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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 선언은 합법이다
‘디폴트’ 선언은 합법이다
  • 다미앵 미예, 에리크 투생
  • 승인 2011.07.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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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들은 ‘카이로스’라는 개념을 통해 결정적 운명의 시간을 정의했다. 상반된 모든 것이 한곳으로 집중되며 이후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다. 통화 및 금융 위기의 소용돌이가 유럽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휩쓸고 간 뒤 운명의 순간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이르기까지 군중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있으며, 광장을 메운 시위대는 금융권의 행패와 부당한 채무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자유주의 세력들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권을 끌어들여 긴축정책의 길에 더욱 깊이 뛰어들고 있다. 저들이 꿈꾸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지름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 주로 ‘북반구’에 위치한 제1세계는 경제적 번영이 이루어진 권역을 의미했다. 소비에트연방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 블록은 제2세계에 해당했다. 그리고 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가난한 나라들을 묶어 부르는 표현이 바로 제3세계인데, 이는 1980년대부터 국제통화기금(IMF)의 족쇄에 발이 묶인 지역이다. 제2세계는 1990년대 초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와해됐고, 제1세계는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크게 흔들렸다. 따라서 이제는 그 어떤 지리적 구분도 적절치 않은 듯하다. 이제는 전세계 인구를 두 가지 부류로밖에 나누지 못한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로 이익을 보고 있는 극소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다. 특히 후자는 현재의 채무 구조로 시련을 겪고 있다. <<원문 보기>>

지난 30년간, 전세계에서 경제가 취약한 지역은 남미와 아시아, 그리고 이른바 ‘과도기국가’로 일컬은 옛 소비에트연방 소속 국가들이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부터는 유럽연합도 의심을 사게 되었다. 남미 국가들의 평균적 외채 수준은 2009년 말 국내총생산(GDP)의 23%에 도달했는데, 독일은 155%, 스페인은 187%, 그리스는 191%, 프랑스는 205%, 포르투갈은 245%, 그리고 아일랜드는 무려 1137%였다.(1) 미증유의 상황이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두 부류의 인간

화폐 발행이라는 수단까지 동원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부터 유동성을 끌어올 수 있는 미국과 달리, 유로존 국가들에는 그런 장치가 없다. 유럽중앙은행이 정부의 직접적 재정 지원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7~2009년 유로존 국가들은 총 1조2천억 유로가량을 여러 가지 저당과 담보 명목으로 잡히면서 ‘은행을 구하기 위해’ 나섰고, 여러 기관 투자자들의 자금 수혈에 의존했다. 주로 연금기금, 보험회사, 그리고 민간은행 등을 이용한 것이다.

위기에 따른 예기치 못한 결과 중 하나는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은행들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빌려온 자금으로 2007~2009년 그리스와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여러 국가에서 (위험노출액인) 익스포저를 늘리고 상당한 이익을 챙겼다는 점이다. 서브프라임 위기가 시작된 2007년 6월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2008년 9월 사이, 서유럽 민간은행이 그리스에 빌려준 차관 규모는 1200억 유로에서 1600억 유로로 33% 늘어났다.

2010년 봄, 유로존이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유럽중앙은행은 민간은행에 1% 우대금리로 대출을 해주었다. 반면 이들 민간은행은 그리스 같은 나라에 훨씬 더 높은 이자를 요구했다. 3개월 미만의 대출은 4~5%, 10년 상환인 경우 약 12%의 대출금리를 요구한 것이다. 왜 이런 요구를 한 것일까? 이들 국가의 채권에 ‘디폴트(채무불이행) 리스크’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금리가 상당폭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도출된다. 이미 지난 5월, 10년 상환 금리는 16.5%를 넘어섰다. 게다가 국채 거래를 ‘원활히’ 해주면서, 유럽중앙은행은 이들 민간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사들여 이들이 보유한 채권을 보장해주었다. 원칙적으로는 직접적 대출을 금지하고 있었으면서도.

투기꾼들, 납세자 돈으로 고리채

이런 임시변통을 고집스레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일단 은행이 ‘디폴트 리스크’를 고려하여 이자를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지급유예, 나아가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채무를 거부하는 방식을 고려해보는 게 일관성 있지 않을까?(2) 대개 이런 의견이 나오면, 프랑스은행 총재 크리스티앙 노이예가 ‘공포 시나리오’(3)라고 지적하듯이, 그로 인해 혼돈 상황이 야기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대두된다. 하지만 국민의 처지에서 봤을 때 정말로 ‘공포스러운’ 시나리오는 예고된 긴축정책을 시행하는 것 아닐까?

▲ <바위>, 2007- 쥘 드 발랭쿠르
제3세계적 감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정치학자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989년 “어느 정부도 국제기구로부터 요구받는 사회서비스 부문 예산에 대한 압박과 장기화된 긴축 정책을 감당해낼 수 없다”(4)며 남미 국가들에 요구된 구조조정 계획에 관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더욱이 기존 차관 금액이 부분적으로 신규 차관으로 메워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상환하더라도 차관 금액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2009년, 개도국 정부는 1970년에 빚진 금액의 98배를 상환했다. 그동안 이들의 빚은 32배나 늘어났다.

무서운 건 디폴트 아닌 긴축재정

유럽 정부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수단을 거부한 채 바로 이런 길로 자국민을 끌어들이고 있다. 선진국이든 개도국이든 한 가지 대안은 제시된 상태다. 지난 10년간 일부 국가는 지급 유예 및 부채의 일부 탕감이라는 길을 선택했다. 2001년의 아르헨티나도 그런 경우인데, 3년간의 상환 중단 덕분에 민간 채권자를 대상으로 2005년 부채의 절반 이상을 줄일 수 있었다. 좀더 최근의 예로는 에콰도르가 있다. 그럼에도 혼돈 상황은 초래되지 않았다. 1997년에서 2000년까지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를 지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론을 통해 보나 실제로 확인된 것으로 보나 대출 통로의 폐쇄 위협은 과장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5) 2003~2010년 아르헨티나는 연평균 8% 이상 성장률을 기록했다. 따라서 지급유예가 곧 부채의 카산드라들이 호언장담했던 대재앙으로 이어지리라는 법도 없다. 더욱이 이런 방식은 타당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던가?

상환 중단해도 혼란은 없다

차관 계약을 맺으려면, 정부는 자유롭게 이에 대한 동의 표시를 해야 하고, 이런 동의에 의해 차관 빚을 상환해야 할 의무가 생겨난다. 하지만 이 원칙이 절대적인 건 아니다. 국제법에서 정한 합법적 범위가 더 상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유엔 헌장 제103조에서도 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동 헌장에 의거한 유엔 회원국의 의무사항과 그 밖의 모든 국제 협정에 따른 이들의 의무사항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때는 전자의 의무사항이 우선한다.” 이 전자의 의무사항을 명시한 내용 중 유엔 헌장 제55조에서 우리는 “생활수준 향상, 완전 고용, 사회 및 경제 차원에서의 진보 및 발전 조건” 등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유럽집행위원회와 유럽중앙은행, IMF 등이 곤경에 빠진 국가들에게 (이들이 채권자들에게 부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지원 계획’은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것일까? 2009년, 라트비아는 공공 지출을 GDP의 15% 수준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무원 급여도 20% 삭감해야 했고, 연금 지급액도 10% 줄여야 했다. 몇 달 뒤 이런 조처는 위헌 결정을 받았다. 학교와 병원을 폐쇄하라는 결정은(6) 1980년에 공포된 유엔 국제법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위반했다. “가령 정부는 단순히 해외 채권자에 대한 의무 이행에 필요한 자금을 갖추겠다는 목적으로 학교와 대학, 법원을 폐쇄해서는 안 되며, 경찰을 없애서도 안 되고, 자국민이 무질서와 무정부 상태에 노출될 정도로 공공서비스를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7)

국제법·조약상 디폴트는 정당

조약법에 관한 1969년 빈협약(8)을 보강한 1986년 비엔나협약은 차관 계약을 무효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부도덕한 형태들을 규정하고 있다. 가령 ‘사기’에 관한 내용을 다룬 제49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협상 상대인 정부나 조직의 사기성 행위로 조약을 체결한 정부 또는 국제기구는 조약의 합의 내용에 대해 사기 혐의를 주장해 무효화할 수 있다.” 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IMF의 행동은 기만적인 사기성 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IMF의 정관 제1조에서 정한 조직의 목적은 “국제무역의 조화로운 성장 및 확대를 용이하게 하고, 이로써 고용·실질소득의 향상 및 높은 수준 유지에 기여하며 경제정책을 1차 목표로 한 모든 회원국의 생산자원 개발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구가 요구하는 조처들은 실제로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실업이 증가하고 소득은 추락하며 민영화가 늘어나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투기꾼들, 유럽집행위원회, IMF의 집중 공격을 받는 처지가 된 한 국가에 대해 ‘자유로운 동의’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이처럼 지급유예를 정당화하고, 부당하다 여겨지는 부채의 무조건적 파기를 합법화하는 논거는 얼마든지 있다.(9) 몇 달 전부터 이런 선택은 하나의 명백한 진리로 자리잡아가는 듯 보인다. 여기에는 투기꾼들도 포함된다. 모건스탠리와 제이피모건 투자은행에 따르면, 시장에서는 그리스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두 달 전 50%였던 것에 반해) 70%로 보고 있다고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이런 현상은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라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채무 변제 일정이 조정되거나 채권 가치가 하락할 것을 우려한 프랑스 은행들은 2010년 그리스 국채에 대한 익스포저를 190억 유로에서 100억 유로로 낮췄다. 독일 은행들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다. 2010년 5월~2011년 2월 독일 은행들의 익스포저는 160억 유료에서 100억 유로로 내려갔다. IMF, 유럽중앙은행 같은 공공기관과 유럽 정부는 은밀히 이들 은행 및 민간 투자자를 대신해 리스크를 짊어졌다. 유럽중앙은행은 그리스 국채의 20%에 해당하는 660억 유로를 부담하고 있고, IMF 및 유럽 정부들은 지금까지 333억 유로를 대출해주었다.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는 구조조정이 있을 경우, 민간 투자자들보다는 납세자가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뜻 아니겠는가?”(10)라고 <뉴욕타임스>는 현 상황을 정리한다. 우리는 진정 이런 길을 원하는 것인가?

글·다미앵 미예 Damien Millet, 에리크 투생 Eric Toussaint
두 사람의 주요 공저로 <신용불량국가>(2006·창비), <빚 혹은 삶> (La Dette ou la Vie·Aden-CADTM·2011) 등이 있다. 이 글은 근간 공저인 <빚 혹은 삶>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의 역서가 있다.

<각주>
(1) 개도국에서 외부 공공부채의 상대적 비중은 전반적으로 안정화된 수준이나, 내부 공공부채의 비중은 상당히 늘어났다. 르노 랑베르, ‘과거의 부채와 현재의 부채, 그 달라진 양상’ (Dette d‘hier et dette d’aujourd‘hui), <마니에르 드부아>, 2010년 10~11월 참조.
(2) 로랑 코르도니에, ‘국가, 빚 갚기를 포기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3월호 참조.
(3) 잉그리드 멜란더, 폴 테일러, ‘그리스 부채의 채무 조정 가능성 경계’ (Mises en garde sur un possible reprofilage de la dette grecque), <로이터>, 2011년 5월 24일.
(4) 미겔 앙헬 에스페체 힐, <La doctrina Espeche. Ilicitud del alza unilateral de los intereses de la deuda externa>, Instituto hispano-luso-americano de derecho internacional, 15차 총회, 산토 도밍고(도미니카공화국)에서 1989년 4월 23일~29일 개최.
(5) 배리 허만, 호세 안토니오 오캄포, 샤리 슈피겔 공저, <Overcoming Developing Country Debt Crises> 중 ‘Sovereign debt : Notes on theoretical frameworks and policy analyses’,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6) 필리프 레카체비치, 이에바 루체부스카, ‘학교까지 문 닫는 라트비아의 경제위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12월호.
(7) 유엔 국제법위원회 연감, p.148, 1980.
(8) 1969년 협약은 1980년에 시행되었으며, 1986년 협약은 현재 비준 중이다.
(9) <빚 혹은 삶>(La Dette ou la Vie·Aden-CADTM·2011), 제20장 및 제21장 참조.
(10) 랜던 토머스 주니어, ‘In Greece, some see a new Lehman’, <뉴욕타임스>, 2011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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