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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전후 일본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구성 과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이혜진의 문화톡톡] 전후 일본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구성 과정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07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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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시절의 리샹란(출처: 자주시보)
만주국 시절의 리샹란(출처: 자주시보)

<야래향>의 가수 리샹란

중국의 국민가요로 한국에도 제법 잘 알려진 곡 <예라이샹(夜來香)>은 1978년 타이완 출신의 가수 덩리쥔(邓丽君)이 부르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이 곡이 탄생한 것은 훨씬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4년 중국 본토의 리진광(藜錦光)이 작사‧작곡한 이 곡은 당시 중국의 7대 가성(七大歌星) 중의 한 명이었던 리샹란(李香蘭, 1920-2014)이 처음 불러서 인기를 모았던 바 있었다. 당시 리샹란은 중국에서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약하면서 요즘 아이돌에 비견될만한 혹독한 공연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그녀는 제국 일본의 국책회사였던 ‘만주영화협회(滿映)’의 전속 배우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탓에 중국과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대동아공영의 아이돌’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를 활동 근거지로 두고 ‘만영의 전설적인 간판스타’로 불렸던 리샹란은 일본의 국책영화에서 일본 남성을 사랑하는 중국 여성 역할을 도맡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리샹란이 일본 사가현 출신의 부모를 둔 일본인이었음에도 만주 출신의 중국인으로 행세했고 또 대중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컨대 리샹란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라는 일본식 본명을 갖고 있었지만, 만주에서 나고 자란 탓에 뛰어난 중국어 실력을 겸비하여 만주국 이데올로기인 ‘민족협화(民族協和)’의 이미지를 구축해가면서 중국인 영화배우 겸 가수로 대성공을 거두고 동아시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다. 당대 리샹란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1941년 2월 11일 리샹란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관중이 일본 도쿄의 제국극장 건물을 7바퀴 반을 둘러쌌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일본에서 2월 11일은 초대 천황 진무(神武)의 즉위식을 기리는 건국기념일이었지만, 리샹란의 쇼를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에게 건국기념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날의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해 일본의 언론들은 일제히 <일본극장 일곱 바퀴 반 사건>, <경축일을 더럽히다>, <관객들의 광태>라는 헤드라인으로 건국기념일이 갖는 국가적 가치가 한 여가수의 인기에 영합한 대중에 의해 훼손되어 버렸음을 비난했다.

 

1950년의 야마구치 요시코(출처:wikiwand)
1950년의 야마구치 요시코(출처:wikiwand)

야마구치 요시코와 리샹란=리코란=이홍란=이향란=셜리 야마구치

세간에 만주 태생의 중국인으로 알려져 있었던 리샹란은 일본에서 ‘리코란’이라는 일본식 한자 이름으로 불렸다. 또 조선에서는 ‘이향란’으로, 타이완에서는 ‘이홍란’으로 불리면서 만주의 건국이념인 ‘오족협화’의 표상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면서 ‘대동아의 아이돌’로 군림했던 리샹란이 이 무렵에 들어와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마침내 언론에서 그 사실을 충격적인 사건으로 폭로한 뒤에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그녀의 인기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리샹란의 팬들은 떠도는 소문에 연연하지 말고 용기를 내여 주어진 길을 걸어가 달라는 팬레터를 쓰기도 했고 또 중국인들은 리샹란을 통해 용기를 얻고 있는 중국 대중을 위해 중국인으로 남아 있어주기를 원했으며, 심지어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틀림없는 조선 여자’임을 확신하는 부류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일본 민족, 만주족, 조선인, 한족, 몽골족의 협치로 구성된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실현하는 존재로 창조된 리샹란은 일찍이 범아시아적 여성을 표상해왔지만, 그랬던 그녀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여전히 동아시아 대중에게 변함 없는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민족 간의 경계와 배제 혹은 차이가 갖고 있는 간극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문화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케 해준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군은 무장을 해제당하면서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민간인들은 홍코우(虹口)의 일본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일본의 패전이 중국인과 일본인의 지위를 역전시킨 것이다. 중국에서 리샹란은 친일반역자라는 뜻의 ‘한간(漢奸)’으로 지목되었고, 일본의 대륙정책에 협력하고 중국을 모독한 ‘3대 여성 매국노’로 분류되어 곧이어 총살당할 것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리샹란의 부모는 그동안 리샹란이 중국을 사랑해왔고 또 ‘중일친선’을 위해 노력해온 노고를 강조하면서 매국노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애를 써보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리샹란을 사형에 처하라는 투서들을 중국군 보도부에 보내기도 했다.

1946년 2월 리샹란은 상하이 군사재판소 법정에 소환되었지만, ‘한간’ 혐의는 어디까지나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리샹란은 서둘러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호적등본을 중국군에 제출하고 재판에서 풀려난 리샹란은 1946년 3월 상하이 항구에서 출항하는 인양선 운젠마루(雲仙丸)를 타고 일본 큐슈에 상륙했을 때 ‘리샹란’의 이름을 ‘야마구치 요시코’로 바꾸어 귀국자 명단에 올렸다.

 

미국 영화 -동경암흑가 대나무집-에 출현한 셜리 야마구치(출처: 일요신문)
미국 영화 -동경암흑가 대나무집-에 출현한 셜리 야마구치(출처: 일요신문)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셜리 야마구치=오타카 요시코

패전 이후 리샹란은 필연적으로 야마구치 요시코로 회귀해야만 했다. 제국 일본이 피폭과 무조건 항복이라는 뼈아픈 의식을 통해 그들의 침략전쟁과 결별해야 했던 것처럼, 야마구치 요시코 역시 과거 ‘대동아의 은막 스타’였던 리샹란과 통절한 결별의식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전전(戰前)의 리샹란이 전후의 야마구치 요시코로 회귀해간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리샹란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본명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브랜드 네임을 소비해보고자 했지만 ‘리샹란’으로 각인된 대중적 이미지가 쉽게 극복될 리 만무했다. 일본의 대중은 야마구치 요시코가 리샹란으로 둔갑하여 제국주의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냉대했다. 전전 동아시아 최고 스타 리샹란의 팬을 자처했던 수많은 일본 대중은 단번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중의 비난을 피해 그녀는 미국 할리우드로 가서 재기를 꿈꿨지만 당시 미국 사회에 몰아친 매카시즘 열풍은 그녀를 공산주의자와 연결 지어 심판대에 올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야마구치가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 <동경암흑가‧대나무집>이 일본에 개봉되었을 때, 일본의 영화평론가들은 일제히 이 작품을 ‘국욕영화’라고 비난했다. 과거 중국인 여성과 일본인 남성의 로맨스 구도를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로 활용했던 일본이 전후에 와서는 일본인 여성과 미국인 남성의 로맨스 구도를 국가적 굴욕으로 느낀 것이다. “일본은 강한 남성이고 중국은 순종적인 여성으로서, 중국이 일본을 의지한다면 이처럼 일본은 중국을 지켜줄 것이다”라는 은밀한 메시지가 제국 일본에서는 당연했던 것이 패전 이후에는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이 사례는 일본 제국주의의 프로파간다가 결과적으로 텅 빈 기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뿐만 아니라 국적 혹은 내셔널 아이덴티티란 상황과 입장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기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이후 야마구치는 자신이 대 아시아 침략전쟁에 복무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한 이후 스스로 연예계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1970년대에 들어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일본 적군파’ 문제와 함께 팔레스타인 인민전선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문제 등 국제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취재하는 리포트로서 서서히 방송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일본 사회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있었던 고통의 기억이 일종의 회한의 감정으로 변화하고 자신들의 입지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전 세계를 누비며 전후 평화주의를 실천해가는 야마구치 요시코의 행동도 조금씩 수용되어갔다. 제국 일본 최고의 프로파간다였던 그녀가 처음으로 일본 사회에 정착하게 된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일본의 전몰자추모기념식(출처: 메일경제)
일본의 전몰자추모기념식(출처: 메일경제)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대중 감성

남편의 성을 따라 ‘오타카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자민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야마구치는 2차 대전으로 피해를 당한 아시아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또한 장기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중일국교가 정상화되자 그녀는 스스로 일본은 ‘조국’, 중국은 ‘모국’이라고 규정했다. 1993년 정계를 은퇴한 오타카 요시코는 심포지엄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을 개최하면서 과거 구식민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국가와 시대와 지역의 맥락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호명되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리샹란은 최종적으로 특정 국민국가에 귀속될 수 없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전전 ‘리샹란’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가졌던 이 여성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일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대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전후에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일본인 회귀한 이 여성은 전시 하에 구축된 ‘리샹란’이라는 환영과 정면대결 해야만 했다. 민족적 정체성을 둘러싼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해 훗날 야마구치 요시코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술회했다. “리사이틀, 뮤지컬, 무대 연극. 그 무엇을 해도 내게 납득할 수 없는 결과가 돌아왔다. 나는 야마구치 요시코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여전히 리샹란이었다. 전전의 스크린에서 본 얼굴, 목소리, 동작만을 보려했다.”

전후 일본 국민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던 전전의 여배우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가 1970년대에 이르러 자민당 참의원으로 당선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본 귀속이 승인될 수 있었던 원인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평화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전후 일본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녀가 체현해주고 있다는 실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패전 후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가 자신의 국적을 속여 가면서까지 프로파간다를 수행했던 과오에 대한 고백에 대해 일본 대중이 공감을 했던 데는 전후 일본 사회에 형성된 ‘회한 공동체’의 감성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를 포함한 회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저 처절한 삶과 사연의 무게에 대한 상호이해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회한은 ‘리샹란=야마구치’에게서 목도되는 전후 평화주의 운동을 통해 위안을 받고 또 그것에 공감을 표하면서 훗날 그녀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것이 일본 대중이 갖고 있었던 참회의 과정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믿음으로 고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패전의 상처와 절망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국민적 공동의 감성이 새롭게 재건해가야 할 국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전후 감성은 리샹란의 재신화화라는 역설을 낳았다.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또 다른 변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후 일본에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이념에 의거하여 노동운동, 교육운동, 여성운동에 이르는 사회운동들이 폭넓게 전개되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보편적 인권이나 시민권 개념에서 볼 수 있는 혁신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모종의 불합리한 점이 있다. 야마구치의 참회가 전후 일본인들에게 정서적 연민과 회한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전쟁과 패전이라는 공동의 체험이 반영된 ‘전후 가치’를 옹호한 데서 도출된 결과였기 때문이다. 나카노 도시오가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와 민주주의가 편의주의적인 망각과 자기정당화를 포함하고 있음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지적해야 할 것은 전시하의 리샹란이 야마구치 요시코로 회귀하는 과정이 매우 험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일본 국민으로 승인받게 된 과정에는 대중적 감수성과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공모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체제를 경유하면서 국가 권력이 민족 서사를 창조함으로써 국민의 기억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수많은 사례를 목도해왔거니와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풍부한 우리의 미래를 창조해가기 위해서는 정당하다고 간주되어왔던 모든 것을 회의함으로써 용서와 관용, 화해와 평화의 움직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의 사례는 매우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제국의 아이돌>의 리샹란 부분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참고문헌>

이혜진, 제국의 아이돌, 책과함께, 2020.

 

글·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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