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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제 그만 끝낼까 해>, 그런데 언제 시작한 적은 있었을까?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이제 그만 끝낼까 해>, 그런데 언제 시작한 적은 있었을까?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28 0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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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코프먼의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는 캐나다 작가 이아인 레이드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여주인공(제시 버클리) 루시(이 영화에서 그녀의 이름은 계속 바뀌기 때문에,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의 내레이션과 함께 카메라가 집안의 여기저기와 주변 공간을 돌아다닌다. 여기에 루시의 미묘한 내용의 내레이션이 더해지면, 영화는 지금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루시가 예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것 같다.

 

루시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친구 제이크(제시 플레먼스)의 부모 집을 방문하려고 집을 나서는 참이다. 루시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라고 생각했지만, 제이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의 차를 타고 간다. 차 안에서 루시가 제이크와의 관계를 끝내는 문제를 계속 생각할 때, 영화는 연인 사이의 갈등을 그린 ‘멜로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런데 제이크의 외모가 멜로 영화의 남자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동떨어진 데다 루시가 본 것을 제이크가 보지 못했다고 하거나 루시가 자동차의 빈 뒷좌석을 흘끗 쳐다보는 쇼트 등이 등장하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점점 불길해진다. 게다가 차 안에 계속 머물고 있던 루시의 옷이 조금씩 변하거나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는데도 제이크는 태연하게 스노우 체인이 있어서 괜찮다고 하거나 완전히 외딴 공간에 갑자기 제이크의 집이 나타날 때, 불길한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관객은 이 영화가 주인공이 애인의 부모 집에 방문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는 조던 필의 <겟 아웃>(2017) 같은 공포영화 또는 스릴러 영화로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예상했던 대로 전개된다. 제이크는 그 추운 날씨에 루시를 농장으로 데려가 양의 시체들과 돼지가 죽은 처참한 흔적 등을 보여 주고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간다. 공포영화에 딱 맞는 제이크의 부모가 등장하고, 시간이 뒤죽박죽 된 것처럼 인물들의 나이가 계속 변하고, 루시도 계속 다른 인물로 변하는 등, 기괴한 상황이 계속 연출된다. 마침내 루시는 제이크와 함께 그 집을 떠나(탈출?),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이 영화는 차 안의 장면만 40여 분에 이르기 때문에, 로드 무비도 많이 가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었던 듯, 두 사람은 <비포 선라이즈>(1995)의 주인공들처럼 다양한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눈다(그러므로 이 영화를 충분히 즐기려면, 시간에 관한 물리학과 철학의 관점뿐만 아니라 영화와 문학과 회화 등등에 걸친 풍부한 교양이 필요하다).

제이크가 폭설이 내리는 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고 하자,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아이스크림 가게 털시 타운이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같은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인물들이 등장해 기묘한 상황을 연출한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사고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제이크는 거의 먹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버려야 한다고 우기면서 루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를 찾아간다. 아이스크림을 버린 제이크는 이번에는 차 안을 엿본 남자를 잡아야 한다며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다. 차에 혼자 남은 루시가 불안에 사로잡힐 때, 관객은 살인마가 날뛰는 1980년대 할리우드 슬래셔 무비의 절정 부분에서 여주인공이 혼자 살아남는 설정을 떠올리게 된다.

루시는 슬래셔 무비의 ‘파이널 걸(Final Girl)’처럼, 제이크를 찾기 위해 학교 건물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무시무시한 살인마 대신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루시와 제이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사이에 끊임없이 출몰하던 학교 청소부 노인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루시와 제이크의 춤이 펼쳐지고 제이크가 노래를 하는, 공포영화와는 거리가 먼 뮤지컬 장르가 펼쳐진다.

결국 관객이 마주했던 인물들과 관객이 보았던 모든 이상하고 기묘했던 장면들은 그 늙은 청소부의 망상이었던 것이다(영화 도입부의 내레이션에서, 루시는 제이크가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우며,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주인공을 제이크가 아니라 루시로 설정했기 때문에 관객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그녀를 중심으로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감독의 의도에 따라 관객을 이리저리 끌고 다닐 수 있는 원동력이 주인공의 설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루시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관객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처럼, 그녀를 따라 그녀가 경험하는 이상한 사건들을 보게 된다.

루시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노인의 눈앞에 털시 타운을 선전하는 애니메이션이 펼쳐진다. 그리고 마지막 망상이 이어진다. 늙은 제이크가 노벨상을 받고 연설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노인/제이크는 젊었을 때 물리학자였으나 열악한 가정환경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 탓인지 사귀고 싶은 여성에게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채 사회에서 점점 고립되어 갔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는 텔레비전에서 본 갖가지 소재로 만들어낸 망상과 함께 혼자 외롭게 늙어갔던 것이다.

그의 망상이 부모의 집과 털시 타운 그리고 학교 공간을 쳇바퀴처럼 반복하면서, 결코 그 공간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설정, 그의 저승길에 죽은 가족이나 지인이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비참하게 죽었던 돼지가 나타나 동행한다는 설정은 그 인물의 불행을 더욱 부각한다. 영화 제목 ‘이제 그만 끝낼까 해(I’m Thinking of Ending Things)는 루시가 제이크와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망상 속에서 살아가기조차 지쳐버린, 그래서 삶을 그만 끝내려고 하는 노인의 결심이다.

영화는 공포와 스릴러 장르를 중심으로 서스펜스를 충족시키고, 장르의 향연처럼 갖가지 다채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재미를 선사한다. 따라서 제이크의 망상은 마지막 반전을 위한 ‘서프라이즈’처럼 소비되고, 관객이 그의 외롭고 비참한 삶을 되돌아보거나 연민을 느낄 여지는 사라져버린다.

P.S. : 이 영화를 제작한 ‘Projective Testing Service’의 영화사 오프닝은 그 유명한 ‘쿨레쇼프 효과(쇼트의 배열에 따라 쇼트의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몽타주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필름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넷플릭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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