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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감독 선구자들이 만든 영화 르네상스
여류 감독 선구자들이 만든 영화 르네상스
  • 필리프 페르손 l 작가
  • 승인 2020.12.3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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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스 웨버는 역사가들에게 잊힌 여성 영화인이다. 미국 여성의 일상생활과 사회문제를 다뤘던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소실됐다. 20세기 초 무성영화 황금기를 열었던 여성 감독·시나리오 작가는 로이스 웨버 외에도 여럿 있었다.

 

<남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포스터, 1921 - 로이스 웨버

영사기가 탄생한 지 1년 후인 1896년, 23세의 프랑스 여성 알리스 기는 <양배추 요정>을 촬영했다. 51초짜리 이 영화로 그녀는 최초의 판타지 영화감독이자 최초의 여성 영화인이 됐다. 알리스는 20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에서 감독 일을 계속했고, 미국 뉴욕 근처에 남편인 에르베르 블라쉐와 함께 자신의 영화 제작사를 설립했다. 지쳐서 도전을 멈추기 전까지 알리스는 단편영화 100여 편과 장편영화 몇 편을 제작했으며, 영화산업이 할리우드에 자리 잡는 모습을 제때 보지 못하고 영화계를 떠났다. 

알리스 기 블라쉐는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잊혔으며, 작품을 빼앗기기까지 했다. 프랑스 영화 역사가 조르주 사둘이 그녀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몇몇 지지자들을 얻었다. 때맞춰 2017년부터는 영화제에서 여성 감독들이 소외되는 상황이 지적되기 시작했고, 이에 구색 맞추기의 일환으로 알리스의 이름을 딴 상이 여성 감독에게 주어졌다. 

오늘날 알리스 기 블라쉐를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도 만들어졌다. 미국에서 파멜라 R. 그린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자연스럽게:알리스 기 블라쉐의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조디 포스터와 같은 페미니스트 여성 배우들의 열렬한 추천사를 받았다.(1) 그러나 이렇게 인정받았음에도, 영화계를 지금까지 지배해 온 사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알리스 기는 그녀의 비범한 자질 덕분에 남성들의 세계인 영화계에 끼어들 수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다. 1908~1920년, ‘제7의 예술’ 영화 부문 여성 선구자는 알리스 기 블라쉐가 유일하지는 않다. 영화감독이자 역사학자인 케빈 브라운로우는 할리우드 무성영화에 관한 대작을 저술했다. 그의 책 『지나간 퍼레이드』(2) 각주에 열거된 여성 선구자들만도 8명이다. 현재 연구에서 집계된 수를 보면 수십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약 200편의 영화 혹은 연속극 제작에 공헌했다. 당시 연속극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매주 다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새로운 에피소드를 볼 수 있었다. 

1918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약 100편의 영화 중 약 20편이 여성이 제작한 작품이었다. 이 여성들은 대거 시나리오 집필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장편영화가 업계 표준이 됐을 때는 자신에게 필요한 노하우를 획득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들은 무성영화 황금기에 충분히 참여할 역량이 있었고 몇몇 이름은 전설로 남게 됐다. 우선 <네 기수의 묵시록>(1920, 렉스 잉그램) 그리고 <벤허>(1925, 프레드 니블로) 제작에 참여한 준 매시스가 있다.

아니타 루스는 <인톨레런스>(1916, 데이비드 워드 그리피스) 제작에 참여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28, 맬컴 St. 클레어) 원작소설(1925년)의 작가로서 최초 시나리오 번안 작업을 했다. 이 영화는 그 후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각색됐으며, 하워드 혹스 감독이 만든 1953년 버전은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프랜시스 매리언은 조지 피츠모리스가 감독하고 루돌프 발렌티노가 연기한 <셰이크의 아들>(1926) 제작에 참여했으며, 위대한 영화감독인 빅터 소스트롬이 연출한 <바람>(1928)의 각본을 썼다. 매우 보수적인 성품으로, 영화계에 여성들이 계속 진출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세실 B. 드밀도 여성 작가와 함께 일했다. 매우 유능했던 시나리오 작가 제니 맥퍼슨(<반역>, <훌륭한 크라이튼> 등)은 감독의 명성에 크게 공헌했다. 

감독으로 진출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었다. 3편의 영화를 연출한 프랜시스 매리언(1888~1973)도 그런 경우였다. 1920년대가 여성들에게 엄격한 시대였던 만큼, 역사가들에 의해 과소평가당한 여성 영화인들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 또한 그들의 연출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숱한 장편, 단편영화 제작에 시나리오까지 

뛰어난 감독인 로이스 웨버(1879~1939)의 행보와 그 계통을 잇는 작품이 이를 증명한다. 복음주의 사상과 구세군 교회의 선교 정신에 깊게 영향을 받은 로이스 웨버는 여성 감독 최초로 장편영화(<베니스의 상인>, 1914)를 연출한 인물이다. 25년 이상 영화를 제작한 그녀는 도로시 아즈너(1897~1979)와 함께 무성영화와 발성영화를 동시에 연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영화 몇 편만을 연출한 후 조용히 사라져 간 1920년대의 다른 여성 감독들과 달리, 로이스 웨버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적어도 200편의 단편영화와 30여 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특히 전쟁 전에 가장 몸값이 높은 감독이 됐다. 남편과 동업하기는 했으나, 작품제작 전반에 있어 그녀의 탁월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로이스는 시나리오와 자막을 썼으며, 연기와 지휘, 배경과 의상 구상까지 했다.

그녀의 전기작가 셸리 스탬프에 의하면(3), 1915년 로이스 웨버는 데이비드 워드 그리피스와 세실 B. 드밀과 동급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데이비드 워드 그리피스가 KKK단의 명예를 위해 제작한 <국가의 탄생>으로 유명해지고, 세실 B. 드밀이 영화 <반역>을 통해 인종차별주의 편견을 드러내는 동안, 로이스 웨버는 미국인의 일상생활과 사회문제를 다뤘다. 상당히 민감하고 중요한 주제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는 데 영화가 지닌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 권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이었다. 

산아제한과 가족계획에 대한 화두를 던진 <내 아이들은 어디 있는가?>(1916)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화 <신발>(1916)에서는 가난 때문에 매춘에 내몰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사람들 vs. 아무개>(1916)에서는 사형제도를 다뤘다. 로이스 웨버의 페미니즘은 때때로 약간 도덕적인 성향을 띄긴 했으나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문제를 기탄없이 그려냈다. 영화 <위선자들>(1915)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큰 성공을 거뒀다. 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중인화 방식을 사용했는데 완전히 나체로 등장하는 여인을 화면에 중첩해 보여주는 파격적인 연출을 했다. 

영화에 사용한 기술은 정교했고 창의성이 풍부했으며 형식뿐 아니라 메시지 전달도 훌륭했다. 그녀의 단편영화 <서스펜스>(1913)에서는 화면을 3분할해 액션을 보여주는 혁신적인 기법도 선보였다. 밀드레드 해리스, 클레어 윈저처럼 로이스 웨버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들은 매번 스타가 됐고, 이는 ‘스타 시스템’의 구축에 기여했다. 로이스 웨버가 일하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창립자 칼 래믈은 거금을 들여 러시아 유명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영화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1916)에 출연하는 일을 성사시킨 적이 있었다. 이때, 칼 래믈이 이 프로젝트를 맡긴 사람도 로이스 웨버였다. 

그러나 거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로이스 웨버는 점차 선망의 지위를 잃어갔다. 이전에는 수공업에 가까웠던 영화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산업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 주요 제작사들이 집결해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는 일곱 개의 ‘메이저’ 제작사가 탄생했다. ‘빅 비즈니스’와 연결된 영화 제작사 대표들은 이제 상류층 기업이 돼 매우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1922년부터 워런 하딩 대통령과 가까운 공화당 의원인 윌리엄 헤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진보주의적 사상을 반박하고 사회관습에 도전하는 일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검열 규칙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1922년 미국 영화 제작자 및 배급자 협회(MPPDA)가 탄생했고, 이 협회는 1934년 ‘헤이스 코드’를 만들었다. 이 검열제도는 오랫동안 할리우드의 윤리성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선정적인’ 키스 금지, 다른 ‘인종’ 사람들 연합 금지, 종교에 대한 부정적 묘사 금지 등이다.) 

 

갑작스런 사망, 뒤이은 화재로 귀중한 필름들 소실

영화제작을 위한 비용이 커지면서 제작사들은 자신을 ‘유리화’하기 시작했다. 로이스 웨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각자 조금씩 모든 것을 다 했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시나리오 부서는 이제 제작부서의 지배를 받게 됐다. D. W. 그리피스를 포함한 작가 겸 감독들이 하나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를 채운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새로운 ‘대부호’ 어빙 탈버그와 같은 제작자는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감독은 쫓아냈다. <어리석은 아낙네들>(1922)을 연출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이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어빙 탈버그는 더 순종적인 감독 몇 명을 자리에 앉혔다. 한마디로, ‘작가 시대의 종말’이었다. 

여성들은 특유의 비판 대상이 됐다. 어떤 이들은 여성 감독의 영화에 집약된 메시지는 ‘페미니스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1910년대 초, 여성 배우와 여성 감독은 연속극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다. 이들이 연출한 작품에서는 <폴린의 위기>(1914)의 펄 화이트 같은 대담하고 톡톡 튀며 현대적이고 독립적인 여주인공이 등장했다. 게다가, 외모까지 소박했다. 남성들이 꿈꾸는 ‘글래머’, 또는 의상이나 화장품을 뽐내며 구매욕을 일으키는 여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번영의 시대인 1920년대, 영화산업은 쇼윈도 역할을 해야 했다. 여성해방을 선동하거나 로이스 웨버가 중요시한 가정 내 어머니들의 일상 문제와 같은 내용을 다뤄서는 안 됐다.

그러나 로이스 웨버는 여전히 영화 여러 편을 연출했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며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점점 밀려나고 있는 현실을 인식해야 했다. 스타 시스템이 구축되는 데 공헌한 그녀가, 그 시스템 때문에 사회적 주제를 다룬 영화를 꿈꾸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서열화된 시스템의 일원이 돼버린 자신을 보며 그녀는 분통을 터뜨렸다. 예전에는 자유롭게 하던 일들은, 이제 상의를 거쳐야 했다. 

이제 영화인들은 더 이상 화두를 던지는 주체가 아닌, 오락물의 생산자로 전락하게 됐다. 1930년대에 그녀는 발성영화만 연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로이스 웨버는 루스벨트 행정부와 함께 영화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발전시키기로 결심했다.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문화적·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9년, 60세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그녀의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로이스 웨버가 사망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니버설 스튜디오 기록 보관소에 불이 났다. 셀룰로이드나 질산염으로 만들어진 영화필름은 불이 쉽게 붙을 뿐 아니라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성영화 시대에 제작된 영화 75%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됐다.(4) 로이스 웨버의 거의 모든 작품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지금은 그녀의 작품 중 그 유명한 <서스펜스> 같은 몇몇 단편영화와 장편영화 세 편(<신발>,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 <얼룩>)(5)만 볼 수 있다. 우선해 복원작업이 들어간 영화들은 영화역사가들이 강조한 남성 감독들의 작품이었다. 

 

 

글·필리프 페르손 Philippe Person
작가 

번역·이정민 minuit15@naver.com
번역위원


(1) <자연스럽게>(2018)는 6월 24일 개봉, 자서전은 1976년 Dennoël-Gonthier 출판사에서 출간됨. 
(2) Kevin Brownlow, 『La parade est passée 지나간 퍼레이드』, Actes Sud, 2011.
(3) Shelley Stamp, ‘Lois Weber in Early Hollywoo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5. Weber, Lois, ‘A Dream in Realization, Interview with Arthur Denison’. <Moving Picture World>, 1917년 7월 21일. Richard Koszarski, ‘Hollywood Directors, 1914-1940’,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76. Antonia Lant, ‘Red Velvet Seat: Women’s Writing on the First Fifty Years of Cinema,Verso’, 런던-뉴욕, 2006. Martin F. Norden, ‘Lois Weber: Interviews’,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2019.
(4) <Dawson City : le temps suspendu, documentaire de Bill Morrison 도슨 시티:얼어붙은 시간, 빌 모리슨의 다큐멘터리>(2016). 8월 5일 개봉, 120분. 
(5) DVD <Les Pionnières du cinéma 영화의 선구자들>(2018). Alice Guy, Lois Weber, Mabel Normand, Dorothy Arzner, Dorothy Reid Davenport 영화 모음집. Lobster, 48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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