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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10.26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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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토니오 캠포스가 연출한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2020)는 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베트남전쟁 초반까지, 미국 오하이오 녹켐스티프와 웨스트버지니아의 콜크리크를 배경으로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영화이다. 영화의 내레이터가 매우 낙후되었다는 점을 강조할 정도로 두 지역 모두 삶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절망의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그 공간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합리적인 판단이나 이성적인 사고가 완전히 마비된 채 맹목적으로 믿음에 매달리는 부류이다. 그 가운데 참혹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윌러드가 있다. 읠러드는 자신 앞에 빛처럼 나타난 샬롯과 결혼해 아들 아빈을 낳는다. 샬롯이 암에 걸려 치료가 어렵다는 선고를 받게 되자, 윌러드는 자신이 만든 나무 십자가 밑에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절박하게 기도하기 시작한다. 열심히 기도하라고 아들을 가혹하게 몰아대던 그는 기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제물이 필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집에서 기르던 개를 죽여 십자가에 매단다. 이러한 망상은 윌러드가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전쟁터에서 겪었던 끔찍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윌러드는 일본군이 피부를 벗겨 십자가에 매달아 고통스럽게 죽어가게 만든 미군 중사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고, 어쩌면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신의 부재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가정을 꾸리면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간절한 기도와 제물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샬롯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윌러드는 아내의 죽음뿐만 아니라 거듭된 믿음의 붕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한다.

믿음에 관련된 또 다른 인물로는 목사 로이 래퍼티가 있다. 로이는 신도들의 신심을 북돋우고 더 많은 헌금을 모으려고 일종의 기적체험으로서 거미 떼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퍼포먼스를 시연한다. 그러다 그는 거미에게 뺨을 물리게 되고 믿음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자신에게 더욱 강렬한 신의 권능이 임했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아내 헬렌을 죽인 다음 다시 부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타게 ‘주님’을 불러도 헬렌은 살아 돌아오지 않고, 로이는 그녀의 시체를 암매장하고 도망친다.

결국 하나님의 기적이 부재한 탓에 윌러드의 아내와 로이의 아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자살한 윌러드와 달리 로이는 마을을 떠도는 연쇄살인마 부부 칼과 샌디의 손에 살해당한다. 믿음 때문에 아내마저 죽게 만든 그는 죽음의 순간에 주님을 부르고 천국과 구원을 열망하는 대신 혼자 남겨질 어린 딸 리노라를 떠올린다.

두 번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부류이다. 그 가운데 새로 부임한 목사 프레스턴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젊은 여신도들을 유혹해 성관계를 맺는다. 부모를 잃고 아빈의 할머니 집에서 자란 리노라도 프레스턴의 유혹에 넘어간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신앙심 깊은 젊은 여성에게 신학대를 졸업한 젊은 목사는 작은 마을의 어떤 남자보다 멋있게 보였을 것이다. 리노라가 임신을 하자 프레스턴은 그녀를 망상증 환자로 몰아간다. 절망한 리노라는 자살한다.

두 번째 부류의 또 다른 사례인 칼은 차를 몰고 다니면서 히치하이커를 태우고 그 히치하이커가 샌디와 성관계를 하도록 몰고 간 다음 살해한다. 그는 성관계 장면과 히치하이커가 죽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희열을 맛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음을 목전에서 볼 때 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존재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 엽기적인 행위와 살인행각이 참된 종교인 셈이다. 어떤 제지 없이 계속되는 칼과 샌디의 악마 같은 범죄는 하나님의 형벌 따위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의 참화뿐만 아니라 전쟁 동안 히틀러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을 목도 하고 신의 부재 또는 침묵하는 신으로 절망을 표현했던 상황과 연결 된다.

법치국가에서 범죄자들은 법에 의거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혈연관계로 이리저리 얽혀있는 작은 마을에서 치안을 책임진 보안관 보데커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인물다. 보데커는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잡는 데는 관심이 없고, 돈과 자신의 재선에만 집착하는 부패한 보안관이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 샌디의 범행을 알게 되었을 때, 재선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염려해 진실을 덮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따라서 결국 아빈이 이 악마들 모두를 제거하도록 내몰리게 된다. 그는 리노라를 죽음으로 몰고 간 프레스턴을 총으로 쏘고, 자신을 살해하려던 칼과 샌디 그리고 보데커까지 일종의 정당방위로서 모두 죽이게 된다. 프레스턴을 단죄하러 가면서 아빈은 “자신이 하려는 일은 원해서가 아니라 꼭 필요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빈은 교회에서 프레스턴을 발견하고 총을 겨눴다가 바로 쏘지 않고 대화를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프레스턴에게 지은 죄를 환기하고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그들이 대화하는 시간은 아빈이 복수를 포기하거나 실수하게 될까 마음을 졸이게 되는 순간이다. 또 칼과 샌디가 아빈을 또 다른 희생자로서 욕망의 제물로 삼으려고 시도할 때, 관객은 아빈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응원하게 된다. 보데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관객이 법치가 정지된 듯한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아빈의 살인을 바라게 될 때,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느낌이 함께 자리하게 된다. 만일 아빈이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빈이 도주하는 길에 집어 탄 차의 라디오에서는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에 파병하는 미군 병력을 대폭 증강한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전쟁은 살인을 정당화하고 부추기지 않는가! 결국 이 악순환 속에서 악(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S. : 이 영화를 코엔 형제가 연출했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글: 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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