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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은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민청학련'과 '인민혁명당'은 어떻게 조작되었는가?
  • 강우정, 안치용, 박수연, 신다임
  • 승인 2020.12.2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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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⑩ - 청년 여정남과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민낯

1975년 4월 9일 청년이 죽었다.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여정남을 포함한 8명의 청년은 사형을 선고받은 지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정남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민청학련이 ‘인민혁명당’을 재건하려 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인민혁명당은 이름만 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체였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방어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여정남 등은 이날 국가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정부가 발표한 민청학련 조직도 /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정부가 발표한 민청학련 조직도 /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격동의 시대, 1차 인민혁명당 사건

 

1945년 대구시 중구 전동에서 출생한 여정남은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경북대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2.28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방학에는 막노동판에서 일했다. 그의 가정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정남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생활하고 싶어서 막노동판에 갔다고 한다. 그렇게 번 돈은 가장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에게 몽땅 털어주었다. 

呂正男.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정남은 이름대로 살았다. 1962년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회장을 역임하면서 3번의 제적과 복학을 반복했다. 1964년엔 한일협정 반대 투쟁에 참여했다가 대학에서 제적되어 군에 입대하게 된다. 

여정남 / 출처=정운현
여정남 / 출처=정운현

한일협정 반대 흐름은 박정희 정권에게 쿠데타 이후 가장 위협적인 정치적 상황이었다.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단식농성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문제는 이 운동이 한일협정 반대를 넘어 박정희 정권 반대로 확장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 계승을 조건으로 군정을 인정한 지식인ㆍ국민의 지지는, 쿠데타 세력의 부정부패와 한일협정 사건이 맞물려 급속도로 이탈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 진보 정치 세력을 탄압한 ‘진보당 사건’으로 자취를 감춘 진보 정치 세력은, 4·19 혁명 이후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의 이름을 내걸고 다시 제도권 내로 진입했다. 그러나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거에서 사회대중당 4석, 한국사회당 1석으로 총 5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으며 이듬해 5·16쿠데타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공개석상의 활동이 불가능해진 진보 정치 세력은 ‘비합법’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1964년 8월 14일에 중앙정보부는 충격적인 사건을 발표한다. 사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북괴 노동당의 강령을 토대로 진보 정치인, 언론인, 대학교수, 학생 등으로 조직된 단체를 적발했다. 학생데모를 조종하면서 정권을 타도하고 국가변란을 음모했다. 이 단체의 이름은 인민혁명당이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검사들이 아무리 전력을 다하여 수사를 해도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공안부 사건 담당 검사 3인(이용훈, 김병리, 장원찬)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 이미 결론이 정해져 있었기에 사건 담당 검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압력을 받은 당직 검사 정명래를 통해 26명이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기소된다. 

이후 조사과정에서 피고인 대부분이 물과 전기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사회적 파문이 일어났다.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14명의 피고인에 대해 공소를 취하했다. 나머지 피고인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철회하고, 추가 구속자 1명과 함께 ‘반국가단체 찬양-고무 동조죄(반공법 위반)’으로 재기소하였다.

1심 선고 공판에서 도예종, 양춘우는 각각 징역 3년과 2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 11명은 무죄였다. 검찰이 항소심을 제기했고 항소심 결과가 달라졌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1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하지 않는 일반적인 판례와 달리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대다수에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이처럼 무죄가 유죄로 뒤집힌 판결로 인해 세간의 의혹은 더욱 짙어졌다.

당시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검찰이 주장한 인민혁명당의 당명과 그 당령이 심의 통과 되었다는 주장은 믿을 수 없다고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혁신정당의 기본이념 및 기초적 강령을 토의한 혐의는 인정받았다. 즉 정치적으로 힘을 얻지 못한 진보 정치계가 정당 창당을 위한 논의를 진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약속한 민정이양이 실현되었을 때를 대비한 기초적 논의에 불과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중앙정보부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비밀지하조직으로 사건을 부풀려 조작했다. 이것이 ‘인혁당’ 사건의 실체이다. 

박정희 정권은 사건 조작과 이데올로기 조작을 병행해 비판을 잠재우려 했다. 즉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는 ‘북한의 조종을 받은 국가전복 시도’라는 공식을 정치적으로 표면화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기소를 거부한 검찰의 양심에 판정패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집권 세력의 정치는 양심보다 현실에 치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이 정치적 음모의 결과물이자 사법적으로 조작된 것임을 사실상 시인한 셈이다. 당시 김형욱은 인민혁명당이 북괴 노동당의 강령을 골자로 해 조직된 불법 단체이며 3.24-6.3(한일협정 반대)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발표했다. 

 

대학가에 드리우는 유신의 그림자

 

1969년에 군 복무를 마친 정남은 경북대학교 비공개 동아리 ‘정진회’를 중심으로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진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초부터 개헌을 언급하였으며 이해 6월에 이르면 개헌 움직임이 본격화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대 법대생들의 개헌 음모 분쇄 투쟁을 시작으로 고려대와 연세대로 이어지는 저항 운동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6월 30일에 경북대에서도 데모가 일어났고 이 중심에는 정남이 있었다. 

전국민적 저항과 야당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국회의결과 국민투표를 거쳐 3선 개헌으로 불리는 6차 헌법 개정안이 1969년 10월 21일 공포되었다. 군사정권의 물리력을 뚫기엔 민주세력의 힘이 아직 미약했다. 3선 개헌에 이어 대선과 총선을 앞둔 박정희는 학생운동 세력을 순치하기 군사교련 강화를 내세웠다. 3선 개헌안 통과 후에도 정남이 이끄는 ‘정진회’는 경북대학교 학생운동 내에서 영향력을 더 확대해나갔다. 1969년 투쟁이 3선 개헌이란 단일 의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교련 반대 운동은, 교련 강화 그 자체보다 정부의 억압적 정책에 대한 넓은 차원의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었다.

정남은 교련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경북대에서 전국 대학생 동아리 대항 학술 토론회를 개최했다. 교련 반대 운동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총체적 투쟁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 아래 전국 학생들을 조직화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 토론회에서 대학생들에게 배분된 유인물 ‘반독재 구국 선언’의 일부 문구를 빌미로 정남은 구속되었다. 선언문이 정남이 리더로 있는 ‘정진회’에서 작성한 것이어서 그의 구속과 ‘정진회’를 중심으로 한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의 사실상 와해는 불가피했다. 

3선 개헌에 따라 대선에 나갈 수 있게 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조직적 관권선거 부정선거임에도 박정희는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약 90만 표밖에 앞서지 못했다. 김대중은 도시에서 52.8%를, 특히 서울에서 58%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학생운동 등 반독재 투쟁세력의 성장과 김대중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맞수의 부상은 박정희 정권에게 실질적 위협으로 다가왔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대선 한 달 후 열린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개헌 가능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969년 개헌을 ‘3선 불가’를 풀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아 이후 ‘합법적으로’ 헌법을 바꿔 영구집권을 실현하려던 박정희의 구상에 일격이 가해졌다.

박정희는 합법적 영구 집권 시나리오를 수정해 초법적 방식의 영구집권, 즉 친위 쿠데타(self-coup)의 길을 걷는다. 박정희는 무책임한 안보 논의가 민심을 혼란케 하고 있다며 1971년 12월 6일 국가 비상상태를 선포했다. 이어 국회 다수를 점한 공화당을 통해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일명 국가보위법)을 12월 27일 제정했다. 헌법을 뛰어넘은 대통령, 즉 명실상부한 독재자의 등장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의 긴급선언을 통해 유신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완료된다. 

친위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권한 중 하나는 긴급조치권이었다. 긴급조치권은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 국정 전반에 걸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긴급조치권이 발동된 사안은 사법적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했고 만일 국회가 해제를 건의해도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헌법에 반대하는 모든 언급을 금지하고 ▲위반하는 사람은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으며 ▲징역 15년 이하에 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다.

 

긴급조치 4호, 다시 등장한 인민혁명당

 

강요된 침묵은 오래갈 수 없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보석으로 석방된 정남은 반유신 운동을 계속했다. 1974년 3월 신학기 시작과 함께 경북대를 필두로 한 학생시위를 이끌었다. 1974년 4월 3일에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에서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으로 유신을 비판하는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이날 저녁에 박정희 정권은 학생시위 차단을 목적으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였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 제시된 여정남/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이를 연결하는 인물로 제시된 여정남/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박정희는 4월 3일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불순 세력의 조종하에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했다. 적화통일을 위한 초기 단계의 불법 활동을 감지했고,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안보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긴급조치를 선포한다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4호에 따라 민청학련과 관련된 단체를 조직하거나 가입·회합·통신·연락 등의 모든 행위를 금하며 위반 시 최하 5년의 유기징역에서 사형까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청학련의 실체가 무엇인지 학생운동의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한 수사는 일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유인물이 배포된 당일 저녁에 단체의 실체와 배후까지 파악하여 이 위협에 대처하여 긴급조치를 발동한 것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의 수사 보고를 살펴보면 조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4월 17일에 정남이 체포되었고, 수사는 순식간에 대학가에서 과거 진보정치계 인사, 진보적 지식인 등으로 확대되었다. 사전에 수사 방향을 결정한 후에 고문을 통해 관련자를 결정하고 확대하는 방식이었다. 

1974년 4월 21일 중앙정보부 수사상황 보고에는 ▲관련자가 공산주의자임을 입증하라 ▲가족 중 부역자와 혁신계(진보정치 세력) 등을 찾아내라 ▲친구나 선배 등으로부터 정부 전복을 교사받은 사실을 조사하고, 조직체계 전모를 규명하여 발본색원하라 등의 지시가 기재돼 있다. 이 외에도 학생운동의 배후관계에 있는 간첩의 지령, 그리고 이 행위가 국내 진보계의 조종하에 있다는 등 세부적인 조사 방향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1974년 4월 25일에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수사상황을 발표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불순 반정부세력’인 민청학련 관계자 1,204명이 조사를 받았고 그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5월 27일엔 비상 보통군법회의 검찰부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번에 뿌리 뽑지 못한 인민혁명당 세력이 당을 재건하기 위해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를 만들었고 민청학련의 배후에 이 세력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재판은 인민혁명당 재건위 재판과 민청학련 재판으로 나누어졌고,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21명이 재판을 받았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재판에서 정남을 포함한 8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김한덕 등 7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6명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대부분 특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지만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중형을 받았다. 이 사건을 ‘2차 인민혁명당 사건’ 혹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부른다.

인혁당재건위의 배후로 ‘북괴’를 제시한 정부 /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인혁당재건위의 배후로 ‘북괴’를 제시한 정부 /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김진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약 10년의 간격을 두고 ‘인민혁명당’의 이름이 공통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은 두 사건이 정치역학상 매우 유사한 환경에 처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먼저 두 사건 모두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이 격렬해지는 시기에 발생했다. 이어 정부는 학생운동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음을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이 학생운동의 목표가 모두 국가전복과 공산주의 혁명 기도임을 분식했다. 앞서 1차 인혁당 사건을 통해, 인민혁명당에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박정희 정권은 파렴치하게도 국민에게 ‘인민혁명당’이란 가상의 공산주의 혁명당을 앞세우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적극적으로 펼쳤다.

 

수치스러운 재판, 엉터리 집행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세계의 관심이 우리나라 대법원에 집중되었다. 하급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8명(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공판일이었다. 독재체제에서 군법회의는 이름만 법정이었으며 이들의 공소사실은 어떤 증거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았다. 정보부 요원의 고문을 통해 얻었으리라 추정되는 진술서가 증거의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대법원의 양심을 기대한 피고인의 가족, 기자단 등 70명이 재판장에 들어서 있었고 긴장감이 흘렀다.

재판은 10분의 판결문 낭독만으로 끝났다. 대법관 13명 중 이일규 대법관만이 판결에 반대했다(74도3323판결). 사법사상 가장 부끄러운 판결이라 불리는 이 재판의 결과는 사형이었다. 정남은 재판장을 향해 “영광입니다”라고 말했다. 피델 카스트로가 15년형을 선고받은 법정에서“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정남은 자신이 역사의 법정에서 승소하였음을 확신했다. 안타깝게도 카스트로는 석방되어 독재정권을 무너트렸지만, 여정남은 불과 18시간 뒤에 사형당했다.

사형 선고 후 오열하는 방청객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사형 선고 후 오열하는 방청객 /출처: KBS ‘기억 마주서다’ 2019년 2월 10일 방영

 

재판과 사행집행의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었다. 심지어 사형집행 후 두 구의 시체는 가족들의 동의 없이 당국에 의해 화장됐다. 고문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시신을 공개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게다가 유가족들에게 제시된 유언장은 모두 같은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할 말이 없다”며 재판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장례의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며 주목받기를 꺼리는 태도는 사형을 선고받은 수형인의 유언이라기보다 정권의 불편한 심경을 담은 메시지로 비춰진다. 

 

인혁당 사건 그 후,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청년 정남을 비롯한 8명의 민주 운동가는 역사 속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죽음 밖의 현실은 여전히 광기 어린 유신의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현실 속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파괴해나갔다.

중앙정보부는 수사과정에서 사건 관련자의 가족을 불법 연행하여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이 공산주의자인 것을 인정하라고 협박했다. 더하여 진상규명과 관련된 운동을 금지했으며 가혹행위를 가하기도 했다. 송상진의 부인 김 아무개는 남편이 공산주의자라는 각서에 지장을 찍을 것을 강요당했다. 서도원의 부인 배 아무개는 고문을 당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관계자 중에서 인혁당이라는 가상의 수뇌부를 만들어내기 위해 관련자 가족에까지 물리적 폭력을 가했다. 

국가폭력은 재판과 사형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유가족들은 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돼 감시를 받았다. 이들은 신체의 자유를 비롯해 거주이전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까지 침해당했다. 시장에 갈 때면 경찰관이 따라붙었고 집 앞 도로변에 대놓고 초소를 만들어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경제적 보복과 집단 따돌림이었다. 남성이 경제를 책임지던 그 시절 남편들의 구속은 가계 빈곤을 유발했다. 남편의 변호 활동을 위해서 아내들이 경제활동에 참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형이 확정된 이후에는 연좌제로 직장을 잃거나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가족이 권력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였을뿐더러 자신들까지 고문 등을 통해 신체적·심리적 피해를 받은 유가족이 경제활동 등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단 따돌림 역시 큰 고통이었다. 국가가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신문-방송-학교’를 통해 희생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음에 따라 일상적으로 또 강력하게 작동하는 학대의 그물에 걸려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희생자와 유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공산주의자, 빨갱이로 호명되었고 사회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부인과 자식 또한 평생 공산주의자의 낙인을 감수하며 이방인으로서 사회에서 소외된 채로 살아가야 했다.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서 사형당한 8명의 청년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2012년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이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인혁당 재건위 판결에 대해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됐다. 이어 조윤선 후보 대변인까지 “법원에서도 상반된 판결이 있었고, 다른 정권에서의 결론인 데다가 역사적으로 얼마 안 된 사건”이라고 말해 역사 왜곡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한 번의 왜곡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케 했다. 박근혜의 말이 부분적으로는 옳다. 지나간 세월은 되돌릴 수 없지만, 이 사건을 앞으로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 강우정: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농구하며 땀 흘리는 것을 좋아한다. 법과 철학의 관점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해 많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에 힘쓴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박수연: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재학. 호기심과 열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신다임 :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참고문헌

- 정용일, “사형 언도한 독재자 전율케 한 최후진술 “영광입니다” 유신독재에 맞선 투쟁의 선봉장 여정남“. 민족 21, 2008년 4월호

- 김진균 외 저, 김진균교수 저작집, 문화과학사

- 김형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과와 의미」, 『과거청산 포럼자료집』, 포럼진실과정의, 2007

- 유리라, 『유신체제하 학생운동 연구』, 석사학위논문, 목포대학교, 2007

- 권혜령, 「유신 헌법상 긴급조치권과 그에 근거한 긴급조치의 불법성」, 『이화여자대학교 법학논집』,제 14권,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연구소, 2009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 민주화운동I-Ⅳ』, 1987

- 오승용, 「국가폭력과 가족의 피해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중심으로」, 『담론201』 10권, 한국사회역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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