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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우먼의 꿈, 그리고 현실
커리어우먼의 꿈, 그리고 현실
  • 김희경 l 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31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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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드림 이즈 커리어우먼(My dream is career woman).”

서툰 영어 실력, 하지만 한 단어씩 천천히 또박또박 말한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그 꿈은 이미 이뤄졌다고.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나오는 장면이다. 1995년 대기업 삼진그룹에 다니는 8년차 직원 자영(고아성 분)은 커리어우먼을 꿈꿨고, 또 이뤄졌다고 믿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영이 원하던 ‘커리어우먼’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졸 여직원인 자영은 회사에서 커피 타기, 담배 심부름 등을 할 뿐이다. 1990년대만 해도 ‘국제화 시대’와 ‘능력 중심주의’를 외치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그 구호는 공허하게 헛돈다.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남자 후배는 대리를 달았지만 자영에겐 먼 이야기다.  

영화는 마지막에 자영, 그리고 자영과 같은 처지의 여직원들이 힘을 합쳐 회사가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고 해결하는 주역이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토익 600점을 넘으면 승진시켜 준다는 공고를 보고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이 해피엔딩은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다. 영화가 관객에게 남긴 보이지 않는 질문 때문이다. 그 질문은 이렇다. 자영을 비롯한 여직원들은 진정 커리어우먼이 된 것일까? 만약 영화의 시간이 25년 후인 현재에 맞춰져 있다면 어땠을까. 이 시대의 수많은 ‘자영이들’은 커리어우먼의 꿈을 이뤘을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컷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입성하는 두 가지 방법

이 같은 질문을 담은 영화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우주산업 발전에 기여한 흑인 여성들을 다룬 <히든 피겨스>(2017)도 여기에 해당한다.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NASA 최초로 우주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된 흑인 여성들을 그렸다. 이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할 뿐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당당히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큰 울림을 선사한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다”라는 말과 함께.

 

<히든 피겨스> 스틸컷

하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히든 피겨스> 등이 우리에게 던지는 ‘지금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러면 이 작품들이 주는 섬뜩한 경각심을 깨달을 수 있다. 최근에 나온 한 설문조사 결과만 봐도 그렇다. 이 결과는 영화들이 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직장인 앱 ‘블라인드’는 최근 코스피 500대 기업에 재직하는 한국 직장인 3,4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3%가 ‘기업의 성평등 수준이 낮다’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 53%라는 수치도 양성 응답자를 합산한 결과이며, 여성 응답자의 81%가 ‘기업의 성평등 수준이 낮다’라고 답변했다. 수많은 자영이들이 여전히 성차별과 불평등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그중 가장 심각한 성차별 유형으로 ‘승진/평가/보상 기회의 차별’을 꼽았다. 고졸 여직원인 자영이가 토익을 잘 봐서 대리로 승진하는 설정이 영화보다 현실에서, 과거보다 현재에서 더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차별은 자영과 같은 고졸, 또는 생산직일수록 심각하다. 미국 러스트벨트에서 일하는 여성 철강 노동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의 저서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은 그 실상을 잘 보여준다. 골드바흐는 이렇게 말한다. “제철소에 여성 노동자가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소수집단이었다. 몇몇 남자들은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을 회사가 채워야 하는 할당량으로 봤다. 기껏해야 그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상징적 존재로 여겼고, 많은 경우 우리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았다.” 

골드바흐가 자신의 고참이 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부분에서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남성들의 편견 가득한 시선이 느껴진다. “너희 여자들은 돌봐주기를 바란다”, “너희 여자들은 머리에는 생각밖에 없지.” 어떤 근거도 없는 이분법적 시선이 노동의 무게에 더해져 여성 노동자를 무겁게 짓누른다.  이 같은 현실이 더 모순적이고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여성의 노동문제를 조명하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문화·예술계에서조차 이런 문제가 반복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스태프들은 남성들에 비해 더 열악한 처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다. 작품 안에서도 아직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2017년 기준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여성의 대사 비중은 27%에 불과했다. 여성 주인공도 29%에 그쳤다.

여성은 문화산업을 비롯해 각 산업에서 오랫동안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렀다. 1989년 미국 뉴욕에서 한 포스터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근대미술 부문 작품 중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은 5%에 그치는 반면, 미술관에 걸린 누드화의 85%는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가 그린 ‘집=여인’ 시리즈(1945~1947)도 이를 잘 보여준다. 여인의 얼굴은 집으로 대체돼 있다. 그리고 여인의 팔다리만 덩그러니 그려놓았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가장 일상적이고 가까운 공간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가정에서 나아가 사회 전체로도 확산돼 오랜 시간 여성들을 억눌러 왔다. 

 

통제를 무너뜨리는 두 글자, ‘연대’

그럼에도 이를 거부하는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2019년에 나온 영화 <캡틴 마블>도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캐럴(브리 라슨)은 늘 자신의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 ‘조절’하는 법을 훈련받는다. 그를 훈련시키는 욘 로그(주드 로)는 이를 선의로 포장하며 캐럴이 스스로를 억누르도록 유도한다. 의지대로 힘을 발산하는 것은 곧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라 세뇌시킨다. 그러나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안 순간, 캐럴은 이렇게 말한다. “난 늘 통제당해 왔지. 그걸 무너뜨리고 자유로워지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캐럴은 어느 히어로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자유롭게 온 우주를 누비며 마음껏 힘을 발산한다.

 

<캡틴 마블> 스틸컷

최근 현실에서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프랑스 파리시 경영부서가 양성평등 채용규정을 위반해 9만 유로(약 1억 2,0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뉴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당연히 여성비율이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듯하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파리시 첫 여성 시장으로 선출된 안 이달고 시장은 2018년 시청 고위 관리직에 여성 11명, 남성 5명을 임용했다. 프랑스는 공공기관의 경영 부서 고위직 임명자의 경우 한쪽 성별이 60%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 비율이 70%가 되다보니 벌금을 물게 된 것이다. 해당 규정은 지난해 폐지됐지만 2018년 인사라 적용을 받게 됐다. 이에 대해 이달고 시장은 오히려 “기쁘다”라고 말했다. ‘유리천장’으로 상징되는 여성 고위직. 그 견고한 창을 깨뜨렸다는 점이 유쾌하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이달고 시장이 한 또 다른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신과 일하는 모든 여성 직원들과 함께 직접 벌금을 제출하러 갈 것이라고 했다. 마치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한 장면 같다. 사내 비리를 고발하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자 자영은 온갖 억압을 받는다. 그러나 자영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커피를 타고, 담배 심부름을 해야 했던 수많은 여성 동료들이 자영의 편에 선다. 이뿐 아니다. 같은 부서 남성 직원들도 하나둘씩 서서히 이들과 함께 힘을 합친다. 

‘연대’. 이 단어가 주는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 간단하고도 어려운 이 두 글자가 더 이상 영화 속, 혹은 다른 나라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 기대해 본다.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는 이 단어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이 단어가 곧 당신의 발걸음이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글·김희경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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