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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켜켜이 쌓인 시간이라는 선물, <보이후드>
[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켜켜이 쌓인 시간이라는 선물, <보이후드>
  • 최재훈(영화평론가)
  • 승인 2020.12.31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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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후드' 스틸 컷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이면, 대부분 사람들은 지난해는 지난했다며, 후회의 말을 한다. 그리고 새로운 날들은 지난날들과 많이 다른, 반짝이는 날들이길 원한다. 그래서 지난 시간들이 바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선물 같은 시간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만다. 그런 우리에게 무려 12년 동안 같은 배우, 같은 스태프와 함께 촬영하여 완성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는 켜켜이 쌓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라, 한 해의 시작에 권하고 싶은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12년의 성장을 담다

<보이후드>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모사’의 속성 위에 ‘다큐멘터리’가 가진 일상성과 진정성을 덧입혀 이제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12년 동안 실제로 성장해 가는 주인공 메이슨 주니어를 중심으로, 모든 출연자들의 12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을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함께 할 수 없었을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배우, 스태프의 노력과 끈기는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앞서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시리즈를 통해 19년의 변화를 겪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를 영화 속에 담아내면서, 배우와 영화와 우리가 19년의 세월을 함께 공유한 것 같은 감동을 만들어주었다. 

기획안만 보면 <보이후드>는 사실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 동안, 캐스팅된 배우와 제작진은 단 한사람의 변화도 없이 촬영에 임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매년 배우와 제작진을 만나 15분 분량씩을 촬영했다. 시나리오는 주인공의 변화에 맞춰 새롭게 쓰고 편집했다. 가장 큰 모험은 12년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남자 주인공의 선택이었다. 텍사스 주에서 6살 엘라 콜트레인을 골라낸 감독은 실제 시간의 흐름과 실제 사람의 성장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를 감당하면서, 기어이 <보이후드>를 완성해 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처럼 스토리는 특별할 게 없다. 여섯 살 메이슨 주니어(엘라 콜트레인)와 그의 누나 사만다는 싱글 맘 올리비아(패트리샤 아케트)와 텍사스에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메이슨과 사만다를 데리고 캠핑을 가거나 야구장에 데려 가며 친구처럼 놀아주지만 함께 살 수는 없다. 엄마의 일 때문에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도시로 이사를 다녀야 하는 메이슨은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똘똘하고 귀여운 엘라 콜트레인은 다행히 매력적인 소년으로 자라난다. 

<보이후드>는 메이슨의 성장영화이지만, 관객의 관점에 따라 다른 성장담을 담는다. 누나 사만다의 시점에서 보자면 <Girlhood>가 될 것이고, 올리비아를 중심으로 보자면, 싱글 맘의 작은 성공담으로 읽을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발 물러나 지난 나의 이야기를 돌이켜 보자면, 또 나의 지난 시절에 대한 회고담으로도 읽힐 수 있다. <보이후드>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인물들의 변화와 함께 영화 속에 담긴 12년 간 미국 대중문화의 다채로운 변화다. 메이슨이 가지고 놀던 게임기가 닌텐도였다가 훗날 wii로 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를 변화시킨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같은 온라인 매체의 등장과 그 변화도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담긴다. 또 메이슨과 함께 변화하는 팝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는 요소다.

 

'보이후드' 스틸 컷

당신과 나의 시간에 박수를

특별한 시련을 거치고, 훌쩍 어른이 된다는 성장담은 여러 픽션들이 그려 온 일종의 판타지이다. 먼지처럼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시간이 쌓여 언제 나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훌쩍 자라난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렇게 성장은 역시 일상의 한 과정이다. <보이후드>는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메이슨의 성장을 통해, 촘촘하게 이어진 일상이 지금의 나를 이뤄낸 작은 발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 메이슨의 엄마는 떠나는 메이슨을 향해 삶이 끝나는 것 같다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모두 안다. 그런 헤어짐 역시 새로운 시작이고, 우리 삶은 계속 이어져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남루하고 초라하고,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도, 내 삶은 남들과 달리 특별한 것이 없다고 비관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에게 내일은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 <보이후드>는 말한다. 훌쩍 자라난 시간 동안, 한번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어쩌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당신의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보이후드>는 관객들에게 시간을 선물하고, 그 시간을 되짚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과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이토록 진하게 소소한 나의 시간에 박수를 쳐본 적이 있는가? <보이후드>와 함께 나의 과거에도 박수를 쳐주자. 당신의 시간은, 나의 시간은 그렇게 박수 받을 만하다. 

 

'보이후드' 스틸 컷

사진출처_네이버영화_보이후드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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