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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반 없는 삶, 그리고 <해피투게더>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지반 없는 삶, 그리고 <해피투게더>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3.0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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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 폭포로 향하는 혹은 어쩌면 완전히 다른 방향이었을지 모를 길 위에서 보영(장국영)과 아휘(양조위)는 헤어진다. 이별의 말들은 도로의 소음과 함께 낯선 나라에서 흩어지고,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것일까, 물어도 소용없는 시간들이 찾아온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것일까, 아휘는 보영이 떠나도 계속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견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 바 앞에서 자신의 고향의 언어들을 사용하는 단체관광객들을 마주하며, 그들에게 고향의 언어로 말을 걸고 고향의 언어로 사진을 찍어주며, 그는 그저 그렇게 견딘다. 그래서 피투성이가 된 채 다시 찾아온 보영을 안았던 아휘의 마음은 어쩌면 안도였을 것이다. 자신을 이 낯선 곳으로 이끈 구원이자 파멸인 그였다.

 

사랑의 원형

두 손을 쓸 수 없게 다친 보영은 아휘의 집에서 아휘의 손길이 닿아야지만 밥도 먹을 수 있고 씻을 수도 있고 옷도 벗을 수 있다. 아휘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 너무도 빨리 흘러가 버릴까봐 두렵다. 분주한 식당의 소음들 속에서도 보영에게 계속 전화를 거는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일하느라 볼 수 없는 보영의 시간들이 견딜 수 없이 불안해서. ‘사실 나는, 보영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랬다. 아픈 그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아휘는 그렇게 생각한다.

프루스트의 소설 주인공도 알베르틴에게 그런 마음을 느낀다. 그녀를 집에 가두어 놓고 그녀를 그녀의 여자 친구들에게서 떼어놓고 나서야 그의 고뇌로 찬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그가 원했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그는 두 손을 쓸 수 없는 보영처럼 알베르틴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을 때, 오직 그 때에만 사랑을 실현했다고 느낀다. 그는 알베르틴이 눈앞에 없으면 그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 없고, 알베르틴이 눈앞에 있으면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지만 끊임없이 건네는 말들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져버려 그녀를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은 그녀가 잠에 들었을 때뿐이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지 않고도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할 수 있을 때, 그녀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만큼 내면으로 침잠하여 그녀를 생각할 수 있을 때, 오직 그때만 그는 그녀를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에 그녀의 잠은 나에게 하나의 풍경인 듯싶었다.’ 프루스트는 그렇게 적고 있다. 잠든 보영을 바라보는 아휘의 마음도 그런 것이었을까. 그리고 잠든 아휘를 바라보는 보영의 마음도 그런 것이었을까.

 

어쩌면 사랑의 원형은 질투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프루스트 소설의 주인공이 잠든 알베르틴을 바라볼 때 그의 옆에는 그녀가 잠들기 전 벗어둔 겉옷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옷 안주머니에 그녀의 비밀이 담긴 온갖 편지들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곳으로 손을 뻗기만 하면 그녀가 자신에게 숨겨온 삶들을 모두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그녀의 옷에 손을 대지 않는다. 자기가 모르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주머니에 넣어놓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항상 새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는 악령처럼 질투는 도저히 떨쳐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꽁꽁 묶어두어 완전히 소유했다고 믿을 때에도, 그 악령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이의 성실함을 우격다짐으로밖에 얻지 못했다는 절망, 이제는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절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휘가 할 수 있는 것도 보영의 여권을 감추어두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끝나버린 끝도 없는 절망 속에서, 어떻게 해도 이 절망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또 다른 절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프루스트는 이렇게 쓴다. ‘인간이 뭔가를 좋아함은 그 속에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경우만이다. 소유하지 못하는 것밖에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장(장첸)의 녹음기에는 담길 수 있는 것이 없다. 버릴 수 있는 슬픔이 없기 때문에. 그렇지만 언제나 보영이 그렇게 이야기하듯이,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늘 절망 속에서만 다시 쓰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휘는 생각한다. ‘어떤 일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영이 다시 여권을 달라며 전화를 했다. 돌려주기 싫은 게 아니고 그를 다시 보기 싫었을 뿐이다. 보영과 마주치는 것이 두렵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다.’

 

지반 없는 삶

보영과 또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는 아휘는 홍콩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것일까, 아휘는 조금씩 생각하고 싶지 않던 과거를 되짚는다. 그렇지만 고향의 아버지에게 괜찮으니 돌아오라는 말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향으로 건 자신의 전화에 그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신뢰를 져버리고 아버지를 난처함 속에 두고 와버리지 않았는가. 그는 아버지에게 긴 편지를 쓴다.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가 묻고 싶어 했지만 묻지 않았고, 그래서 모른 척했던 물음에 대한 답들과 함께. 여기까지 어떻게 온 것일까, 거기서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홍콩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돌아갈 홍콩은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처럼 그대로이지 않을 것이다. 등소평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있을 그의 고향은 자신이 곧 마주하게 될 아버지의 얼굴처럼 어떤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보영과 아휘, 그들에게는 모두 그들을 기다리는 고향이 없다. 그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어딘지 모를 길들 위에서 헤매는 진짜 이유는 거기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그들의 고향은 거기에 있지만 거기에 없다. 탱고 바에서 식당으로, 도축장으로 이어지는 아휘의 삶, 이 남자에서 저 남자로, 호텔에서 화장실로 이어지는 보영의 삶이 그들의 지반 없는 삶을 드러낸다. 그들은 서로에게 마지막 남은 고향이었고, 그래서 놓을 수 없지만 놓아야만 하는 그들의 고향처럼 격렬한 사랑과 미움, 그리움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부둥켜안고 추는 탱고는 서로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지만 끝도 없는 이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보영은 아휘가 떠난 집에서 남겨진 그의 흔적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그는 돌아갈 고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흔적들뿐이다. 아휘는 이미 다른 곳이 되어버린 고향으로 가기 전 고향과 닮은 곳으로 간다. 장이 있는 타이페이이다. 아휘는 그곳에서 장을 만나지는 못하지만 장의 부모를 만난다. 장의 부모가 장사를 하고 있는 랴오닝 야시장은 자신의 고향과도 닮았다. 이미 사라져버린, 곧 사라질 그의 고향. 잃어버린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아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되었다. 그곳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이 언제이든 이제는 상관없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으면 어디서 찾을지 안다는 것’이니까. 이렇게 지반이 없는 그들의 삶 위에서 다시 살아가는 일은 계속된다. 다시 시작하자는 보영의 말처럼, 그렇게 다시 또 여전히 그들의 삶은 시작된다.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슬픈 그런 삶의 모습으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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