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가 죽었다. 지난 6월, 영상활동가 이상현씨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목을 맸다. 지난 7월, <트랜스포머>가 스크린의 65%를 점거하며 개봉했다. 최고은과 <트랜스포머>, 그리고 이상현. 관련 없어 보이는 사건들은 죽음이 갖는 개별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돼 있다.

성장주의, 독점 수직계열화 귀결

시장 자율과 정부 개입을 둘러싼 오랜 논쟁은 사실, 오래된 농담이다. 시장은 홀로 존재한 적이 없다.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장에 개입해왔다. 문제는 자본이다. 자본은 자신에게 유리할 때는 정부 개입에 침묵했고, 불리할 때는 시장 자율을 외쳤다. 그래서 ‘작은 정부’가 자본의 자유를 위해 규제를 해제해갈 때 노동과 환경, 사회 공공성을 위한 시도는 새로운 규제로 봉쇄됐다. 요는 정부가 개입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정부의 개입, 즉 정책이 누구에게 득이 되느냐다.

한국 영화산업은 1990년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급격히 성장했다. 성장의 이면에는 정부가 있었다. 수천억 원을 직간접적으로 투자하면서, 정부는 국민에게 한국 영화의 발전이 곧 국가 발전이라고 역설했다. 국민 역시 한국 영화를 성원했고, 때로는 기록적인 박스오피스를 위해 스스로를 동원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영화산업의 생태계는 대기업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로 귀결됐다. 정부는 공공 지원 성과가 소수 대기업의 독점적 이익으로 귀결되는 상황을 발전을 위해 ‘묵인’했다. 한국 영화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일정한 독과점이 필요하고, 할리우드와 대결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며 ‘권장’까지 했다.

이런 양상은 불법 다운로드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한 편의 영화는 최초 극장 개봉 뒤 비디오-케이블-TV 등의 유통 채널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이익을 실현한다. 이때 각각의 유통에는 일정한 기간, 즉 홀드백(Holdback)이 필요하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다양한 유통·미디어 업체들이 홀드백 기간을 무너뜨렸다. 비디오가 나오자마자 케이블과 위성 방송에서 방영했다. 영세 비디오업계가 먼저 무너졌다. 이것이 불법 다운로드와 함께 부가시장을 몰락시킨 원인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저작권법 개정, 불법 다운로드 근절 등 소비자, 즉 국민에게 몽둥이를 들었을 뿐 홀드백을 무너뜨린 유통·미디어 업계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권위주의 정권의 검열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민간 자율과 시장 자율을 혼동하기는 영화계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의 논리는 종종 문화의 논리와 결합된다. 시장주의에 맞선 문화다양성 혹은 문화적 예외를 둘러싼 논쟁은 때로 자본의 이해와 일치했다. 한국 영화를 보호하자는 논리는 ‘한국 문화’와 함께 ‘한국 영화산업’을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문화다양성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에 동의했고, ‘수출’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이런 결합을 변화시킨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절대적 신봉과 자본 자유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가 갈망해온 목표, 곧 개인의 사적 영역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영역을 시장에 포섭하려 한다. 민간은 시장에 포섭되고, 예술은 상업과 통합되며, 관객은 소비자가 된다. 문화다양성은 이제 돈 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시장에 포섭된 소비자로 호명된 관객을 명분으로, 혹은 소비자 자신에 의해 무력화된다.

문화다양성 논리에 스민 산업 논리

국가 지원 혹은 비호 속에 독과점을 달성한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는 어떤가? 한국 영화시장은 CJ·오리온·롯데 3개 기업이 배급의 54%, 상영의 70%, 케이블의 80%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상영·배급·투자·제작·부가사업, 하다못해 연예매니지먼트까지 모든 영역을 수직계열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대국 미국은 어떨까?

미국에서 대기업들이 상영과 배급에 이어 제작까지 독점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파라마운트 판결’로 불리는 배급·상영 겸업 금지 때문이며, 시장의 빠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공룡 기업’들의 둔중함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정부 비호하에 독과점과 수직계열화가 진행됐지만, 여전히 제작 부문은 중소 독립제작사에 맡겨졌다. 메이저들은 투자와 배급에 집중하고, 상영은 분리돼 있으며, 거대 미디어 그룹의 계열사들은 훨씬 독립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양한 관계사들과 영화를 만들고 배급한다. 게다가 미국의 영화 노조들은 다양한 직군과 직능으로 촘촘히 조직돼 자신을 보호하고, 산업 내 발언권 역시 잘 보장돼 있다.

자본 논리로도 한국 영화산업은 문제다. 독과점 수준은 지나치게 높고, 대기업들은 경직되고 배타적이다. 미국의 거대기업과 중소자본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한다면, 한국 영화산업의 생태계는 절대적으로 독과점 대기업이 지배한다. 노조는 여전히 유명무실하다.

이런 구조는 역설이다. 영화산업 발전 논리로 구축된 독과점 체제에서 대기업들은 제작 투자를 줄이고,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이익률 높은 유통·상영 부분에 집중한다. 제작비는 줄고, 중소 제작·배급·협력사들은 붕괴한다. 관객과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중소 제작사들이 사라지면 영화의 창의성과 다양성은 빈약해진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 대기업은 또다시 유통·배급 부분에 목맨다. 홍보·배급(P&A) 비용은 치솟고, 물량 공세와 최대한의 스크린이 필요해진다. 반면 영화의 상영 주기는 극단적으로 짧아진다.

<트랜스포머>가 개봉된 지난 7월 3일, 박스오피스 1·2·4위인 <트랜스포머> <써니> <쿵푸팬더>의 합산 관객 점유율은 92%였다. 이 세 영화는 모두 CJ E&M의 것이다. 5위인 <화이트>는 CJ E&M이 직접 제작까지 했다. CJ E&M과 국내 최대 멀티체인 CGV는 모두 CJ 계열사다. 스크린 독과점은 산업 독과점의 자연스러운 결과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으나, 망가지는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공룡들.

스태프 처우 개선 문제를 보자. 독과점 문제를 보면 원흉은 대기업들로 보인다. 대기업은 우월한 지위를 바탕으로 제작 부분에 제작비 삼각과 제작 지분 축소를 요구해왔다. 배우와 메인 스태프들을 위한 러닝 개런티는 제작사 몫으로 할당된다. 당연히 스태프 몫은 줄어든다. 이런 분석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2007년 영화 노조는 사용자단체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와 최초의 단체협상을 체결했으나, 곧이어 명백한 과잉 투자로 불어닥친 불황 탓에 협약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2007년은 중소 투자배급사와 제작사들이 독점 대기업과의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영화계를 떠난 시기와도 겹친다.
　
예술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죽는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근원에 있다. 영화 노동자에게 예술과 열정을 명분으로 저임금을 강요해온 것은 오래된 현실이다. 독점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갑’과 마찬가지로 중소 제작사라는 ‘작은 갑’ 역시 이런 현실을 이용해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고은씨의 죽음으로 조명된 ‘예술인복지법’에 반대한 정부 부처들의 논리는 형평성 문제였다. 즉,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과 고용보험 적용 범위 문제다. 게다가 2000년대는 노동조합과 운동이 고립되고, 노동유연화가 강도 높게 진행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영화 스태프들의 현실에는 우리 사회의 예술과 노동, 복지 일반의 문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숲속 홍길동’ 이상현. 지난 10년 동안 노동자와 소수자의 투쟁 현장을 카메라로 담아온 영상활동가이자, 노동 다큐멘터리스트다. 그러나 그가 만든 수백 개의 영상은 생계를 보장하지도, 마지막 순간 삶의 버팀목이 되지도 못했다. 그를 떠나보낸 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단적 상황에 처한 사회활동가들을 구제하기 위한 센터를 만들려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국가가 최소한의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민간이,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나섰다는 점,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상업과 인디를 가리지 않고 예술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는 점이다. 사회안전망의 부재 속에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로 점철된 세상에서 예술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오랫동안 예술을 ‘생산’의 바깥에 위치시켜왔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생산’과 그것의 당대 이데올로기 ‘발전’은 사회적 가치를 구획하는 강력한 논리였고, 예술은 돈이 되거나 정치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한 그저 ‘잉여’였던 것이다.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도대체 영화산업은 누구의 것인가?’ 영화산업에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이 존재한다. 독점 대기업부터 중소업체, 그들에게 고용된 다양한 직급과 직군의 노동자, 예술인까지. 그러나 오랫동안 이들은 ‘영화인’이라는 단일한 호명 속에 ‘영화산업 발전’이라는 논리에 포섭돼왔다. 이 논리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해 독과점과 수직계열화, 극단적인 시장논리와 상업주의, 그리고 한편으론 예술과 작가주의의 실종, 노동권의 기약 없는 유보로 귀결됐을 뿐이다.

영화계의 비극, 사회의 비극과 닮았다

영화산업 발전이라는 논리는 재고돼야 한다. 양적 규모 얘기는 그만하자. 산업구조와 내부 구성원 간 관계와 분배를 논의하자. 영화산업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며,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질문하자. 최소한 발전을 위해 수천억원의 세금을 제공해온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영화는 답해야 한다.

우선은 정부다. 시장 자율이라는 오래된 농담은 그만하자. 문제는 개입의 논리와 방식이다. 필요한 것은 영화산업의 다양한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개입, 산업의 구조와 분배의 룰을 개선하기 위한 개입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생태계 서열 최하위에 있는 영화 노동자와 예술인의 생존이다. 또한 승자독식으로 몰아가며 생태계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독과점과 수직계열화다.

영화인들은 이제 내부 논리를 벗어나야 한다. ‘영화인’이라는 단일 호명으로는 충분치 않음을 인정하자. 또한 국민경제론으로 봐도 별 영양가 없는 해외 진출 말고 다른 밖도 좀 보자. 2007년 이후 한국 영화산업 위기의 첫 번째 지표로 지목돼온 ‘관객 증가율 둔화’의 해법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고라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평균 임금률을 올리며, 스펙 쌓기에서 ‘88만원 세대’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카메라 안의 현실은 카메라 뒤에도 펼쳐져 있고, 세상과 영화는 생각보다 가깝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술이라는 것, 문화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것 이전에, 발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이전에, 우리는 ‘생산’의 논리를 재고해야 한다. 문화적 가치는 교환 가치로 전환 가능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때만 의미가 있는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글•이상욱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과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을 프로듀싱했고, 현재 다큐멘터리 <뉴타운 컬쳐 파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이상욱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