진 일이란 상간과 무관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어 제목에 맞춰 번역하면 죽어 마땅한 불륜이 되지만 죽어도 좋을 사랑이라는 (맞는지 모르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의 창의적 번역도 가능하다. 영화 내용과 연관성을 감안하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사건쯤으로 해석해도 되겠다.

 

 

상간녀 살인사건에서 그나마 제대로 사용한 단어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어 제목과 영어 제목의 번역으로 예를 든 모든 내용을 포괄한다. 영화 중간쯤에 사랑에 관해 읊조리는 할리의 대사가 이 영화가 다룬 사건의 본질을 제시한다. 인간은 타인이 기대하는 만큼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도 턱없이 모자라는 자신을 감내하며 살아가다가 뜬금없이 불확실할뿐더러 기대를 배신하는 사건에 뛰어들어 자기파괴의 길을 스스로 택하기도 한다. 특히 연애라는 사건은 함정과도 같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본 부나방처럼 그곳으로 달려간다.

극중에서 할리가 가장 탁월한 인간으로 그려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함정인 줄 알았지만 매혹적인 함정에 끌려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함정 안에서도 짧은 순간에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과단성 있는 성격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연출역량과도 관련 있는 마지막 장면은 비극적 결말임에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할리야말로 고전주의 비극이 표현하고자 한 인간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에게서 관객은 불편을 느낄 법하다. 스릴러에 불필요하지만 캐릭터 설명에는 필요한 정보를 짧은 상영시간 내에 고도로 압축해 넣어서 나머지 세 사람의 비범한 악이 두드러지게 묘사되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보통의 사람을 완전히 뛰어넘어 사이코패스에 근접한다. 그중 최악은 에버렛의 아내로 사실상 악의 화신이다. 보통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지만 그나마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인간형은 할리의 남편(타이터스 웰리버)이지 싶다. 그리하여 이런 악의 병풍 안에 던져진 고결하진 않지만 그래도 인간다운 인간인 할리는, 던져짐 자체로 하나의 사건을 표상하며 불가항력의 사건에 휘말려 표류하면서도 어정쩡한 도덕률에 억눌려서 해야 할 일을 못 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사건은 상간녀였다.

 

완성도 높은 스릴러

 

영화는 주로 방 하나를 활용하는 좁은 공간에서 하룻밤에 벌어진 일을 극화했다. 군더더기 없는 스릴러이기에, 이런 장르에 정통한 관객이라고 하여도 마지막 몇 분의 반전을 쉽게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 범죄나 범죄 드라마에서 단골 용의자인 배우자가 상간을 다루는 이 영화에선 두 명인데 한 명의 알리바이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깨지고, 나머지 한 명의 알리바이는 끝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에버렛의 아내에 대한 의심은 일종의 고육책인 절단된 손가락으로 인해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예민한 관객이라면 할리가 방을 나서는 대목에서, 시작해 놓고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있다고 느낄 법하지만, 전개 속도가 빨라 추리가 끼어들기 전에 반전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영화는 할리가 밀애의 장소로 향하는 첫 장면부터 이후 종종 교묘하게 반지를 보여준다. 협박용으로 전달된 에버렛 아내의 잘린 손가락에도 반지가 끼워져 있다. 에버렛과 할리는 계속 결혼반지를 낀 채이고 카메라는 다른 장면에 묻어가는 방식으로 두 사람의 반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반지는 표면적으로 에버렛과 할리가 맺은 관계가 부적절한 것임을 입증하는 직유의 보조장치로 활용되지만, 나아가 곤경에 처하고 함정에 빠진 두 사람의 상황을 대놓고 은유하면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선택과 구속(拘束)이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을 상징하였다는 것이 개인적인 분석이다.

두 사람은 협의의 ‘An Affair’의 주역이다. 두 사람 중 에버렛에게선 안타깝게도 ‘An Affair’에 대한 진정성이 영화의 현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안대를 하고 수갑을 찬 채로 침대에 누워 연인을 기다리는 할리에게서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그려진 반면 관객에게 에버렛은 영화 시작과 함께 함정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사랑 대화중 에버렛이 “had fun.”이란 과거형을 쓰고 할리가 “been fun.”이란 현재완료를 쓴 시제의 차이가 ‘An Affair’에 대한 진정성의 차이를 곧바로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사랑 앞에서 더 당당한 인물이 할리였다는 점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느슨한 구석이 없으면서 동시에 과장도 없는 거의 완벽한 스릴러를 상간녀 살인사건이라는 기이한 한국어 제목의 영화를 통해서 관객은 확인할 수 있다. 극중 결혼 21년차인 할리 부부의 첫 데이트날인 비밀번호가 마지막 반전의 실마리가 된 것은 개연성 측면에서 약간의 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잔잔하면서도 이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구현한 스릴러를 찾기는 힘들다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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