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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틴 에덴>과 네오리얼리즘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마틴 에덴>과 네오리얼리즘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2.01 09:5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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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에덴>은 1909년 발표된 잭 런던의 자전적 소설을 오클랜드에서 나폴리라는 공간으로 옮겨와 만든 영화이다. 선원이었던 마틴 에덴은 우연히 만난 부르주아 여성(소설에서는 루스, 영화에서는 엘레나)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들을 가두어 놓고 결코 부숴지지 않는 두 세계의 견고한 벽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잭 런던이 당시 미국의 부르주아들에게서 느꼈던 허영과 그들이 세상에 짓고 있는 견고한 경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어 혼돈과 빈곤 속에 있던 이탈리아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왜 전후의 이탈리아인가?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잭 런던의 <마틴 에덴>이 파시즘과 나치즘의 도래에 대한 예언처럼 읽혔다고 말한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휩쓸고 지나간 이탈리아에서 마틴 에덴이 다시 되살아나야 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도 마틴 에덴이라는 인물은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파시즘들 속에서 다시 되살아나고 다시 파멸한다.

 

<마틴 에덴>과 <유럽 51년>

마틴 에덴이 전후의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러 이름들을 불러내게 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루키노 비스콘티…….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들은 전쟁 가운데에서는 전쟁의 참상을 담아내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 혼란과 비참함을 담아내었던 사람들이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마틴 에덴>은 그 시기로 돌아가 그들이 보여주었던 사회의 분위기를 재현한다. 특히 <마틴 에덴>의 한 장면은 로셀리니의 1951년 영화 <유럽 51년>과 아주 닮아있다.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이 그의 연인 엘레나 오시니(제시카 크레시)를 빈민가로 데려가는 장면이다. 엘레나에게 당신처럼 되고 싶다고,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다고 말하던 마틴의 절망과 좌절이 그녀를 길거리로 데려간다. 그녀는 빈민가 골목을 마틴에게 이끌려 다니면서 두려워하고 외면하고 마틴에게 안전한 그녀의 집으로 다시 데려다주기를 간청한다. 그녀는 마틴을 사랑하고 그에게 문법을 가르쳐줄 수 있지만 마틴이 살아가고 있는 그 세계로 발을 내딛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유럽 51년>의 주인공 이레네(잉그리드 버그만)는 다르다.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그녀는 전쟁 중 태어난 불안정한 아들이 투신하여 죽자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아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녀는 코뮤니스트인 친구를 따라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녀는 한 여인을 도우러 공장에 갔다가 인간을 압도하는 공장의 거대한 기계들과 굉음들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빈민가 근처 강가에 떠내려 오는 시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순진한 아이들의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세계에 자신을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이레네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나 어떤 당위들을 표현하고 있는 말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레네는 걷고 목격하고 그 장소에 놓일 뿐이다. 이후 이레네는 자신의 남편에게서 계속해서 코뮤니스트인 친구와의 불륜을 의심받으면서도 빈민가 사람들을 돕기를 멈추지 않는다. 남편은 계속해서 이레네에게 이유를 묻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결국 영화의 끝자락에서 이레네는 남편과 어머니에게 이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그녀는 정신병원에서도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남편이 다시 데리러 왔을 때도 숙명처럼 그들 곁에 남아있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코뮤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인가? 수녀가 되고 싶은 것인가? 영화 속에서 재판관은 묻지만, 사실 그녀는 무언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 이유는 그녀 스스로도 끝까지 설명할 수 없다.

 

그녀가 마주한 것

질 들뢰즈는 이레네가 마주한 이미지들, 걷고 목격하고 그 자신이 그 안에 놓이게 된 이미지들이 돌연히 출현하고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이미지들이라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말들, 행동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들을 갑작스럽게 멈추고 돌연히 출현하는 것이 바로 공장의 이미지들이고 빈민가 옆 강가의 이미지들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들이 우리를 견자(voyant)로 만든다고 말한다. 랭보가 말한 것처럼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 그래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세계 안의 어떤 참을 수 없는 것에 의해 충격을 받고, 사유 안에 존재하는 사유할 수 없는 것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견자가 된다. 이레네가 마주한 것은 그런 우리의 사유에 충격을 가하는 이미지였다. 그녀는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참아지지 않는 이미지들을 마주하고 견자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세계의 언어로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규정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된 이유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마틴 에덴>에서도 그러한 이미지들을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늘 그런 세계 속에서 살아온 마틴에게서가 아니라, 마틴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마틴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되는 엘레나에게서이다. 마틴이 엘레나의 집에서 처음 그랬던 것처럼 엘레나는 완전히 낯선 이미지들에 휩싸인다. 그러나 엘레나는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틴은 엘레나의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지식을 배우고 그 세계의 '무언가'가 되려고 했지만, 그녀는 두려워했고 망설였고 외면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

마틴과 엘레나가 처음 그녀의 집에서 만났을 때 그는 유화 작품을 보며 말한다. ‘멀리서 보면 멋진데 가까이서 보니 죄다 얼룩이네요.’ 윌리엄 터너의 그림처럼 풍랑에 휩쓸린 배를 보면서 마틴이 하는 이 말은 그와 그녀가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보여준다. 엘레나는 얼룩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마틴이 자신과 함께 세계를 봐주기를 바라지만, 마틴은 늘 ‘엘레나는 잘 모르는’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된다. 마틴은 엘레나와 함께라면 멀찌감치 서서 보고 싶지만, 결코 눈에서 어른거리는 얼룩들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들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 빗속에서 언제고 부러져버릴 듯한 작고 아름다운 우산 속에서만 지켜질 수 있는 것일 뿐, 우산은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그들에게는 더 이상 함께 설 수 있는 세계도, 함께 넘어갈 저편의 세계도 없다. 마틴은 작가가 되어 엘레나가 살고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작가 마틴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틴은 사람들에게 찬사를 얻는 자신을 그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엘레나가 찾는 것도 바로 그 자이다. 마틴은 그래서 그녀가 너무 늦게 찾아왔을 때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님에 절망한다. 그들은 그렇게 부숴지지 않는 두 세계의 견고한 벽 앞에서 무너진다. 그리고 그들의 파멸은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21세기의 우리를 다시 이미지들 앞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한 이미지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견자가 되기로 결심할 것인가.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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