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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은 혈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 영화 <초미의 관심사>
[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족은 혈연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 영화 <초미의 관심사>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02.15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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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을 정의할 때 가장 앞에 놓이는 것은 ‘혈연’이라는 끈이다. 부부를 중심으로 그들이 낳은 자식들로 꾸려진 집단이라는 가족의 사전적 정의는 가족이 혈연 없이는 구성 불가능한 집단이라는 것을 말해주며 이는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범주에 꽤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 그래서 별것 아닌 듯 보이는 혈연이라는 고리가 생각보다 많은 고정관념을 생산하는 위험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먼저 혈연이 아니라면 가족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배타적 범주의 형성, 혈연을 타고난 이들 사이는 결코 적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믿음, 그렇기에 피가 섞이지 않은 이보다는 그래도 혈연이 나을 것이라는 선택적 호의의 당위 등. 그러나 혈연, 사실상 어떠한 필연성 없이 우연으로 점철된 이 관계가 왜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옹호를 받아야 하는지 종종 의문이 앞선다.

엄밀히 말해 이 의문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영화들을 거치면서 쌓아간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아이의 존재도 모르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위험을 무릅쓴다거나, 망나니처럼 살며 아이를 학대에 가깝게 방치했던 이가 아이의 한마디나 눈물에 갑작스레 각성하고, 평생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만 내뱉다가 갑작스레 화해하고 서로를 위해 눈물 흘리는 것이 모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해결책을 내밀었던 까닭이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미움이나 결국에는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는 모든 것을 봉합할 수 있고, 결국 우주에서까지 가족의 사랑이라는 틀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15년 전 얼토당토 않는 관계 속에서도 가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가족의 탄생>이 등장했었음에도 한국영화에서의 가족은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이유, 그리고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퇴행적 키워드였다.

 

물론 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것까진 없다. 가족이니 그렇게 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을뿐더러, 과도하게 강요되는 혈연의 끈끈함이 서사의 개연성을 무너뜨리고 결말의 눈물샘을 작위적으로 자극한다 해도 웃음과 눈물을 한꺼번에 가져오는 이 방식이 오랫동안 성공했으니 안일하게 반복한 것뿐이라고 넘겨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을 혈연 관계만으로 묶어대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후적으루 구성될 수 있는 수많은 가족들을 부정한다는 데에 있다. 즉 누군가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함께하며 마음을 나누고, 결국에는 서로를 가장 잘 알아가는 집단으로서 구성되는 여러 가족들이 존재할 수 있음에도 ‘그래도 물보다는 피’라는 명제 아래 이 관계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따지고 보면 가족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태어난 그 순간 이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족은 태어남 자체로 마치 그 어떤 관계보다 끈끈한 것처럼 이상한 특권을 지니지만 많은 영화들 역시 이 정의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가족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이 가족으로 불리기 위해 적어도 서로를 이해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혈연의 얽힘 만으로 가족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가족은 태어나는 것으로 당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개체들의 조합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미의 관심사>가 그리는 가족의 모습은 흥미롭다. 이 작품은 한 가족이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서로를 알아가도록, 오히려 떨어져 있던 혈연이 조금은 가까워지도록 만들어주는 과정을 그린다. 그리고 그렇게 뭉쳐놓은 가족도 ‘이상적’이라 불리는 가족과는 거리가 멀다. 가족의 정의를 역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이태원이라는 공간과 엄마와 딸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가족의 형성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회복될 수도 있는, 그만큼 파편화되어 있고 분명한 역할이 결정되지 않은 흔들리는 집단으로 그려낸다. 오랫동안 엄마(조민수)와 연락이 끊겼던 순덕(김은영)은 갑작스레 찾아와 자신의 돈을 들고 사라진 둘째 딸 유리(최지수)를 함께 찾자는 엄마의 제안이 기막히기만 하다. 그러나 유리가 자신의 돈까지도 가지고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은 유리의 흔적을 쫓기 시작한다.

 

엄마와 순덕은 끊임없이 티격대지만 이 관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딸과 엄마의 역할이나 태도 등은 읽어낼 수 없다. 순덕은 엄마와 함께 살 수 없어 중1 때 집을 나오며 엄마에 대한 미움을 쌓았고, 엄마는 순덕이 유리를 책임진다며 데리고 나간 후 벌어진 이 상황들이 어이없다. 사사건건 부딪치며 엄마에게 상처 될 말만 골라대는 순덕이나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엄마의 행동은 두 사람이 도저히 봉합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매우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잠시 서로에게 안쓰러운 감정이 생기더라도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으며 설사 표현한다 해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일 뿐이다.

엄마와 순덕의 관계는 혈연이라는 생물학적인 얽힘만으로 가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에게 짐이었고, 상처였으며, 오랫동안 차라리 없는 것이 속 편한 관계였다. 이런 두 사람이 유리를 찾으며 만났던 이들은 평소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천천히 설명해준다. 이때 영화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하면서 두 사람을 봉합해주는 이들을 ‘일반적인’ 가족의 바운더리에 쉽게 들지 못할 이들로 설정한다. 엄마가 옛날부터 알던 친구는 트렌스젠더이고, 외형이 흑인에 가까운 정복은 분명 한국인이며, 유리의 남자친구로 오해받았던 마이클은 크로스드레서로 바에서 노래를 한다. 유리가 아르바이트를 했다던 타투샵의 여종업원은 미혼모이며 타투샵 사장은 게이이다. 이들은 두 모녀에게 유리에 대해 알려주면서 한편으로는 모녀가, 또 유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서로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유리의 애인인 선우가 여자로 밝혀지면서 모녀는 딸 유리가 레즈비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순덕은 말한다. 왜 놀라워? 그리고 엄마는 대답한다. 아니…….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모녀가 날을 세우는 것과 다르게 이들은 너무도 편안하게 서로의 상황을 받아들인다. 서로를 보고 놀라지 않으며 특별하게 물어보지도 않는다.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고 해도, 혹은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그들은 서로를 잊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모녀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별하게 조언을 건네거나 직접적으로 화해를 돕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을 대하는 모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들이 놓인 상황에서 자신이 과거를 읽기도 한다. 이 과정들은 그들이 유독 혈연관계인 서로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한다. <초미의 관심사>는 가족이라면 핏줄이라면 당연한 듯 설정한 관계가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소수자의 설정들은 그들이 가족에게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닌 혈연이라는 안전한 고리 속에서도 반목하는 이들을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돕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힘을 얻는다. 피해자로서의 소수자가 아닌 조력자로서의 소수자라는 흥미로운 설정은 이 영화가 그들을 굳이 특별한 이들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가 모녀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유사하다. 순덕은 어릴적 부터 흥얼거려온 노래가 엄마, 즉 초미가 불렀던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태어나서부터 함께할 수밖에 없기에 지우고 싶어도 결코 지울 수 없는 혈연의 기억처럼 놓인다. 그리고 순덕을 낳으면서 엄마, 즉 초미는 이 노래를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그것에 전혀 후회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까지 일 뿐 영화는 이들을 끝까지 화해시키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옹하는 관계를 굳이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순덕이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완성시켰던 것을 지켜보던 엄마는 결국 그 자리를 뜨고, 순덕 역시 밖으로 사라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본다. 굳이 끌어당겨 안지 않아도, 서로의 사이를 메우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까지도 가족들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편안하게 보여준다.

 

영화가 갑작스레 마무리되는 인상을 주는 것이나 순덕과 엄마의 캐릭터가 극의 후반 활기를 잃는 것이 아쉬움에도 이 작품은 가족은 당연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 즉 가족에 대해 조금은 결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데에서 재미있는 시작을 한 셈이다. 사실 우리는 혈연이 반드시 우리를 따뜻한 울타리로 품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떨어질 수 없는 이름이 가끔은 고통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영화들은 가족은 무조건 서로를 끔찍이 아낄 것이라는 환상을 새긴다.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가족일 수 있고 그렇다 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늘 무시당한다. 혈연과 가족이 등가에 놓인다는 것,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 너무 촌스럽지 않은가.

 

<초미의 관심사>(2020)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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