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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I <82년생 김지영>과 <툴리>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를 보며 여자를 생각하다 II <82년생 김지영>과 <툴리>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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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에 지친 여성을 행복하게 하는 게 정치다

육아 우울증에 걸리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후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다 서른한 살에 결혼해서 딸 하나를 낳아 키우고 있는 김지영의 삶을 1982년부터 네 시기로 나누어 ‘도대체 한국 여성 김지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를 묻고 있다.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은 좀 더 극적으로 한 여성의 고통에 집중한다. 그러기 위해서 소설 속에 잠깐 제시되었던 지영(정유미)의 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영화는 “일은 기계가 하는데 전업주부가 왜 아프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공유(대현 역)의 입을 빌려 82년생 김지영이 많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영화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상팔자 전업주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고 인정받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영 본인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도 시간이 걸린다.

 

영화 <툴리>(2018)로 가보자. 말로(샤를리즈 테론)는 신발 하나 제대로 못 찾는 첫째 딸, 남들과 조금 다른 둘째 아들, 갓 태어나서 밤낮없이 울어대는 막내, 그리고 게임을 좋아하는 남편까지, 매일 같이 육아 전쟁에 지쳐간다. 몸이 스무 개라도 모자란 말로를 위해 부유한 그녀의 오빠는 야간 보모 고용을 권유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봐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어 왔던 말로는 쉽게 야간 보모를 부르지 못한다. 사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이유가 큰 걸림돌이다.

 

지영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영화는 무엇이 지영을 그렇게 아프게 했는가를 묻는다. 이후 지영을 둘러싼 환경과 82년에 태어난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종합선물세트처럼 줄줄이 펼쳐낸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들에게만 집착하는 할머니, 명절의 고부갈등, 세상도 전업주부에게 온갖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다행히 영화 속 남편 대현은 배려 깊고 친절한 사람으로 나온다. 명절에 여행을 제안하기도 하고, 시댁 주방에 들어오는 과감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남편의 행동은 아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변화된 태도다. 영화 시작 이전에 지영이 이미 몇 년간 전업주부로서 억눌러왔던 상처가 쌓이고 쌓여 난 병은 단시간의 배려로 치유되긴 힘들다.

 

‘어쩌다 엄마’ 여자가 변한다

지영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병을 앓고 있다. 지영은 남에게 할 말을 잘 못하고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이다. 그것이 쌓여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한 번씩 속에 담아둔 말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는 병에 걸렸다. 영화는 소설보다 더 현명한 전략으로 대중과 만난다. 소설이 그렸던 남녀 구도나 다소 무리하게 제시되었던 에피소드는 없애거나 완화하는 대신, 영화에서 빙의로 보이는 정신질환을 적절히 사용해 문화적 차별이 가져온 폐해를 간간이 드러내며 극적 구조를 감성적으로 풀어나간다.

 

김지영은 먼저 남편 대현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따듯한 시선과 공감으로 일어서야 할 힘을 얻는다. ‘어쩌다 엄마’가 된 김지영은 자신을 둘러싼 문화적 제도적 차별에 대한 상황을 온몸으로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 모든 일을 온몸으로 겪은 후에도 지영은 여전히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치료를 받으러갔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이 참아왔던 것에 대해 마주하고 해결하는 법을 배우며 작은 변화들을 시도한다. 세상과 맞설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엄마로서의 자신과 사회인으로서의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서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몰리도 오랜 고민 끝에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부르기로 한다. 야간 보모 툴리는 홀로 삼 남매 육아를 도맡아 하면서 '진이 다 빠진' 말로에게 “아이만이 아니에요,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라고 말하며, 지친 그녀와 아이들을 함께 돌봐준다. 슈퍼 보모이자 때로는 인생 친구가 되어 주는 툴리로 인해 말로의 삶은 조금씩 변화한다.

 

육아에 지친 여자에겐 조력자가 필요하다

영화 <툴리>는 육아로 고생하고 자신의 삶을 잃은 말로가 점차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습을 그리는데 집중한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쓴 디아블로 코디가 실제로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한 후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러던 중, 당시 미국 대도시의 워킹맘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보모 서비스를 받게 된다. 극 중 툴리와 같은 야간 보모를 고용한 그녀는 “보모가 밤새 아이를 돌봐 주었는데, 그런 그녀가 마치 구세주 같았다”라는 경험담을 밝힌 바 있다.

디아블로 코디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야간 보모 서비스를 통해 아이 출산 이후 잃어버린 자신감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 등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적 소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디아블로는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는 많지만, 산후 우울증을 다룬 영화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툴리>를 통해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엄마의 역할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인생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라며 <툴리>를 만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라이트맨 감독은 작가가 쓴 시나리오를 보면 단지 아이가 태어난 후 보살피면서 부모가 되어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다시 써야만 하는 순간까지 보여 주려 한다.  

라이트맨 감독과 작가는 보다 더 사실적이고 보편적인 스토리를 영화 속에 녹여내기 위해 아이를 갓 출산한 엄마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사에 응답한 엄마들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결혼 생활, 남편과의 관계, 그리고 성생활 문제까지 매우 사적인 얘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몰로가 열심히 모유를 수축하고 모은 모유를 식탁 위에 쏟는 장면, 핸드폰을 아기 얼굴 위로 떨어트리는 장면 등은 엄마들의 대답 중 일부를 극 중 에피소드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제이슨 라이트맨 감독은 설문 조사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밤낮없이 아이를 돌보느라 잠을 설치고, 낮엔 남편과 다른 가족을 챙기느라 자신을 보살필 여유가 없다. 그런데도 보모 서비스라든지, 남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며 어려운 결정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한 건 육아에 지친 그녀들에게는 육아를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정치적이다. 전업주부의 삶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생각하게 하고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언론과 여론에서 (전업주부인) 그들을 무능력하고 이기적이고 사치스러운 존재로 다뤘다. 성실히 사는 여성들이 그렇게 기억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라는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영화는 전업주부에 대한 기존 인식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전업주부 김지영이 짊어진 고단함과 상처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게 하고, 김지영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어주고 보듬어주어 세상이 좀더 살기가 나아지게 하는 정치적 소임을 해내고 있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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