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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소울> -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3.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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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다른 세상

과연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픽사 스튜디오의 신작 <소울>을 보며, 코로나로 인한 ‘대봉쇄’가 영화의 영혼까지 바꾸어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코로나가 영화제작의 프로세스의 일부를 바꾸어놓았다는 사실에는 더 말을 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울>의 후반부 작업은 재택근무로 이루어졌다. 후반부 작업의 막바지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해도, 그리고 김성영 레이아웃 아티스트의 설명처럼 ‘동료들의 자연스러운 협업을 보증할 오랜 근속 기간’이 있었다[1]고 해도, 대규모 협업이 필수인 상업영화의 운명 속에서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코로나로 인한 변화의 무게보다 영화의 영혼은 더 무거운 것이어서, 짧지 않은 변화의 시간을 견뎌온 영화의 본질이 코로나 사태 또한 무심하게 지나쳐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가 알던 원래 그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울>의 마지막 장면은 4월 초, 코로나시대를 대변할만한 권준욱 부본부장의 상징적인 브리핑을 떠올리게 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그럼 무엇이 변했을까? 이 질문은 망연한 느낌을 준다.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울>의 마지막은 피트 닥터의 첫 장편 데뷔작이었던 <몬스터 주식회사>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모험 끝에 ‘몬스터 주식회사’를 비명 대신 웃음을 생산하는 회사로 만든 ‘설리’는, 모험의 중심에 있었던 ‘부’를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태다. ‘부’의 집에 접속할 수 있는 ‘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설리에 절친 마이크는 그를 위해 어렵사리 그 문을 복원한다. <몬스터 주식회사>는 그 문 너머 ‘부’를 마주한 ‘설리’의 표정에서 끝난다. 이후, 주인공의 기억이 심어진 특권적 장소의 이미지로 마무리되는 일렬의 경향은 피트 닥터의 작가성을 드러내는 인장이 되었다. <업>은 파라다이스 폭포의 전경에서 마무리되고,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의 기억을 둘러싼 집이라는 공간에서 마무리된다. <소울>은 ‘영혼 22’와 한바탕 모험을 끝내고 삶의 긍정을 되찾은 주인공이, 세상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오는 표정에서 마무리된다.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은 어째서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는 선언을 떠오르게 했을까?

다르게 질문해보자. 변한 게 있었을까? 이는 비교적 답하기 쉬운 질문이다. 있다. 단, 영화가 아닌 나와 세상이 변했을 것이다. 즉, 서 있는 곳이 달라지자 풍경도 변했다는 게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보자. 세상이 변했되, 영화가 변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세상’은 그저 착시이거나 착각일까?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최소한 ‘이전과 다른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픽사가 올해 <소울>을 통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서는 최초로 오스카 특수효과상 부문 지명 후보가 될 수도 있다는 소식[2]이 들려오고 있다. 만약 <소울>이 애니메이션으로서 최초의 특수효과부문 후보가 된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실재에 대한 개념을 재고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특수효과는 얼마나 실재의 대상에 가깝게 재현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져 왔다. 애니메이션이 재현하는 대상은 애초에 실재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특수효과상에 후보로 지명된다는 것은 상당한 변화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최소한 ‘이전과 다른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대봉쇄’ 속에서 시스템을 확인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세상’은 얼마나 이전과 같고 다를까, 답할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할까? 어쩌면 답하기에 너무 거대한 질문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재현의 대상과 방식에 대한 질문이고,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을 이야기했던 바쟁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평자가 자신의 일생을 걸고 탐구해온 질문이기 때문이다. 당장 답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나는 바쟁이 이야기했던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작가를 해방한 카메라의 역량이 다른 방식으로 귀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쟁은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에서 카메라의 역량을 사물 그 자체를 포착하는 비정함에서 찾았다. 인간이 온전히 손댈 수 없는 비정함의 가치가 영화를 예술로 만들고, 나아가 가장 완벽에 가까운 방부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비릴리오처럼 번안하자면, 인간을 구현해낼 수 없는 카메라의 포착 속도가 완전에 가까운 재현을 구현하고 있다.

인간의 손으로 거쳐야 구현해낼 수 있는 VFX 혹은 특수효과가 어째서 리얼리즘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있을까? 혹자는 되려 기계를 벗어난 인간의 역량이 재평가받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앞서 말한 바처럼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곳이 달라졌기 때문에 풍경도 변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다. 코로나로 인해 이전과 같이 시공에 제약을 디딘 인간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창작을 가능하게 필요조건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시간도 아니다. 되려 인간성 혹은 감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초평면, 말 그대로 평평한 바탕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정한 평상(平狀), 플랫폼(Platform)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스템 그 자체로서, 어쩌면 인간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혹은 인간을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 혹은 <매트릭스>의 센티넬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코로나의 ‘대봉쇄’가 확인시킨 것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부르던 그것이 없이도 생존이 가능한 시스템 그 자체일지 모른다.

<소울>을 극장에서 본다는 체험은 바로 그 시스템의 역량을 확인하는 체험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울>에서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울>의 주인공 ‘조 가드너’와 ‘22’는, 시스템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치 버그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그들은 깨끗하고 깔끔한 작동을 위해 소거되거나 교화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험은 겪고 난 뒤 소거되지도, 교화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상태에 도달한다. 우리는 마음의 불꽃을 얻게 된 22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지도 않을 것을 안다. 단테처럼 이세계를 통해 초월을 경험한 가드너가 이전처럼 영감없는 삶을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또한 안다. 그들에게 시련이 있을지언정, 이전과는 다른 시련일 것이다. 이 새로움 혹은 다름은 그들이 속한 세계 속에 정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바탕에 두고 있다.

 

 

다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22’가 변하고 ‘가드너’가 변해도 영혼들의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뉴욕 또한 그들의 변화로 인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를 찾는다면, 영혼들의 세계와 뉴욕이라는 도시는 인간이 아닌 비정한 평면이기 때문이다. 노베르그 슐츠가 이야기하듯 도시는 직선의 장소이고, 가드너가 처음 조우한 이세계에 대한 프로덕션이 웅변하듯 ‘영혼의 세계’ 또한 처음과 끝만 있는 직선의 세계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라마를 관통하며, ‘가드너’와 ‘22’은 직선 위에 굴곡은 세계와 다른 자신만의 차이를 만든다. ‘태어나기 전 세계’의 관리자 제리와 테리는 이들이 다른 이와 다르다는 점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2차원으로 생긴 자신의 형상처럼 그들이 속한 세계를 평면으로 만드는 노력을 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는 가드너가 본래 종착했어야 할 거대한 블랙홀처럼 영원히 평면일 것이다.

평면의 세계 속에서 결국 자신의 굴곡을 찾은 가드너의 얼굴은, <몬스터 주식회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울>에 영혼을 불어넣는 중핵적인 요소이다. 그 얼굴에는 이세계를 체험한, 육화된 가상의 육체적 기억이 있다. <소울>이 오스카 특수효과상 지명 후보에 오른다면, 이는 가상의 육체가 지닌 기억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과 다른 선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억이라는 사적으로 육화된 기록이 인간의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것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라는 사태 속에서 육화된 기록이 가상이라고 불리는 시스템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는 새로운 지평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새로운 인본주의이자 시스템의 비정함을 확인하는 다른 또 다른 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전과 다른 세상’이 지목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카메라 셔터를 통해 보장받던 기계의 비정함이 그 권위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증언일지도 모르겠다. 한때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는 선언으로 표현되던 카메라의 비정함은 이제 시스템이라는 복잡계에 속해있다. 이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시스템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 그것이 <소울>이 주는 이상야릇한 체험이 아닐까? 사회를 시스템으로 바라보았던 니클라스 루만은 “한 번 소통에 끌려 들어가면 단순한 영혼의 낙원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제 <스트롬볼리>의 잉그리드 버그만을, 그리고 버스터 키튼의 무표정을 이전처럼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좋든 싫든, ‘이전과 다른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참고자료

[1] 남선우 & 김소미, “'소울'의 사랑스러운 TMI - 재택근무여도 고퀄리티엔 문제없지!”, 씨네21, 2021.01.21.

[2] Bill Desowitz, “‘Soul’: Why Pixar’s Innovative Animated Feature Deserves a VFX Oscar Nomination”, IndieWire, 2021.03.05.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호서대학교 교수학습센터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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