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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무섭지 아니한가
이래도 무섭지 아니한가
  • 김도훈
  • 승인 2011.08.08 18: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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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러영화에 미래는 있을까?’ 거창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갑자기 기시감이 진동한다. 나는 전에도 몇 차례 비슷한 주제의 글을 청탁받았다. <씨네21> 역시 거의 2년에 한 번쯤 한국 호러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글을 실었다. 모두가 묻는다. “과연 한국 호러영화에 미래는 있을까요?” 2011년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영화계의 모두가 한국 호러영화의 미래를 믿었다. 독립영화계의 스타인 김곡·김선의 <화이트>, 변승욱이 감독한 이창동 사단의 영화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영화가 엄청난 흥행 성적을 기록할 거라 믿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2009)처럼 이 저주받은 장르의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거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그 결과가 어땠느냐고? 두 영화는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납득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더 실망스러웠던 건 꽤 근사한 독립영화계의 예술가와 제작자가 덤벼들었음에도 두 영화 모두 자기가 다루는 장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화이트>와 <고양이>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 호러영화들이 빠져든 수렁에 다시 한번 빠져들었다.

히트작도 없고 명작도 없다

한국 호러영화의 새로운 물결은 안병기의 <폰>(2002)과 김지운의 <장화, 홍련>(2003)이 한국 호러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200만 명 이상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서 시작됐다. 충무로는 매년 여름 호러영화를 쏟아냈다. 2007년에는 <전설의 고향>을 시작으로 <검은 집> <해부학 교실> <므이> <기담> <두 사람이다>, 그리고 10월에 <궁녀>와 12월 말 <헨젤과 그레텔>까지 모두 8편이 개봉됐다. 2006년에는 안병기 감독의 <아파트>를 비롯해 <아랑> <스승의 은혜>가 있었고, 2005년엔 <여고괴담> 4편을 비롯해 김혜수 주연의 <분홍신> 등이 개봉됐다. 한국 호러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졌다. 그러나 관객은 자신의 주머니를 노리고 손쉽게 만들어지는 ‘기획 호러영화’에 완벽하게 질려버렸고, 2008년이 되자 호러영화는 충무로에서 거의 사라졌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화 제작 환경 문제, 다른 하나는 영화의 내적 욕망 문제다. 어렵게 들리겠지만 아주 간단한 문제다.

먼저 제작 환경 문제다. 한국 호러영화는 호러영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작자와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 호러 장르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작가가 있는가? 단 두 명의 감독이 있다. <가위> <폰> <아파트>의 안병기 감독과 <령> <미확인 동영상>(오는 12월 개봉 예정)의 김태경 감독이다. 대부분의 한국 호러영화들은 처음으로 메가폰을 쥐는 입봉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국에서 호러영화는 값싸게 촬영해서 여름에 반짝 개봉해 1~2주 안에 본전을 뽑기 위해 만드는 기획영화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작사는 자신의 시나리오로 입봉을 기다리는 감독들에게 호러영화로 먼저 입봉하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주겠다고 설득한다. 당연히 제대로 장르를 탐구할 의지가 없는 감독들이 호러영화를 연출하게 된다. 결과는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대로다. 호러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스크림>의 웨스 크레이븐이나 <이블 데드>의 샘 레이미 같은 감독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들은 호러 장르에 대한 막강한 애정을 바탕으로 감독이 됐고, 장르의 공식을 어떤 식으로 활용해야 호러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를 안다. 장르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없이 좋은 호러영화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장르에 무지한 제작자와 감독

다음은 내적 욕망의 문제다. 거창한 문장이지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순전히 감독의 예술적 자의식과 관계 있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 감독들의 인터뷰를 한번 들어보자. <고양이>의 변승욱 감독은 말한다. “공포영화인 동시에 생명의 문제도 다루는 작품이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고양이를 키우지만 때때로 이기적인 마음에 고양이를 쉽게 버리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 정서적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호러영화는 좋은 호러영화면 된다. 생명의 문제를 거론하며 억지로 정서적 울림을 삽입할 필요 없다. 사회적 텍스트와 정서적 울림은 관객이 찾아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감독들은 인간의 탐욕, 한국 사회의 현실, 한국적인 한의 정서를 즐겨 언급한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호러영화는 이미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 누구도 공포 자체를 파고들어 승부를 볼 생각이 없다. 그저 주제에 대한 자의식에만 신경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르적인 공식을 벗어난 새로운 호러영화를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장르적인 공식’이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나? 할리우드 호러영화의 거장들은 장르적인 공식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원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대신 호러의 거장들은 익숙한 원형을 약간씩 변주함으로써 장르적인 화석이 되는 걸 벗어난다. 완벽하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바보짓 대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한국 호러영화 감독들은 도무지 그걸 깨닫지 못한다. 새로운 호러영화를 만들겠다며 그들이 영화 속에 삽입한 건 예술적, 혹은 사회적 주제의식이다.

<검은 물 밑에서>(2002·일본) 스틸컷

호러가 그리 하찮아 보이더냐

누구는 한국 호러 장르의 전통이 원래 그렇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글쎄, 김기영의 <하녀>(1960)가 당대의 여성 노동자 문제를 짚어내지 않았느냐고? 그 영화가 걸작이 된 건 당대의 여성 문제를 다룬다는 자의식 없이, 하녀 캐릭터를 진정한 악마로 그려낸 덕분이다. 게다가 김기영을 ‘한국 호러의 아버지’라고 말할 순 없다. 진정한 아버지를 찾자면 <망령의 곡>(1980), <망령의 웨딩드레스>(1981), <마계의 딸>(1983), <월하의 사미인곡>(1985) 등을 연출한 박윤교 감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누가 그를 기억하는가. 한국 대중영화는 거대한 단절의 역사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의 새로운 중흥기는 사실상 해외영화의 미적 수혈을 받은 세대의 젊은 감독들과 할리우드 시스템을 흉내내며 한국에 도입한 젊은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1960년대에서 80년대로 이어지는 ‘방화’의 역사는 부끄러운 아버지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었다. 한국 호러영화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월하의 공동묘지> 대신 한국의 새로운 호러영화 감독들이 아버지로 삼은 건 1990년대 중반 이후 <링>과 <주온>으로 호러 장르의 중흥을 일궈낸 일본의 호러영화였다. 일본 호러영화에 사회적 텍스트에 대한 강박이 있던가? 전혀 없다. 그저 관객을 무섭게 하고 싶다는 장르적인 욕구만 가득했다. 한국 호러영화들은 일본 호러를 아버지로 끌어오면서도 그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죄책감에 시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일본 호러에 ‘사회적·예술적 자의식’이라는 걸 삽입함으로써 현해탄 건너편의 진짜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호부호형, 못 하나 안 하나?

그렇다면 우리에게 자의식 없는 진정한 호러영화는 전혀 없는 걸까? <장화, 홍련>과 안병기의 데뷔작 <가위> <여고괴담1>을 제외한다면 가장 훌륭한 한국 호러영화는 이용주의 <불신지옥>과 (몇몇 반론이 있겠지만) 임대웅의 <스승의 은혜>였다. 두 영화가 훌륭한 이유는 자신이 다루는 장르를 열심히 연구했으며, 동시에 예술적 자의식을 정갈하게 다듬는 데도 성공했기 때문이다. <불신지옥>은 종교적 광신이 어떻게 한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파헤치는 일종의 오컬트 추리영화다. 하지만 이용주 감독은 직접적으로 종교적 광신에 대해 분석하거나 사회적 코멘트를 달려고 하지 않는다. <불신지옥>의 목표는 관객을 어두운 지옥 속에서 2시간 동안 헤매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 간결한 목표 덕분에 성공한다. 임대웅의 <스승의 은혜>는 잘 만든 호러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수많은 호러 거장들의 걸작을 참고로 열심히 연구했고, 최근의 트렌드인 할리우드의 ‘고문 호러’ 장르의 기운을 정직하게 가져와서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낼 줄도 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불신지옥>과 <스승의 은혜>는 야심 없이 튼튼하게 만든 장르영화였음에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건 관객이 더 이상 좋은 호러영화를 선택할 줄 모른다는 증거가 아니다. 더 이상 관객이 한국 호러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증거에 가깝다. 어쩌면 그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의 진정한 공포가 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난 5년간 가장 무시무시했던 한국 장르영화를 떠올려보라. 호러영화가 아니라 스릴러영화다. 나홍진의 <추격자>를 능가하는 영화적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준 호러영화가 있었는가? 단호하게 대답하자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한국 관객은 진짜 공포를 비현실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에서 찾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더 이상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TV를 켜는 순간 등장하는 연쇄살인마와 연쇄강간범, 정치적 무뢰한들이다. 악령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비현실의 영역을 다루는 호러영화는 만들 필요가 없는 걸까? 물론 그렇지 않다.

호러보다 더 호러한 현실 넘어서려면

여전히 한국에서 호러영화는 비현실적인 영역을 현실로 밀어넣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르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는 호러 장르 말고도 새로운 비현실의 영역을 발견했다. JK필름의 <해운대>와 <7광구>로 대표되는 공상과학(SF) 장르다. 이런 거대한 SF 블록버스터를 매년 끊임없이 만들 수 있는 곳은 할리우드뿐이다. 한국 영화에서 완벽하게 비현실에 가까운 영역을 묘사할 수 있는 건 여전히 호러 장르밖에 없다. 제멋대로 비현실을 구워먹고 지져먹을 수 있는 유일한 장르 속에서 한국 감독들은 굳이 사회적 의무감을 발휘하며 리얼리티의 삽입에 목매달아왔다. 입시지옥, 성형, 유기묘 문제, 아동학대에 대한 주제의식을 자신이 만드는 호러영화에 반드시 삽입하려는 감독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만드는 장르에 애정이 없거나, 심지어 그걸 수치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나는 싸구려 장르영화나 만드는 감독이 아니야’라는 기묘한 자의식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리얼리티의 삽입에 목맨다. 하지만 당신이 진정한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은 감독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은 아예 비현실 영역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샘 레이미와 웨스 크레이븐, 혹은 전성기의 나타가 히데오처럼 장르 내부에서 자기 완결성을 갖는 진짜 오락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거다. 누가 (정치적 자의식과 의무감 없이) 고양이 목에 가장 먼저 방울을 달 것인가.

글•김도훈 씨네21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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