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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막, 영어, 그리고 <늑대와 춤을>
[송영애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막, 영어, 그리고 <늑대와 춤을>
  • 송영애(영화평론가)
  • 승인 2021.01.18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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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막의 역할과 역사

영화에서 자막은 여러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엔 캐스트와 스태프 등 영화 제작에 참여한 이들을 소개하고, 영화 중간중간엔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언제인지, 이 사람이 누구인지 등등을 간략하게 알려준다.

자막은 영화 탄생 직후부터 활용됐다. 무성영화 시기엔 영상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정보들을 자막이 전달했다. 상황 설명과 인물의 대사가 커트와 커트 사이 ‘간 자막’ 커트에 담겼다. 영화관에서는 글을 모르는 관객을 위해 변사(해설자)가 자막을 읽어주기도(연기하기도) 했다.

유성영화 시기가 온 뒤에도 자막은 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조지 루카스, 1977)나 <블레이드 러너>(리들리 스콧, 1982)의 경우, 영화 시작과 함께 기나긴 자막이 웅장한 음악을 배경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미래 혹은 과거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해주는 자막인데, 제대로 읽지 않았다가는 영화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룬 영화의 경우, 종종 영화 마지막에 자막을 통해 영화 내용 이후의 정보를 알려 준다. ‘이후에 이렇게 됐다.’ 식으로. 누군가에게 영화를 바친다거나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자막도 가끔 만나게 된다. 이 영화 속 인물이나 사건이 실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자막도 그렇고.

자막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길게 꺼낸 이유는 <늑대와 춤을>(케빈 코스트너, 1990) 때문이다. 국내에서 30년 만에 재개봉한 이 영화가 자막에 대한 생각을 소환시켰다. 더 정확하게는 영화 속 언어, 영어에 대한 생각이라 하겠다.

 

'한겨레 신문' 1991년 3월 29일 12면 광고

- 자막이란 장벽

한국 관객에게 영화 자막은 장벽이 아니다. 한국 관객은 앞서 나열한 자막뿐만 아니라, 외국어 영화를 보는 동시에 읽어야 하는 자막에도 익숙하다. 감상하는 영화 중 상당수가 외국어 영화(대부분 영어 영화)이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번역된 대사 자막을 읽는 훈련을 하게 된다. 더빙 영화보다는 자막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물론 모든 관객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읽어야 하는 자막에 익숙한 건 아니다. 작년 1월에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2019)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자막이라는 1인치 정도의 장벽을 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소감을 남겨 화제가 됐었다.

 

자국 영화 즉 영어 영화를 주로 보는 미국 관객이 자막이 있는 비영어 영화를 선택한다는 건 모험에 가깝다. 그런 영화가 대규모로 개봉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보니, 선택을 위한 고민을 할 필요조차 별로 없다.

 

- ‘사실성’보단 영어

미국 영화에서는 현실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상한 상황에서도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성경 속 이야기를 다루는 이집트, 이스라엘 배경 영화든, 중국인이 주인공인 중국 배경 영화든 영어를 쓴다. 사실성 보다는 영어를 선택하는 셈이다.

물론 정답은 없다. 극영화에서 요구되는 사실성이 그럴듯한 수준의 사실성이기 때문이다. 미국 관객들은 자막 영화를 피할 테고, 해외 관객들은 어차피 자신들의 언어로 자막 영화나 더빙 영화로 보게 될 테니, 더더욱 선택의 문제다. 만드는 과정에서도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고, 훈련 안 된 관객들의 저항도 예상되니, 쉽게 바뀔 문제도 아니다.

 

- 자막을 선택한 <늑대와 춤을>

30년 전 <늑대와 춤을>은 영어 대신 자막을 선택했다. 요즘도 흔치 않은 일이니, 그땐 더더욱 신선한 시도로 평가됐다. 영화에서 상당 시간 영어 대신 인디언 수우 족의 언어가 등장하면서, 영어 자막이 등장했다.

1863년 남북전쟁의 한복판에서 의도치 않게 영웅이 된 북군 중위 존 던바는 다음 부임지로 서부 국경지대 세즈윅 요새를 선택한다. 당시 서부 국경지대는 인디언들과 대치 중인 지역이었다. 모두가 탈영해 텅 비어있는 요새에서 존 던바는 서서히 사라지게 될 즉 백인들에 의해 개척(파괴)될 지역에서 일종의 자연인 생활을 시작한다. 간혹 늑대가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그러다 던바는 수우 족을 만나게 된다. 처음엔 긴장 상황도 벌어지지만, 그들은 공존하게 된다. 보통 대개의 미국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현지인 중 영어를 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주인공은 그 사람을 통해 소통한다. 현지 언어는 자막 처리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서사 진행에 아무 상관이 없으니, 그들의 말은 그저 효과음 정도로 활용됐다.

<늑대와의 춤을>에서도 처음엔 ‘주먹 쥐고 일어서’가 어눌하게나마 통역을 했지만, 던바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오히려 영어가 사라지고 자막이 나타난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수우 족 식 이름도 갖게 된 던바는 점차 수우 족에게 동화되기 시작한다. 나중엔 ‘주먹 쥐고 일어서’와 결혼도 한다.

 

- '인디언 입장의 인도주의적 영화'

영화에서 대사는 내용 전달뿐만 아니라 영화의 입장 혹은 태도도 드러낸다. 사실성과 상관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 영화에서 미국 중심적 입장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수우 족의 언어를 선택한 <늑대와 춤을>은 개봉 당시 ‘인디언 입장의 영화’, ‘인도주의적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분명 이전 서부 배경 영화들과 달랐다.

<늑대와 춤을>에서는 금발 백인 여성을 납치하는 잔혹한 인디언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수우 족은 온순하고, 현명하다. 던바가 그들에게 동화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그려진다. 영화의 마지막에 미국 군인들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늑대와의 춤을’은 던바 중위로 돌아가지 않는다.

관객들은 미국 군인을 정복자나 개척자가 아니라 침략자로 바라보게 된다. 이 또한 시존 서부 영화와는 매우 다른 지점이다.

 

- 여전한 한계

물론 한계도 발견된다. 이 영화에서 포니 족은 수우 족도 두려워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잔혹한 부족으로 등장한다. 삶의 터전이 침략당한 상황에서 강력하게 대항하는 모습이 부정적으로 그려진 것은 백인 중심적 시선이 남아있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강력하게 대항하면 나쁘고, 약하게 대항하거나 대항하지 않으면 착하다고 편을 가른 것이기도 하다.

당사자들이 아니면 구분하기 어렵겠지만, 의상과 소품 등에서 고증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한 ‘주먹 쥐고 일어서’를 어릴 적 가족을 잃고 수우 족 손에 자란 백인 여성으로 설정해 다른 인종 간의 맺어짐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지만 영어가 사라지고 자막과 착한 인디언이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늑대와 춤을>은 분명 변화된 시선이 담긴 영화였다. 

 

- 국내 개봉 30주년 기념 재개봉 

리마스터링 버전이 재개봉 됐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1860년대 미국 상황, 인디언 등 낯설기는 마찬가지지만, 역사와 인간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이 미국 영화의 변화도 발견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누구 편을 들게 되는지 나 자신을 느껴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영애

영화평론가. 서일대학교 영화방송공연예술학과 교수. 한국영화 역사와 문화 관련 연구를 지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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