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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빠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아리아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빠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아리아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19 09: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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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보>는 오해하기 쉬운 영화다. 포스터 자체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여러 홍보영상은 이미 무슨 얘기를 할 것이라고 전부 다 말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이 역의 박소이가 주는 이미지는 귀엽고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미리 톤을 한껏 높여 놓은 것처럼 보이는 탓에 더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의외의 메시지가 엿보인다. 그 메시지는 사뭇 감동적이지만, 이 영화의 노림수와는 분명 다른 곳에서 작동한다. 바로 그 의외의 감동 지점을 겨냥했을 때 승이는 정확했고, 두석은 절제되어 있었으며 종배는 적절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한 승이

승이(박소이)가 엄마(김윤진)와 처음 등장할 때 이 소녀는 ‘엑스트라’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독촉장이 슬쩍 노출될 때 이 엑스트라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희생되는 ‘신탁물’이 된다. 그러나 신탁물이었던 이 소녀가 유흥업소 골방에 갇히게 되는 순간 마치 영화 <아저씨>에서 ‘소미(김새론)’와 같은 캐릭터로 돌변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관계의 틀이 구축되고 난 후 곧 바로 승이는 ‘철학적 천사’가 된다.

 

어린 승이역의 박소이는 ‘엑스트라’, ‘신탁물’, ‘영화 <아저씨>의 소미’, ‘철학적 천사’에 각각 부합하는 정확한 연기를 해낸다. 이는 분명 <담보>의 강대규 감독이 어린 승이를 통해 하고자 한 바를 그렇게 정확히 지시했고, 이를 승이는 정확히 재현해 낸 덕이 클 것이다. 감독과 배우의 정교한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바로 이 영화에서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절제된 두석

하지만 두석과 종배는 정확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둘의 자연스러운 캐미를 과신한 탓에 그러했을 것이다. 이는 영화 초반의 상황들이 살짝 들떠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석은 승이가 변화해 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동안만큼은 어떠한 힘 조절도 실수하지 않는다. 승이와 엄마를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서 두석은 보편적 태도를 유지했고 신탁물로 돌변했던 승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야비하지 않았으며 영화 <아저씨>의 소미와 같은 캐릭터가 되었을 때는 영웅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될 때 그는 아저씨와 아빠 사이를 절묘하게 줄타기하기에 이른다.

 

적절한 종배

두석의 절제 속에는 종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승이와 두석 사이에 놓여있는 아저씨와 아빠 사이의 줄타기는 어쩌면 종배 덕에 가능했을 수 있다. 승이에게 있어서, 어떤 때는 어머니의 역할을 어떤 때는 오빠의 역할을 어떤 때는 삼촌의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이는 두석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부인의 역할을 어떤 때는 동료의 역할을 어떤 때는 동생의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종배의 역할은 바로 아저씨와 아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두석과 승이 사이의 중심을 잡아주는 추였던 것이다. 좋은 캐릭터란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소모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배는 꽤 좋은 캐릭터다. 간만에 캐릭터들 간의 이러한 조화를 확인할 수 있었던 탓에 나는 영화 내내 이야기보다는 그들 간에 형성되어 있는 균형과 긴장감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담보와 승보, 아저씨와 아빠, 소녀와 딸 사이의 줄타기는 분명 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승보라는 이름과 담보라는 이름

승보는 승이가 즉흥적으로 지어준 두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담보 역시 두석이 승이에게 즉흥적으로 지어준 이름이다.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는 상황은 그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새로운 가족관계 설정의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새로운 그 설정은 서로 다른 이름이었던 어쩌면 서로 다른 세계 속 사람끼리 같은 공간에 놓이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더욱이 승보와 담보라는 이름은 후에 승이가 통역관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 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달랐던 세계 속에서 살다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한 공간 속에 놓인 새로운 가족이 되어간다.

 

아저씨와 아빠의 경계

그런데 새로운 가족관계의 문제는 두석과 승이와의 관계 속에서는 호적상의 아빠와 생물학적 아빠와의 간극을 유발한다. 영화에서는 이를 아저씨와 아빠라는 호칭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 두석은 승이에게 아빠라고 불리길 원한다. 그래서 승이의 친 엄마(김윤진)가 친부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갈등이 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다름 아닌, 두석이 승이에게 친부를 찾아주던 날이었다. 바로 그날 비로소 승이는 두석에게 아빠라고 부른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아저씨와 아빠라는 호칭에는 어떤 논리적인 설명도 따라 붙지 않는다. 당연한 호칭으로 여겨서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일상의 가족 속에서 아빠의 의미를 대하는 시선은 대체로 섬세하지 않다. 일상에서의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 이름의 이런 당연함을 특별함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감독은 사회적으로 아빠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두석이 바로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석에게서 아빠이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두석은 사실 늘 아빠이고 싶어 했으나 사회가 두석에게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을지 모른다고. 그러자 어떤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품에 안기게 된 승이를 두석이 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소녀와 딸

지금 나는 두석의 캐릭터가 얼마나 윤리적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석과 같은 처지의 사람, 다시 말해서 어떤 이유에서건 “아빠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승이는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뿐이다. 어쩌면 승이는 아빠가 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침묵해 오던, 소위 아빠이고 싶은 자들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천사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천사로 인해 그들은 자신이 얘기하지 못했던, 아니 얘기하지 말라고 강요당했던 마음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승이(하지원)가 두석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목소리’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니, 두석에게 있어서는 ‘천사의 아리아’인 셈이다. 승이는 그렇게 소녀인 동시에 갑자기 점지된 딸이기도 한 ‘철학적 천사’가 된다.

 

아빠라는 이름을 박탈당한 자들에게 그렇게 나타난 승이의 존재는 어쩌면 우리 사회를 회복할 수 없이 갈라대던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경계를, 이름이 주어진 자와 이름을 박탈당한 자들의 관계로 바꿔치기한 후 일말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가능성은 판타지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가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또는 그 무엇이 나의 일상을 의미 있게 바꿔 놓을 수도 있다고 말해준다. 영화 <담보>는 그것이 축복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낯설다 할지라도, 나에게 짐이 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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