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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어느 여공의 죽음, 그리고 그의 삶
유신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어느 여공의 죽음, 그리고 그의 삶
  • 노수빈, 안치용, 신다임
  • 승인 2021.01.16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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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⑫ - 김경숙

 

이 빨갱이년들이

 

경찰은 이날 ‘101호 작전이라고 명명된 강제해산작전을 실시, 여공들을 연행했는데 여공 중 김경숙 양(21)이 왼쪽 팔목의 동맥 절단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신민당 박권흠 대변인 백영기 업무부국장 등 신민당원과 취재중이던 기자 여공 및 경찰관 등 많은 사람이 중경상을 입었다. (하략) .

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 동아일보, 1979.08.11.

 

시경, 김양 사인해명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은 27일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YH사건백서를 발표하면서 김경숙 양 사인에 대해 의혹을 표명한 데 대해 김 양의 사인에 대해서는 이미 현장상황, 부검의사의 감정결과 및 동료 여공들의 증언으로 투신자살했음이 밝혀져 아무런 의혹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발표했다.

투신자살 논란 여지없다, 조선일보, 1979.08.28.

 

그녀의 어머니는 자살할 애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자살할 애기가 아니여. 어째 자살할 애기가 아니냐 하면, 경숙이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죽어도 광주 와서 산다고 했어, 서울은 공기가 안 좋으니까, 돈 벌어서 나는 광주 와서 산다.’고 했어. 그리고 나를 못 잊고 동생을 못 잊어서. 지가 돈 벌어서 시집이라도 잘 가면 동생 잘 가르치고, 저는 살 것다 했는데, 무엇을 자살을 해? 자살할 애기가 아니여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당시 신문보도 - 「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 동아일보, 1979.08.11.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당시 신문보도 - 「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 동아일보, 1979.08.11.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979811일 새벽, 당시 21살이었던 김경숙은 서울시 마포구 신민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되었다. 녹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곧 숨졌다.

경숙은 YH무역의 노동자이자 노조 위원이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여공들과 함께 회사 정상화를 위한 농성을 이끌었다. 경찰은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가 없다고 말했다. 자살이라고 했다. 동맥을 그은 흔적이 손목에 남아있으니 자살이 확실하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경숙이 피투성이로 발견되기 몇 시간 전, 811일 밤은 여느 여름밤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거리에 차량의 경적이 길게 세 번 울렸다. 일명 ‘101호 작전의 신호였다.

작전은 무자비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수백 명의 기동대가 경숙을 포함한 여공 200여명이 농성 중인 신민당 당사 강당에 들이닥쳤다. 기동대는 비명을 지르는 여공들을 이 빨갱이년들이라고 욕하며 곤봉으로 때렸다. 여공 한 명에 네 명씩 달려들어 사지를 잡고 계단으로 끌어내렸다. 여공의 등과 머리가 계단에 부딪히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반항하면 그 자리에서 군홧발로 걷어차고 짓밟아 질질 끌고 내려갔다. 기동대의 무차별 난타에 여공들은 기절했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기동대의 욕설과 구타 소리, 이에 저항하는 여공들의 처절한 외침이 한데 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신들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기동대를 상대하기에 여공들은 무력했다. 폭력적인 강제연행은 30여 분만에 끝났다. 텅 빈 농성장엔 여공들의 해진 신발과 안되면 죽음이다라고 쓰인 머리띠만이 남아있었다.

경숙이 죽은 지 10년이 되던 19899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열사묘역 중턱에 그녀의 가묘가 마련되었다. 경숙의 죽음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당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딸의 죽음에 대해 세상에 큰 소리로 외쳤다. 자살할 애기가 아니라고.

29년이 지나서야 국가는 경숙의 죽음을 경찰의 과잉 진압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확인했다. 20083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의 부검 기록을 재검토했다. “주검에 동맥을 절단한 흔적이 없고,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다. 후두 정부에서는 모서리 진 물체로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가 있다고 발표하여 스스로 동맥을 끊은 자살이 아니라 진압과정의 폭력으로 사망하였음이 밝혀졌다.

어머니의 말대로 경숙은 자살할 애기가 아니었다.

 

노동자, 김경숙

 

경숙은 195865일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에서 태어났다. 밑으로 남동생 둘을 둔 장녀였다. 가난은 태어날 때부터 경숙을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의 어머니는 행상에 나섰다. 경숙은 집안 살림을 하며 두 동생을 돌봤다. 어린 두 동생을 키워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에 이어 두 동생 중 하나가 죽었다. 슬픈 일이었지만 경숙은 뒤늦게라도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6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생업의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경숙은 집 근처에 있던 누에고치 삶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 후 2년을 광주 근처 하청 봉제 공장을 전전하던 경숙은 돈을 두 배나 더 벌 수 있다는 육촌 언니의 말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는 청량리 등지에 있던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 등을 전전하며 주로 재봉사로 일했다. 쉴 새 없이 야근과 철야작업에 시달렸지만 기대만큼 돈을 벌지 못했다. 경숙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월급이 밀릴 정도로 영세한 곳이거나 아니면 운영이 어려워 폐업하는 회사들이었기 때문이다.

 

YH무역에 입사하다

김경숙 열사 사원증
김경숙 열사 사원증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19768월 경숙은 YH무역에 입사했다. 한때 수출순위 15위까지 올랐던 4,0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큰 회사에 취직했으니 이제 회사 문 닫을 걱정은 접어두고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닭장 같던 영세공장의 기숙사와 달리 주식회사의 기숙사는 어머니와 동생에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경숙의 마음은 자랑스러운 딸로서 어머니와 동생을 기쁘게 해주리라는 다짐으로 가득 찼다.

경숙은 공장장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재봉틀을 밟았다. 잔업도 특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전과 달리 일한 만큼 대가를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듬해인 1977YH무역 사내에 사업체 학교인 녹지중학교가 설립되었다. 노동조합이 주도해 문을 연 녹지중학교는 많은 여공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8명의 지도교사가 있는 학교의 수업이라야 하루 두 시간에 불과했지만, 배움에 목말라 있던 경숙에게 그곳은 너무도 소중했다. 경숙은 그해 610일 녹지중학교에 1기로 입학했다.

여러 공장을 전전한 예전과 달리, 안정적이며 배움을 향한 갈증까지 해소할 수 있는 일자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경숙이 바랐던 생활은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녹지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회사에 휴업과 인원 감축의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다.

19776월 회사는 마침내 첫 휴업을 시도한다. 회사는 가발 제품을 만들던 여공들을 봉제과로 밀어 넣어 실밥 따기와 단추 달기 등 전혀 손에 익지 않은 작업을 시켰다. 불안정한 작업 분위기를 조성한 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표를 내게 하려는 속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휴업에 이어 회사는 숨 돌릴 틈 없이 인원 감축에 들어갔다. 6월에 여공 77명을 감원한 회사는 7205, 891, 923명의 여공을 회사 밖으로 내몰았다.

회사 측은 사양길에 접어든 가발 부서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린 부득이한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경숙은 갑작스레 단행된 휴업과 감원으로 동료들이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는 것을 목격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는 더욱 강경한 조치를 감행했다. 기숙사에 숙식하는 여공들을 내쫓기 시작했고 공장을 이전한다며 기존의 가발 부서를 폐지하다시피 했다. 게다가 이전된 공장으로 옮겨가지 않는 노동자는 해고하겠다며 강압적으로 사표를 내게 했다. 막무가내 조치에 많은 여공이 분노했다. 특히 작업 조장을 맡은 언니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회사의 부당한 조치를 월권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노조를 없애려는 회사의 온갖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노동에 대한 경숙의 인식도 차츰 변화해갔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 임금을 착취시키기[착취하기] 위해 휴가를 주며 자진 사태[사퇴](종용)할 때 내 마음은 아팠다. 이런 일이 있지 않도록 토론을 하며 싸워야 한다. 개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뭉쳐서 인원 감소를 막고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 (공장)이전 관계로 (어수선 했던) 마음의 안전[안정]을 오늘의 이 시간을 이용하여 찾았다. ‘본 공장을 돌려라 고용 완전 찾자.’ 단결. 권리. 뭉침. 싸움. 비평.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

-197852일 김경숙의 일기 .

 

노동조합원이 되다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쓴 김경숙 일기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쓴 김경숙 일기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이듬해인 19783월에 1년 과정인 녹지중학교를 이수한 경숙은 노동조합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반년이 넘게 휴업과 감원을 되풀이하던 회사도 차츰 조용해졌다. 경숙은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과 사회를 배웠다. ‘공순이 잔칫날이라고도 부르는 대의원 하계수련회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협동심을 다지기도 했다. 모르는 남자와 펜팔을 주고받으며 설레다가 직접 만나보고는 실망하는, 그 나이다운 평범한 경험도 했다.

1979330일에 경숙의 삶을 변화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한 달 뒤인 430일에 경영부실을 이유로 회사가 폐업한다는 공고가 붙은 것이다. 당시 회장 장용호가 초창기에 벌어들인 막대한 돈을 미국의 백화점에 투자하거나 해운회사를 설립하는 데에 사용하는 등 무리하게 자금을 운영한 결과였다. 석유파동이 불러온 세계적 공황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이미 1978년에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감축해버린 상태에서, 심각한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일방적으로 폐업을 선언한 것이다.

공장은 발칵 뒤집혔다. 노동조합은 회사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경숙도 조합원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농성에 참여했다. 노조는 거래은행인 조흥은행과 노동부를 찾아가 회장 장용호가 미국으로 빼돌린 돈을 회수해 공장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호소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공장을 가동했다. 하지만 어떤 은행도, 어떤 정부 관리도 돕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좌경적인 불순한 의도로 간주하고 오히려 경찰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결국 자치 경영 두 달 만인 86일 회사는 2차 폐업공고를 붙였다.

 

최후의 선택, 신민당 농성

 

노조는 폐업에 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회사에 전했다. 조합원들은 폐쇄된 작업장 대신 기숙사에서 농성을 이어갔다. 경숙은 혈서 쓰기를 감행할 정도로 비장하게 농성에 임했다. 단전, 단수와 같은 회사 측의 방해 공작에도 노조는 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공장에서 농성할 수 없다면 다른 장소에서 투쟁을 이어나가면 되었다. 노조는 김영삼이 총재인 야당 신민당에 도움을 구했고 농성 장소를 신민당 당사로 옮기기로 했다.

197989일 새벽 5. 팀장을 맡은 경숙은 200여 명의 조합원 중 가장 선봉에 섰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공장을 빠져나온 조합원들은 신민당 당사 4층 강당으로 향했다. 농성 장소를 옮긴 조합원들은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다라고 쓰인 머리띠를 꺼내 두른 뒤 준비해 온 플래카드를 농성장 앞 벽에 붙였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야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김영삼 총재와 박한상 국회의원 등 여러 방문객이 줄을 잇고 취재진이 몰려왔지만, 회사 정상화의 꿈은 점점 묘연해졌다. 당사를 방문한 신민당 관계자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보사부 장관이나 노동청장은 당사에 찾아오지도 않았으며 정보과 형사들과 경찰서 서장들은 해산을 종용했다.

810일에 노조 위원들은 최종 종결 대회를 개최했다. 부지부장의 호소문에 동료들이 오열했다. 경숙은 그들을 북돋기 위해 결의문을 읽어 내려갔다.

 

우리의 결의

거리에 내쫓겨 올 데 갈 데 없는 우리들은 이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우리 300여명의 근로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조흥은행은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은행관리 기업으로 인수하라.

관계부처는 이 문제를 더 이상 지연시키지 말고 즉각 해결하라.

정부당국은 장용호를 즉각 소환시켜라.

우리의 정당하고도 정의로운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으며 어떠한 죽음도 불사할 것을 엄숙히 결의한다.

1979.08.10. YH무역 전 근로자 일동

 

결의문 낭독에 이어 사무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종결 대회가 막을 내렸다. 시간은 벌써 자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종결 대회와 함께 흥분한 조합원 몇 사람이 울음을 터트리며 음료수병을 깨 들고 강당 창가로 몰려갔다. 농성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숙 역시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통제가 마비된 농성장이 겨우 진정되고 동료들을 잠자리로 돌려보낸 경숙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정이 넘은 서울을 바라봤다. 서울의 밤은 고요했다. 그러나 고요는 곧이어 울려 퍼진 경적에 완전히 깨졌다.

경찰의 강제해산 작전 과정에서 YH노조 여성노동자들이 끌려 나오고 있는 장면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경찰의 강제해산 작전 과정에서 YH노조 여성노동자들이 끌려 나오고 있는 장면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이 빨갱이 년들이

 

811일 새벽, 기동대의 무자비한 폭력 해산이 시작되었다. 전화기가 부서지고 철제의자와 커피잔들이 공중에 날아다녔다. ‘101호 작전30여 분 만에 신민당 당사를 피로 물들였다. 회사가 정상이 되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리라 다짐했던 21살 청년 경숙의 삶도 그렇게 저물었다.

 

산업전사’, ‘공순이

 

기실 여성은 궁녀기생으로 산파의녀로 객주의 주모’, ‘침모’, ‘유모등으로 예전부터 경제사회의 구성원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전화 교환수로 수천 명이 활동했고, 교원, 의사, 기자, 보모, 간호사, 아나운서 등으로 살아왔다. 여성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일터를 떠난 적이 없었다.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나이가 많든 어리든 여성 대부분은 공장 이외의 장소에서 끊임없는 노동에 종사했지만,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산업화는 여성에게 임금노동자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사정권의 국가 주도 경제개발에 따라 1960년대 이후 한국은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였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 한국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근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자립경제의 근간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노동자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산업의 근간, 자립경제와 국가 경쟁력을 갖추는 중화학 공업의 발전이 대부분 여성의 노동력으로 일군 수공업과 경공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종종 생략되곤 했다.

임금노동자로서 가정이 아닌 공장이라는 노동의 세계에 뛰어든, 경숙과 같은 어린 여성은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주역의 하나였음에도 폄하되기 일쑤였다. 산업화는 여성의 노동을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해주었으나 여성 노동자, ‘여공은 이중적 억압을 경험하며 딜레마에 처했다. 그것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야욕이 불러온 위험의 개인화’, 즉 국가의 과도한 노동 착취라는 억압과 군사정권의 남성 중심적 지배체계가 생산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라는 억압 속에서 노동자이자 여성으로서 여공이 겪어야 했던 혼란을 말한다.

따라서 여공을 지칭하는 대표적 표현인 산업 전사공순이라는 명명은 그 자체로 이질적인 가치 기준의 소산이었다. 근대화라는 구호 아래 여공은 국가발전의 촉매라는 자긍심을 바탕으로 산업역군, 산업 전사로서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천대를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산업 전사라는 명명은 말을 듣지 않으면 한순간에 빨갱이가 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허위였다. 여공은 성 판매 여성과 때로는 상반된 존재로, 때로는 동일한 존재로 치부되었다. ‘가족과 국가의 유순한 딸로서 가정을 위해 당연히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감내해야 하지만, ‘여성스럽지 못한돈에 대한 욕망으로 오염된 존재, 즉 언제든지 사회의 불온세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한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공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이들이 노동자로서 인정받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로 인해 노동자로서 인정받기 위해 성적 차이를 부정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했다.

이처럼 산업화 시기 여공에 관한 담론은 그야말로 모순으로 엉클어져 있었다. 여공은 국가발전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노동자이면서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생산하는 여자다움을 강요받는 존재였다. 동시에 여성의 정체성을 부정해야만 남성과 같은 보편적 노동자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공순이치곤 똑똑하다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남성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했다. 노동 현장에서의 성추행, 성희롱과 같은 성폭력은 일상이었다.

여공에 관한 모순된 담론들은 여성 노동=저임금이란 공식을 정당화했다. 가장의 역할을 맡은 여공이 많았던 현실과 달리, 남성의 생계 임금을 통해 가족이 부양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작동했다. 따라서 여공의 임금은 보조적이며, 낮아야 했다. 더불어 산업화 시기 대부분의 노동자가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내한 잔업역시 저임금과 쌍을 이루며 여성의 노동을 규정했다. 수출 일자를 맞추기 위해 계속되는 야간작업과 철야 근무의 고됨을 토로한 경숙의 일기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여공은 저임금을 받으면서 생계를 위해 힘든 육체노동을 감내했다.

 

거울을 바라보니 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이 부어 7시까지 일하고 아침을 먹고 또 근무를 하였다. 나의 몸은 지치고 지쳐 비틀대며 숙소로 돌아와 밥을 먹는데 밥이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근무하여(후략)

-1978316. 김경숙의 일기

 

여성노조

 

혀끝으로만 움직일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서 비춰봐야 한다.

-197931, 김경숙 일기

YH노조원들의 모습
YH노조원들의 모습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경숙은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적어 놓은 지 두 어 달이 지난 후부터 일기를 쓰지 않았다. 노조 대의원 활동이 바빠졌을 수 있고, 폐업과 폐업 철회를 반복하는 회사와 협상하느라 일기를 쓸 틈이 없었을 수 있다. 어쨌든 경숙은 일기를 중단했고 이후 다시 쓴 일기에서 이와 같은 비장하고 단단한 마음을 드러냈다.

회사의 부조리한 조치에 경숙 등의 여성 노동자들이 결연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YH무역 여공들의 자발적 단결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 관한 배타적 시선은 한국 사회에서 유구하게 존재했다. 산업화 시기 노조에 대한 사유방식 역시 그러했다. 국가 및 고용주의 관점에서 노조는 비생산적이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이며, ‘빨갱이들이 사주하는 단체였다. 노조는 국가의 지침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 때만 인정될 수 있었다. 고용주의 사유방식 안에서 노조는 고려될 수 없는 것이었다. 노조에 대한 노동자의 인식이 확산되고 사업장 내부 힘의 관계가 변화해 현실적으로 고용주가 노조 자체를 부정할 순 없게 되었음에도 노조에 관한 부정적 담론은 쉽게 헤게모니를 잃지 않았다.

이처럼 노조가 사회적으로 질병 취급을 받던 당시 여성들이 노조를 형성하고 활동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의 노조는 남성 중심으로 구성과 운영이 이루어졌고 여성의 노조 참여는 은밀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다수 노동자의 성별이 여성이었음에도 이들을 대표하는 집행부는 남성으로 꾸려져 있었으며, 여성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대표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경숙이 노동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에, 여성 집행부를 탄생시켜 투쟁한 동일방직 노조가 있었다. 1972년 동일방직의 조합원은 1,383명이었고 이중 여성 조합원이 1,214명이었지만 그때까지 노조 지부장은 예외 없이 남성이었다. 실제 노조 내 여성의 역할과 위치는 미미했다. 그러다 1972510일 한국노총 역사상 최초로 여성지부장이 당선되었다. 여성 노조 집행부는 회사 측과 교섭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19762월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존 여성 집행부를 와해시키려는 남성 노동자의 방해와 노조 지부장 이영숙을 연행한 경찰의 합작으로 위기를 맞는다. 이에 맞서 항의 농성을 전개한 여공들은 모두 웃통을 벗어 반나체 상태로 경찰과 회사 간부들에 맞섰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노조 총무부장이던 이총각이 지부장이 되는 것으로 여성 집행부를 지켜냈다.

1975년 5월 24일. YH노동조합 결성식
1975년 5월 24일. YH노동조합 결성식 /  ‘YH노동조합과 김경숙 열사’, 한국여성노동자회, 2014.09.29. (유튜브 캡쳐)

 

YH무역에서의 여성 노조 결성 역시 순탄치 않았다. 이들은 1975년에만 세 차례의 실패를 겪었다. 노조가 결성되더라도 노조를 어용화하려는 시도, 회사로부터 거액의 금품을 받고 주동자를 밀고해서 부당해고하고 어용노조를 만드는 이른바 조합 팔아먹기등 내부갈등에 의해 온전한 노조로서 존재하기 어려웠다. 세 차례의 실패 과정에서 주동 노동자들은 해고, 좌천, 출장, 부서이동을 당했다. 회사 측은 보복 조치로 현장에서 잔업 연장, 활동적인 노동자 미행, 공장 외부 모임 적발, 기숙사생 외출 금지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YH 노조는 세 차례의 실패 이후 19755월 마지막 시도에서 노조 결성에 성공하였다.

 

죽음의 의미

 

경숙의 죽음으로 끝난 ‘YH무역 노조 신민당사 농성이후 박정희 정권은 당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을 단행한다.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강압책과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 등이 촉발한 갈등 상황에서 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 조치로 유신 정국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197910월 발생한 부마 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모순이 민중항쟁으로 폭발한 일면이다. 이는 정권의 내부분열을 일으켜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한 1026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로써 유신체제는 종언을 맞이했다.

박정희가 죽은 것은 YH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만이었다. 힘없는 여공들의 눈물과 경숙의 죽음은 18년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의 봄을 부르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경숙은 죽기 4일 전에 고향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보고싶은 엄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 많은 회장은 미국으로 도망가고 없고 사장들은 자기들만 잘 살겠다며 지금 우리 근로자들을 버렸습니다. 회사 문을 닫겠다며 폐업공고까지 내버렸답니다. 그러나 저희 근로자들은 비록 힘은 약하나 하나같이 똘똘 뭉쳐 투쟁하고 있습니다. (중략) 보고싶은 엄마. 우리들을 버리고 도망간 사장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장용호처럼 모든 사장들은 자기만 잘살면 돈 없는 우리들쯤이야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요? 하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착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정의롭게 살아야 하고요. 그래야 저 나쁜 사장들과 다를 테니까요. (후략) 197987일 서울에서 경숙 올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정의롭게 살고자 했던 한 여성의 소박한 꿈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무책임한 기업주와 성장이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군사정권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경숙의 삶과 죽음은 산업화 시기 희생을 강요받고 천대를 감내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아픔을 상징한다. 또한 여성의 노동을 폄하하는 모순된 담론 속에서도 불합리를 비판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으려던 그들의 꿋꿋한 의지를 표상한다.

 

 

 

 

 

 

 

 

 

 

 

 

노수빈ㆍ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신다임ㆍ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원, 여공1970 그녀들의 역사, 이매진, 2005.09.30.

박영희, 김경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12.29.

 

논문

김문정,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 수기와 그녀들의 이름 찾기, 한국학연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8.05.

박혜영, 박금식, 산업시대의 여성 그 많던 여공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젠더와문화, 계명대학교 여성학연구소, 2015.06.

안지영, 여공의 대표 ()가능성과 민주주의의 임계점 1970, 19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수기를 중심으로, 상허학보, 상허학회, 2019.02.

 

기사

심야의 기습, 울부짖은 여공들, 동아일보, 1979.08.11.

투신자살 논란 여지없다, 조선일보, 1979.08.28.

YH노조 간부 김경숙씨 10주기 맞아 추모비 건립, 한겨레, 1989.08.27.

 

기타

안재성, YH사건 - 여공들,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2016.01.19.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5

정영훈, 세상이 다 알았던 죽음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죽음 김경숙 일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2017.11.02.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181

함세웅, 열아홉 살 여성 노동자 김경숙의 일기장, 희망세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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