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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의 버스안내양을 죽음으로 내몬 그들의 폭력
열여덟의 버스안내양을 죽음으로 내몬 그들의 폭력
  • 황경서, 안치용, 노수빈, 박서윤
  • 승인 2021.01.1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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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⑪ - 버스안내양

 

정경자는 18살의 나이에 버스안내양으로 취직했다. 새벽 5시에는 출근해 버스에 올라타 있어야 했기에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당시 버스에는 문이 중간에 하나만 있었다. 그 문으로 사람들이 타고 내렸기 때문에 기사가 올라타는 승객의 차비를 직접 받을 수 없었다. 경자는 다른 안내양처럼 승객의 차비를 받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면 내리는 승객들로부터 차비를 받고 새 승객이 다 타면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출발하라고 오라이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버스안내양 제도가 도입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961921. 서울 상도동 상도극장 정류장에서 오전 9시에 경자가 추락했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출발한 버스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경자는 병원으로 옮긴 지 3시간 만에 죽었다.

 

버스안내양의 등장

 

1961년 시내버스에 버스 안내양이 등장했다. 1920년대 버스의 도입과 함께 당시 시청 버스였던 서울 부영버스버스걸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가 광복이 되면서 자취를 감춘 버스안내양이 되돌아왔다. 1961617일 김광옥 교통부 장관은 시내버스 안내원을 모두 여자로 바꾸는 내용의 여차장제 도입 방침을 발표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고 한 정부 시책의 하나였다. 이에 따라 196181일 시내버스의 안내원이 남자 안내원에서 여자 안내원으로 교체되었다. 교체의 근거로 네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 선진국에서도 여객안내는 서비스업이므로 모두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둘째, 거친 남자보다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들에게 승객을 안내하도록 함으로써 명랑한 시민 교통을 이룩하여야 한다. 셋째, 남자안내원들이 기름 묻은 작업복으로 안내를 하는 거친 태도를 일소케 하여 서울의 품위를 높여야 한다. 넷째, 여성들의 유휴노동력을 개발하여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시켜야 한다.

여자 안내원으로의 교체는 1961년 서울, 부산, 대구 등 대도시를 시작으로 점차 중소도시로 확대되었다.

버스에서 일을 하는 버스안내양의 모습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버스에서 일을 하는 버스안내양의 모습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로 올라오는 여성노동자

 

송안숙은 버스안내양이 도입된 해에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남동생 둘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노름으로 논 열두 마지기를 하룻밤에 탕진했다. 가족은 바닷가 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주정을 하며 딸년들 필요 없다고 말했다. 오기가 생긴 안숙은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되겠다라고 결심하며 자기 손으로 두 남동생을 공부시키리라 다짐했다.

중학교는 가지 못했다.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고, 서울에 올라와 식모 생활을 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결국 택한 직업이 버스안내양이었다. 직장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김포교통이었다. 면접 날 김포교통 사람이 문제를 냈다. “35 곱하기 7?” 그때 성인 요금이 35원이었다. 질문 여섯 개에 바로 정답을 맞힌 안숙은 취직이 됐다. 안숙은 130번과 41번 버스를 탔다. 김포에서 서울을 오가는 버스였다.

1960년대 이촌 현상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과정이자 그 결과였다. ‘선 성장 후 분배에 입각한 경제성장 논리는 저임금과 저곡가정책으로 나타났으며, 공업화 정책은 도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촌 노동력의 이농탈농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실제로 1960년과 1966년 사이와 1966년과 1970년 사이 총인구 증가율이 각각 2.6%, 1.9%이었던 데 비해 도시인구의 증가율은 4.1%, 6.1%를 기록했다.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어린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저임금의 임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당시 많은 여성이 국민학교와 중학교 졸업 후 도시로 올라와 버스안내양이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112,560명이던 안내양은 197133,504, 1970년대 중반에는 약 5만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격한 증가세는 버스안내양이 학력과 나이 제한이 적은 직종이고 1960년대 초반 남성 안내원이 여성 안내원으로 교체되면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설명된다. 증명사진을 붙인 이력서를 제출하고 간단한 산수를 할 수 있으면 누구나 안내양이 될 수 있었다.

서울시 시영버스 증차 및 발대식 모습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시 시영버스 증차 및 발대식 모습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개문발차

 

버스안내양의 노동환경에는 크고 작은 위험이 도사렸다.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 시절, 개문발차(開門發車)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문을 연 채 버스가 출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승객이 만원이었다는 말이다. 몰려드는 승객들을 차 안으로 간신히 밀어 넣고 안내양은 문을 닫지 못한 채, 버스가 주행하는 동안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음 정류장까지 버텨야 했다.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하게 된 승객 중에는 간혹 버스안내양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타는 사람도 있었다. 승객이 다 탔는데도 버스 정류장에 몇 분이라도 서 있으면 정차 위반으로 단속했기 때문에 운전사는 승객이 탄 것을 확인하면 버스안내양이 탔는지 못 탔는지 확인할 겨를이 없이 바로 출발했다. 이 때문에 버스안내양이 버스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운행 중 일어난 사고에 대해 응당 회사가 치료비를 내야 했지만, 버스안내양의 잘못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안내양 본인이 치료비를 부담했다. 또한 사고로 오랜 기간 병원에 있게라도 되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직업 특성상 많은 버스안내양이 요통에 시달렸다. 따로 앉을 수 있는 곳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단 버스에 타면 퇴근할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198212월부터 19831월에 걸쳐 부산 시내 50개 버스회사 중 5개 회사에서 근무하는 버스안내양 192명을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163명이 요통을 경험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오랫동안 서 있을 때, 혹은 허리를 굽힐 때 요통을 느꼈다고 응답했으며, 다수가 거의 매일 요통을 느꼈다.

1975년 서울시의 <안내원 1일 근로형태 분석>에 따르면 버스안내양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8시간 27분이었다. 취침 4~5시간과 식사 30~1시간 정도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보통 이틀 혹은 사흘을 일하고 하루를 쉬었다. 그러나 사람이 모자랄 때는 닷새씩 연달아서 일했다. 어떤 이들은 한 달에 서너 번만 쉴 수 있었다. 항상 잠이 모자라고 시간에 쫓겼다. 이러한 노동의 대가로 버스안내양이 받은 급료는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버스안내양이 처음 탄생했을 때부터 한동안 그들은 월급제가 아닌 시간제로 급료를 받았다. 1966년에는 일당으로 140~160원 정도를 받았다. 소비자 물가지수 기준으로 1966년의 1원이 2020년의 34원에 해당하므로 현재 물가로 치면 버스안내양은 하루 18시간 노동의 대가로 약 5,164원의 일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일당이 올라 1974년 버스안내양의 월급은 최고 15,000원이었다. 같은 해 자장면 한 그릇이 200원이었으니 월급을 받아 짜장면 75그릇을 사 먹으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지수를 반영하여 계산하면 1974년의 1원은 2020년의 13원에 해당하므로 현재 기준으로 20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을 월급으로 받은 것과 같다.

시내버스 종점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시내버스 종점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삥땅

 

버스안내양의 적은 보수는 그들 안에서 소위 말하는 삥땅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저는 올해 19세인 여차장입니다. 저는 18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노동에 허덕이고 있습니다만 굳세게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을 저는 일하는 날 얻어지는 300원씩의 부수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희들 세계에서는 삥땅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매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만 그 삥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중략) 저는 영원히 교회와 등져야 합니까? 저는 정말 죄인입니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느 버스안내양의 편지 한 통을 계기로 1970428일 기독교계와 한국노사문제 연구소는 삥땅에 관한 심포지움을 열었다. 당시 버스안내양은 고작 1800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이마저도 식대나 각종 잡부금을 제외하면 겨우 6,000원 내외를 실질적인 임금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쌀 한 가마의 값은 6320원이었다. 월급 6개월 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야 겨우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버스안내양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조금씩 돈을 숨겼고 그 부수입에 의존하여 가까스로 그들의 삶을 영위했다. 이날 심포지움에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누구나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삥땅은 버스회사로 하여금 버스안내양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했다. 버스안내양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도, 또래 여학생에게 느끼는 열등감도,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추근거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삥땅의심에서 비롯한 가혹행위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직접 승객에게 버스비를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날 번 돈을 입금실에 넣고 수입과 지출을 적은 일보를 차주에게 갖다주는 모든 일은 버스안내양의 몫이었다. 승차감시원의 승객 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 사이에 차이가 나면 그 차액을 버스안내양의 월급에서 차감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심지어는 돈을 숨겼다며 알몸수색을 하기도 했다.

19661019일 동화여객 소속의 버스안내양 권희진은 합숙소 사감으로부터 몸을 수색당했다. 이때 현금 200원이 나왔고 회사는 이를 희진이 훔친 돈으로 여겨 심한 욕설과 매질을 했다. 이튿날 오후 3, 희진은 승객을 태워 시청으로 가던 중 노량진 버스정류장에서 도망쳐 나와 한강에 투신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19781013일 삼화상운 버스안내양 강미숙은 오전 8시경 버스에 타고 근무하던 중 서울시경(서울지방경찰청) 앞 정류장에서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미숙이 자살시도 전에 가족에게 남긴 쪽지에는 회사 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입금액이 적다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이에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미숙은 자살을 시도하기 이틀 전에도 회사 측으로부터 입금액이 적다며 꾸중을 듣고 몸수색을 당했다. 미숙의 동료 안내양들에 따르면 삼화상운은 매일 일과가 끝난 뒤 안내양을 몸수색해왔으며 심지어 운행 도중에도 입금액이 예상보다 적으면 여사감이 방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했다. 자살기도 6일만인 1019, 미숙은 스물 네 살의 나이에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버스안내양에 대한 일상적 몸수색은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번질 만큼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폭력이었다. 전체 버스안내양 중 한 명이라도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모든 버스안내양이 도둑 취급을 당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회사는 도둑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형사를 동원하기도 했다. 196681일 버스 요금이 회수권 제도로 바뀌자 버스회사들은 버스안내양의 호주머니를 찢어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못하게 만들었다.

19771월 부산 연산동 대창운수 버스안내양 기숙사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보통 2평짜리 방에서 9명이 모여 살았는데, 입구 쪽 난로에 붙은 불이 번져 화재로 이어진 것이다. 뒤쪽에 큰 창문이 있었지만 쇠창살이 박혀있어 화마를 피해 탈출할 수 없었다. 기숙사의 창문을 삥땅의 통로로 여겨, 철책으로 막아버렸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 화재로 5명의 버스안내양이 숨졌다.

 

버스안내양의 저항과 사회적 인식

 

이러한 노동환경은 버스안내양들을 다른 직종의 여성노동자보다 일찍 집단행동으로 내몰았다.

1964116일 새벽 2,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있는 삼양여객 소속의 버스안내양 74명이 합숙소를 집단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매질을 일삼는 감독을 해고할 것, 하루 18시간 노동에 일급 50원을 인상할 것, 급식을 충분히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러한 요구에 폭력으로 응수했다. 또한 196675일에는 서울승합 오류지점 소속 버스안내양 27명이 임금 인상과 합숙소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홍성원의 소설 흔들리는 땅에서는 부당한 몸수색과 인권유린에 맞서 투신한 버스안내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걔가 왜 지붕에서 뛰었지? 독해설까, 얼간이였기 때문일까? 남숙이 내건 요구 사항이라는 것들도 그녀가 처음으로 내건 것은 아니다. 몸 뒤짐이 있고, 임금이 낮고, 일이 고되다는 것은 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정되지 않을 것도 백번 뻔한 일인 것이다.”

 

처음 버스안내양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버스가 이전보다 훨씬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가 될 것이며, 유니폼을 깔끔하게 입은 안내원 때문에 청결함마저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61년 이 제도를 시행할 때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어린 여성을 버스안내양으로 두어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공공연한 의도가 개입했음이 확인된다. 사회가 버스안내양에게 여성으로서고정된 성 역할을 기대하고 투영한 것을 의미한다.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사업조합에서 실시한 버스안내양 교육에서 버스안내양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사업조합에서 실시한 버스안내양 교육에서 버스안내양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1974YWCA가 공모한 근로 여성 생활수기에서 특등을 수상한 이명화 버스안내양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 너거 차 몇 호고? 니 이름 뭐꼬, 건방지구나야. (중략) 손님이라 친절하게 그 손님 시키는 대로 운전수의 담배를 하나 얻어서 성냥과 같이 갖다 드렸습니다. …… 손님, 요금 주이소. 이 가시나가 뭐라카노. 아까 전에 차비 안주더나. 눈깔이 빠짓나? …… 순간 나의 뺨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나며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196676일 자 조선일보에서는 버스안내양이 처우개선을 위해 파업한 사건을 두고 여차장들 태업소동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발행했다. 기사에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합숙소를 뛰쳐나오는 등 4시간 동안 법석을 떨었다.”라고 내용이 적혀있다. 버스안내양이 정당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당시 인식의 반영이다. 이러한 인식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버스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한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버스안내양은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을 하기에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교양시간에 초빙된 의사로부터 이것이 근거 없는 소문임을 확인받기 전까지 일반 시민뿐 아니라 버스안내양 자신도 믿었던 소문이었다. 또한 운전사가 버스안내양을 하나씩 데리고 산다는 소문과 버스안내양은 성매매 현장으로 가기 쉽다는 낭설이 퍼졌고, 몸수색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피해자인 버스안내양을 오히려 성적으로 타락한 대상으로 보기도 했다. 승객의 추행은 일상이었으며, 운전수가 버스안내양을 따로 호텔로 불러 성폭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버스안내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하차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생기면서 버스안내양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6‘(안내원의 승무)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 19891230일 삭제되고, 개정된 법령이 199041일 시행되면서 버스안내양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젊은 세대는 버스안내양이란 직업 자체를 모른다. 현대사에 20여 년 존재한 버스안내양이란 직업은 어떤 흔적을 남겼고 어떤 의미로 기록될까. 그들의 가여운 존재가 기억될 수나 있을까.

 

 

 

 

 

 

 

 

 

 

 



황경서 ·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ㆍ문학ㆍ신학 공부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박서윤 ·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다.

 

 

 

 

<참고문헌>

 

1) 권경미, 1970년대 버스 안내양의 재현 방식 연구 소설, 영화, 수기를 중심으로, 어문론집, 53, 중앙어문학회, 2013, 281-307

2) 김정화, [특집] 1960년대 여성노동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11, 역사학연구소, 2002, 81-107

3) 손귀례, 김희용, 일부 대도시 버스 안내양들의 요통 발생에 관한 조사 연구, 군진간호연구, 4, 국군간호사관학교 군건강정책연구소, 1983, 113-132

4) 이명화, YWCA 근로여성 생활수기 특등-희롱의 굴욕도 참으며, 여성동아, 2월호, 1975

5) 홍성원, 흔들리는 땅, 문학과지성사, 1978.

6) 김이정민, “사라진 버스안내양””, <일다>, 2005.04.05.

7) 박종인,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하루 18시간, 승강구서 졸며 "오라이~" 그렇게 산업화시대 滿員버스를 굴렸다”, <조선일보>, 2015.03.27.

8) 유승훈,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7> 오라이, 부산 버스와 안내양”, <국제신문>, 2014.05.07.

9) 유인경, “[100년을 엿보다](19) 버스 차장”, <경향신문>, 2010.03.07.

10) 임미리, “버스안내양, 가혹한 노동과 외로운 저항”, <에큐메니안>, 2015.07.07.

11) 정일선, “[여성칼럼] 버스 안내양의 귀환”, <영남일보>, 2018.12.20.

12) “여차장들 새벽시위”, <조선일보>, 1964.01.17.

13) “여차장들 태업 소동”, <조선일보>, 1966.07.06.

14) “여차장 투신자살”, <중앙일보>, 1966.10.22.

15) “몸수색 비관 안내양 자살”, <중앙일보>, 197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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