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이병국의 문화톡톡] 따로 떨어진 세계에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의 불/가능성
[이병국의 문화톡톡] 따로 떨어진 세계에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의 불/가능성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16 09:2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50주기 되는 해이다. 그동안 노동환경을 나아졌다곤 해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는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그 처우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죽음의 외주화’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비정규직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와 노동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다시금 떠올려볼 때이다. 여기에서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발표된 세 편의 작품을 읽고 잊혀진 존재들의 희미한 흔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희망의 불/가능성 - 김영현의 「별」(『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실천문학사, 1999)

1989년, 김영현은 「별」을 발표한다. 같은 해 발표된 「멀고먼 해후」, 「그해 겨울로 날아간 종이비행기」 등의 소설에서처럼 「별」 역시 엄혹한 1980년대의 터널을 뚫고 나와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모색한다. 이 소설은 삼청교육대를 수용하고 있는 전방의 한 군부대에서 일어난 탈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서술자 ‘나’는 학생 시절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바로 군대로 끌려온다. 그곳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어 군종 사병으로 지내던 중 영등포 구치소 시절에 알고 지냈던 박용태를 삼청교육대에서 만나게 된다. 박용태는 삼청교육대를 탈출하게 되고 부대에는 비상이 걸린다.

 

10·26과 12·12 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발령한 후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를 통해 국정을 주도하게 된다. 신군부는 권력의 적통성을 세우기 위한 명분으로 안보태세 강화·경제난국 타개·사회안정과 정치발전, 사회악 일소로 국가기강 확립을 기치로 걸었다. 또한 1980년 8월 4일, 계엄사령관은 국보위의 삼청계획 5호에 따라 ‘계엄포고 제13호’를 발령한다. 국민적 기대와 신뢰를 구축하겠다는 명목으로 추진된 사회정화작업의 일환으로 삼청교육대가 설치되었으며 1981년 1월 25일까지 3만 9,742명이 순화교육 대상자로 분류되어 삼청교육을 받았다. 암흑과도 같은 1980년대가 시작된 것이다.

 

암흑의 ‘터널’을 지나온 김영현이 「별」에서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희망일 것이다. “절망적인 폭력 앞에 선 연약하고 외로운 한 인간”이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151쪽)를 위해 억압의 구조를 탈출함으로써 존재의 존엄을 구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이 이 소설의 주된 정조이다. ‘나’에게 ‘별’은 “찢어진 구름 사이”로 떠오른다. 하지만 억압적 세계를 찢고 밝게 빛나는 별을 소망하는 ‘나’에게 박용태는 별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가 점유하고 있는 자리이다. ‘나’는 박용태를 비롯한 삼청교육대생들과 유사한 위치에 놓여 있다. ‘나’는 ‘노예의식을 강요’하는 군사파쇼체제에 약간의 저항을 해보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를 본능적으로 느끼”(129쪽)고는 체제 순응의 인간이 된다. 이미 보안대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나’가 자기보존을 위해 모멸을 수긍하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나’에게 삼청교육대생들은 “광기에 젖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온몸으로”(128쪽) 발산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타자였다. 군인들에게도 ‘나’에게도 그들은 타자로 존재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현시하는 존재들이었다. 군종으로 그들 앞에서 선 ‘나’는 설교를 통해 그들과 동일시되는 경험을 한다. 폭력과 강제로 점철된 시대의 모순은 그들을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공감의 영역은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는 없다. 소설은 그렇기 때문에 공감의 공동체를 넘어선 지점으로 향한다. 출구는 존재하는가. 터널의 끝은 있는 것일까.

 

‘나’가 점유하고 있는 자리는 세계와의 대결을 통해 획득된 지점이 아니다. 그곳은 순응과 패배의 자리이며 자기 합리화를 통한 기만의 자리이다. 탈주가 불가능한 순응적 주체로서 ‘나’는 부조리한 권력 구조에 의해 포획된 존재이자 고착화된 권력의 효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대신할 존재가 필요하다. 아직 권력 구조에 포획되지 않은 존재, 그가 바로 박용태이다. ‘나’는 비상이 걸리는 순간부터 박용태의 탈출을 기정사실화한다. 그는 ‘나’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내 발로 이곳을 떠날 거요.”(146쪽)라고 썼다. 그는 ‘나’와 달리 권력의 폭력과 강제에 순응하지 않는 능동적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나’는 박용태에게 강한 일치감을 느낀다. 그의 탈출을 “갇혀 있는 모든 사람들의 탈출”로 의미화한다. 단단하고 견고한 세계를 찢을 수 있는 인간의 도전이자 수치와 모욕의 부끄러운 삶을 사는 주체의 존엄을 회복시켜줄 구원으로써 그의 탈출을 전유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정말 박용태의 탈출은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박용태를 형상화하는 방식을 보면 그 가능성에 의문이 든다. 그는 살아 있는 유기체라기보다는 작가의 희망이 추상적으로 투사된 관념적 존재처럼 보인다. 그는 탈주를 위한 존재의 층위로 천착될 뿐, 개인의 특수성에 대한 착목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편적 이상을 위해 희생된 개별적 영역은 소설이 지향하는 희망이 실체적 모색을 불러오지 못하고 인식의 범주로만 매몰되어 있음을 반증한다. 같은 해 발표된 「그해 겨울로 날아간 종이비행기」와 「멀고먼 해후」를 보면 어쩌면 작가는 희망의 좌절에 천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해 겨울로 날아간 종이비행기」에서 남영동 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 정신이상이 된 인하는 곧 태어날 아들을 위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의사를 통해 그의 아내에게 전해준다. 「멀고먼 해후」에서는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하라고 순범이에게 사주하다 좌절하여 오히려 준호가 약을 먹고 자살을 한다. 인하와 준호는 현재의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1980년대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희생된 인물들로 탈주의 가능성이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귀환은 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희망을 통해서만 가능하지만 일상의 연속성마저 상실한 비극의 일부로 연소되어 버린다.

 

우리는 터널의 저쪽으로 갈 수 있을까. 종이비행기는 인하의 아들의 꿈속으로 날아갈 수 있을까. 박용태의 탈출이 구름을 찢고 별로 떠오를 수 있을까. 김영현이 1989년에 되돌아 본 1980년대는 그 희망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지는 못한다. 5·18과 삼청교육대로 시작된 1980년대가 1987년의 민주화 운동으로 희망의 단초를 맛보았다할지라도 1989년의 작가는 여전한 터널 속에서 그 출구를 모색해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어둠 너머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전한 겨울의 절망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는 겨울숲 역시 숨을 쉬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151쪽)

 

따로 떨어진 세계를 담아내는 법 - 신경숙, 『외딴방』(문학동네, 1999)

동남전기주식회사 여공,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 학생.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혹은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의 화자가 주저하면서도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신경숙의 『외딴방』은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소설을 연재하면서 소설 내적 서사로 침입하는 외부를 끌어안으며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은 소설이 담아내야 할 세계를 확정할 수 없는, 일종의 지연의 서사로 작용하는 소설쓰기에 대한 소설로 다가온다.

 

작가에게 소설쓰기란 무엇인가. 작가는 그것이 “나,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17쪽)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가 소외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글쓰기를 통해 단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그 과정을 “아픈 시간 속을 현재형으로 역류해 흘러들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뱃구레에 찔린 상처를 간직하고서도 어떻게든 다시 목숨을 걸고 폭포를 거슬러 처음으로 돌아”(38쪽)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일, 그것이 글쓰기, 곧 소설쓰기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끊임없이 말하고자 하면서도 주저한다. 예기치 않은 존재들이 소설 속으로 틈입하며 서사를 흔든다. 또한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제시되는 “희재 언니”는 곳곳에 존재하면서 부유하는 인물로 소설의 전개를 가로막는다. 작가는 그것을 고스란히 소설로 풀어낸다. 일종의 반짇고리처럼. 반짇고리에 들어 있는 다양한 것들을 이용하여 한 편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바느질 같은 구성이 『외딴방』의 플롯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골과 서울, 동남전기주식회사와 영등포여고에서의 공간적 대비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풍속화처럼 그려내면서도 그 시공간을 살고 있는 화자의 내면에 주목하게 한다. “풍속화 속의 고독한 날들”(492쪽)의 이야기는 침묵으로 묵살시킨 자신의 소녀 시절을 힘겹게 복원시키고 있는 것이다.

 

“너는 우리들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네게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니?”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47쪽)라고 말을 걸어오는 존재들은 과거의 한때, 동남전기주식회사와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을 다닐 때 화자의 곁에 있던 이들이다. 너와 나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어. 이 말은 화자를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던 화자는 그를 소환하는 부름에 응답하여 그 시절의 ‘외딴방’의 문을 연다. “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인 그 방은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게 보”이는 곳이지만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들게 하는 소외된 곳이다. 그곳에서 “유신 말기 산업역군의 풍속화”(51쪽)의 존재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역사화 되지 못한 희미한 사회적 존재로 가려져 있거나 잊혀져 있다. 화자는 자신을 호명한 존재들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그 시절의 존재들을 풍속화로 그려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현실과 소설이 서로 맞물리는 형식은 이런 화자의 역할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제의 역전이 발생한다. 과거로부터 호명된 화자는 현재를 있게 한 과거로 되돌아간다. 과거를 현재로 복원하는 것, 그럼으로써 현재 화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이 소설의 지향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과거는 현재를 규정한다. 즉 지나간 시간으로 존재하지 않는, 언제나 현재로 틈입하는 시간인 셈이다.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 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46쪽) 쓸 수밖에 없도록 한다. 소설쓰기는 실상 과거를 기록하는 일이다. 인물은 언제나 현재완료형으로 시간을 산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소설의 현재는 언제나 완료된 과거이다. 그러나 그 현재를 좌우하는 더 먼 과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까지 확장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쓸 수밖에 없는 글, 과거를 복원해야만 그 시절과 현재의 심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글은 그렇게 시제의 역전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과거를 드러낸다.

 

복원된 기록은 그렇다면 순전한 픽션일까. 화자는 이 소설이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11, 74, 511쪽)을 한다. 소설의 지향점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이야기하는 데 있는 이유는 ‘삶의 문제’가 “옳은 것과 희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과 불행에”(75쪽) 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혹은 회피하고 싶은 진실과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 소설쓰기의 본질이며 그것을 지연시키는 것만이 작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일지 모른다. 『외딴방』의 화자는 그 4년의 시간과 화해를 시도한다. 그것이 ‘납땜’에 그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위한 정리를 하려고 한다. “정리와 정의 그 뒤쪽에서 흐르고 있”는 것이 문학이지만 정리와 정의를 “헝클어서 새로이 흐르게 하”(82)는 것도 문학일 것이다. 사실도 픽션도 아닌 방식으로 소설쓰기는 진실을 찾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자기 투쟁의 결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기록으로써의 소설쓰기가 결국 “삶의 자취를 따라갈 뿐”이어서 “삶을 앞서나갈 수도, 아니 삶과 나란히 걸어갈 수조차 없”는 한계를 가졌다고 체념한다. 그저 한발 비껴 남으로써 삶의 흔적을 되돌릴 수밖에 없는 소설쓰기는 “체념의 자리를 메워주던 장식과 연출과 과장”(291쪽)으로 점철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냥 본 대로 쓰”는 일은 어쩌면 정리와 정의의 방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장식과 연출과 과장은 단순히 체념의 자리를 메워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한 수사학적 기교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것은 체념의 이면, 체념을 할 수밖에 없는 지점의 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나게 한다. “문학 바깥에 머무르라”(235쪽)고 희재 언니가 이야기한다. 써야만 하는 존재, 진실을 밝혀야만 하는 존재는 상상적인 목소리로 소설 속으로, 화자의 인식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럼에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비껴 서려고 하는 일이 장식과 연출과 과장으로 쓰여진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의미를 지닌다도 볼 수 있다. 소설쓰기를 지연시키기 위해 J에게 전화를 거는 일 역시 진실과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화자의 전략적 글쓰기이며 『외딴방』의 서사 전략이기도 하다.

 

이제 회피하고 지연된 내용적 측면인 희재 언니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 외면하고자 하는 진실, 1994년의 화자가 회피하고자 하고 글쓰기를 망설이게 하는 기제인 희재 언니는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구로공단 시절의 화자이며 ‘외딴방’ 그 자체이다. 그녀의 죽음은 그 시절과의 절연을 의미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죽음은 그 시절을 끊임없이 상기해야만 하는 그리고 현재를 과거의 현재형으로 만드는 구멍이다. 그 구멍 속에서 그녀는 죄의식으로 화자에게 자리매김한다. 윤순임의 돈을 훔쳤을 때 화자가 느꼈던 죄책감, 또는 연대 파업에 동참하지 않고 컨베이어 앞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과 동일하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에도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건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보잘 것 없어지고 스스로를 부정하게끔 만드는 죄의식. 그것은 비껴 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심연과 같다. 자신의 온 존재를 부정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며 타인과의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순임은 화자를 끌어안았으며 미스 리 역시 화자를 이해했다. 그렇다면 희재 언니는 화자를 이해할 것인가. 희재 언니는 자신의 죽음을 화자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자물쇠를 잠금으로써 외딴방을 일종의 무덤으로 쓰려고 했을까. 어느 쪽이든 희재 언니가 화자의 죄의식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화자는 이후를 죄의식 속에 살게 된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삶, 스스로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인지도 모른다. 희재 언니의 죽음은 신파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그것 역시 구로공단 외딴방에서 벌어진 사건이며 그것은 그녀 개인적 사건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금 확장하면 그것은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 착종된 형태일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희재 언니는 죽음으로써 그 시기의 삶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화자에게 (또는 그 시대를 공유한 존재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 가서 살아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게 된다. 그것은 핏줄처럼, ‘한국인’이라는 인장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외딴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그것은 벗어나야 할 부정태인가. 외딴방은 우물과 같은 것이어서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화자는 발바닥을 찍은 쇠스랑을 우물 밑으로 던져 버렸다. “생은 독한 상처로 이루어지는”(24쪽) 것임을 어렴풋이 깨달은 열여섯 이후 그 독함을 의지하며 살아간 그 시간을 머금고 있는 우물처럼 외딴방은 4년의 시간을 담은 채 고스란히 지속될 것이다. 열쇠를 채우기 전에 문을 한번 열어봤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화자의 몸에 “흘러들어오고 있는” “냄새의 실체”는 우물 깊은 곳에 떠오른 ‘말간 그녀의 얼굴’이다. 그것은 “말씀처럼 떠 있다.” 독한 상처를 만드는 쇠스랑을 그녀가 가져가고 화자는 우물을 바라보며 남아 있다. 외딴방에서의 시간은 고립된 시간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열고 살아 있는 사람들”(487쪽)과 만난 시간이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 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일, 그럼으로써 “그 사람들의 진실이” 변화시킬 화자야말로 ‘지난 이야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것과 마주하는 과정이 너무나 오래 걸렸다. 따로 떨어진 세계에서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하다. 글쓰기란, 소설쓰기란 바로 과거의 자신과 대면하는 일이며 따로 떨어진 세계를 담아내는 일인 것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 공지영, 「무거운 가방」(『인간에 대한 예의』, 창비, 1994)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듯 협착한 삶을 짊어진 사람들. 좁디좁은 생활 때문에 이상을 접고 현실에 타협한 사람들. 어쩌면 돌아가기 위해 이상과 타협한 사람들. 한발 물러난 사람들. 공지영의 단편 「무거운 가방」 속 남자들은 한때의 이상에서 멀어진 채 현실을 살면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존재들로 형상화된다. 초점화자인 그는 몇 번의 실패 끝에 고시를 패스하여 곧 연수원에 들어갈 예정이다. 자신을 뒷바라지했던 아내의 성화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성공을, 생활을 안정시켜주는 기저임을 알고 있지만 벗어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친구들과 스키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거운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는 그녀를 만나 그녀의 고향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간다.

 

그와 K, N은 대학 친구들로 지금은 각자의 ‘모퉁이’를 돌아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K는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 성공을 했고 N은 노동운동을 하다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삶을 살지만 “산다는 건 다 같은 거야”(128쪽) 라는 K의 말처럼 그들이 바꾸려 했던 기존의 사회 안에 안착하며 산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변혁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의 내부에 남아 있지만 그것이 외부로 분출되지는 못한다. 그저 “갑자기 공장의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무자비한 자동차소리가 달려드는”(123쪽) 것처럼 갑작스러운 침입으로 존재의 불안을 느낄 뿐이다. 이러한 불안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스키장에 가는 길에서 만난 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미장원을 계약하고 미용기술을 익힌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그녀들의 쟁투는 그들의 투쟁만큼이나 치열하다. 아니, 더 고되고 더 폭력적인 과정을 경험한다. 대학생에게 돈을 뜯기고 봉제공장 사장 부인에게 3년 월급을 빼앗긴다. 최하층 계급의 존재는 정주할 공간을 상실한 채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공지영이 그려내는 노동자 계급의 여성은 그러나 나약하지 않다. 등단작 「동트는 새벽」의 순영이가 그랬듯 「무거운 가방」의 순임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지식인 계급, 흔히 운동권이라고 지칭하는 그들과 같은 존재들이 호명하기 이전부터 그녀들은 존재해 왔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란 관념은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모퉁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저쪽의 나쁜 상황을 상상하며 두려워하는 것처럼 상상이 만들어낸 동정의 대상으로써 그녀들을 맥락화한다. 그런 점에서 공지영의 여성들, 특히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은 그 누구 못지않게 삶에 대한 애정과 변화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지닌 채 능동적으로 현재를 살아간다. 그녀들에 대한 관심과 동정이 오히려 그녀들을 타자로 만들고 배제하게 된다. 서발턴의 재현 불가능성은 이러한 배제의 순환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지영은 「동트는 새벽」에서 달리 「무거운 가방」에서는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퉁이를 돌아 그녀들을 외면하는 그들의 시선을 포착한다. 그녀들을 “가슴속에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깃발”(166쪽)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 깃발을 한번 휘두르고 ‘무책임한 세상’에 안정적으로 안착하여 그 부조리한 구조를 재생산하는 존재의 모순을 지적한다. 또한 그 시선은 N의 노동 현장이었던 곳에서 한 노동자가 지적했듯이 “언제든 돌아가 타협할 곳”(159쪽)을 지닌 존재가 감각하는 부끄러움의 윤리이다. 그들이 그녀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들이 이미 돌아간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공동체로서 “책임질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156쪽)에 대한 기만이 결국 그들이 추구했던 과거의 가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달리 순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이 단편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존재가 된다. 익명으로 존재하는 세상에서 분명한 이름을 가진 능동적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자기 존재의 긍정을 위한 수순이며 동시에 인간으로서 이름과 얼굴을 가진 존재로 차이의 층위를 정립하는 행위이다. 자기에게 부여된 ‘무거운 가방’을 감당하는 순임이야말로 1980년대를 지나온 운동권의 저 피할 수 없는 실재가 되어 그들의 현재 삶에 포착되지 않은 불안을 가시화한다.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것이 반성적 사유를 상실한 계몽적 이념의 맹목이었다는 것을 1990년대의 공지영은 성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난 시대의 행위를 전부 부정하는 것으로 소설의 의미가 돌출되지는 않는다. 다원적인 것에 대한 긍정이라는 90년대의 가치는 80년대의 투쟁이 사람들의 삶의 지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현실과 타협한 그들의 삶이 협착한 생활 속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오랫동안 벌판을 헤치고 온 자의 피곤한 냄새”(149쪽)는 노동자와 운동가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 공동체의 가치가 90년대에 들어 전부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90년대를 다원적인 세상에서 개별적 존재들의 연대 없는 공동체가 형성된 시대였다는 것을 안다. 다양성에 대한 긍정은 결국 주체/타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깨뜨리는 것이며 계급의 층위로 구별되는 관계를 전복시키는 힘이 된다. 그것은 9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연대를 소망하는 방식으로 형상화되었다.

 

그 뒤로 30여년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아직 터널의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투쟁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끝을 향한 노정이 지속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그 곁에 조금 더 밀착해야 할 것이다.

 

사진출처 :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

 

글·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