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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로 세운 백화점과 한강다리가 무너졌을 때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비리로 세운 백화점과 한강다리가 무너졌을 때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 박수연, 안치용, 김민주, 신다임 기자
  • 승인 2021.03.22 00:0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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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㉑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1995년 6월 29일 오전 여느 날처럼 영업을 준비 중이던 삼풍백화점 직원들은 사내 공지사항을 전하는 직원으로부터 “오늘 5층은 영업하지 않는다. 손님들이 물어보면 ‘오늘 5층은 휴업입니다’라고 안내하라”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5층에 균열 등 이상징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장 직원들은 “아니, 가스도 새고 금도 가고 그러면 어, 이 백화점 무너지는 거 아냐?”, “야, 이거 무너지면 어떻게 하냐, 흔들면 무너지는 거 아냐?”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누가 예상했을까. 초호화 신식 백화점은 이날이 지나기 전에 직원들 농담대로 바로 폐허로 변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 30대 패션디자이너 이 아무개가 백화점 매장에 있었다. 그는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10년의 직장생활 끝에 서울 청담동에 의상점을 냈다. 동생이 하는 액세서리 가게를 마주 보는 위치였다. 매장을 차린 지 16개월 만인 1995년 4월에 기쁜 일이 생겼다. ‘외제’만 파는 곳으로 유명한 삼풍백화점에 입점하게 됐기 때문이다. 꿈에 그리던 삼풍 입점 허가를 받았지만 입점하지는 못했다. 6월 29일 오후에 오랜만에 이 씨의 의상점을 방문한 마산여고 동창생들을 청담동 가게에 남겨두고 시숙모의 옷을 맞추러 삼풍백화점에 잠시 들렀다가 변을 당했다. 어머니를 위해 직접 만든 정장이 그의 유품이 되었다.

열흘 전 결혼식을 올린 새신부 조 아무개도 이날 그곳에 있었다. 팔남매의 막내인 그는 결혼 전에 삼풍백화점에서 매장 직원으로 일했다. 1995년 6월 19일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직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 간식을 먹고 올 테니 잠깐 매장을 봐 달라는 후배의 부탁을 들어주고는 3개월이 지나 차가운 주검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왔다. 먼저 떠난 막내딸은 온 가족이 모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가슴 저미는 이름이 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직후 MBC 뉴스속보 생중계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직후 MBC 뉴스속보 생중계 (출처 유튜브 영상 캡처)

 

 

그날의 삼풍, 골든타임은 있었다

 

사고 전날인 28일 밤 야간순찰 중에 백화점 5층 식당가 바닥에서 함몰 흔적을 발견한 경비원 김 아무개는 다음 날 오전 8시에 시설부에 보고하였다. 오전 8시 30분 현장을 확인한 시설부 직원 오길청이 다시 부장 이영철에게 보고하였다. 약 10분 후 이영철이 5층 및 옥상의 현장을 둘러보고 바닥 돌출과 침하 현상 등을 확인하였다. 오전 10시경 시설부 조회 시간에 차장 이완수가 이사 이영길과 이영철에게 균열 및 침하상태에 관하여 보고했다. 이때 이영철은 기자나 고객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동시에 현장 출입을 통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10시 30분엔 이영길이 5층 ‘춘원식당’ 매장 바닥의 경사와 균열, 그리고 옥상 바닥에 굴곡이 생긴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즉시 인근 점포 3곳의 폐쇄조치를 지시하고 이 사실을 사장 이한상에게 보고하였다. 11시경 이한상은 이영길 등과 함께 5층 바닥의 균열과 경사를 확인하고는 안전조치를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피 지시는 없었다.

11시 30분~정오 사이 5층 ‘현지식당’의 천장에서 물이 새고 ‘미진식당’의 바닥이 융기하였다. 이영철과 설비과장 김덕기는 현장을 확인한 후에 두 식당 사이에 위치한 식당들에 출입통제를 지시하였다. 직원들이 “건물이 무너질 것 같다”고 말하자 이영철은 입조심 할 것을 당부했다.

오후 12시 30분경 사장 이한상과 시설부 이사 이영길, 건축설계사 임형재가 5층 식당가와 옥상의 균열 현장을 둘러보았다. 임형재는 바닥 침하와 기둥 사이의 꺼진 부분을 확인하고는 이한상에게 5층 식당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대피를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5층 식당가 일부와 4층 귀금속 코너의 영업이 중단되었다. 5층 식당 4곳에 가스와 전기의 공급을 차단하였으며 4층과 5층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의 작동을 중단하였다. 춘원식당 등 식당 주변에는 테이프를 둘러 출입금지 표시를 한 후 접근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폐쇄는 일부분에 국한하였다. 이영길은 기울어진 식당가 앞에, 전무 이격은 4~5층 에스컬레이터 앞에 각각 칸막이 설치를 지시했다. 눈에 띄게 금이 간 쪽을 칸막이로 가려두고 멀쩡한 쪽은 영업을 계속했다.

오후 2시경에는 회장 이준이 주재한 임원회의가 열렸다. 오후 3시 10분에 구조기술사 이학수와 건축사 임형재가 도착해 5층의 안전진단을 시행하였다. 오후 4시경 B동 3층 회의실에서 이학수 등이 참석한 2차 임원회의가 열렸다. 구조기술사 이학수는 “하중의 증가가 없다면 더는 침하가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이준을 안심시켰다. 이날 폐점 후에 응급조치를 취하면 건물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란 의견을 표명했다.

5시 49분쯤 건물이 심하게 흔들릴 때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러 나온 주부들로 북적인 지하 1층 슈퍼마켓을 비롯하여 백화점 매장엔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쇼핑을 하고 있었고 680여 명의 백화점 직원 또한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5분쯤 지나 비상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뛰기 시작했다. 5시 54분쯤 A동 5층 북쪽 끝부터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전기가 끊긴 건물은 암흑천지가 되었다. 건물붕괴의 굉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공기가 빠지는 “슉” 소리가 동시에 들리면서 일순간 백화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너져내린 백화점, 양쪽 기둥만 남아있다.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무너져내린 백화점, 양쪽 기둥만 남아있다.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3초 만에 무너진 백화점

 

백화점 A동은 북쪽 콘크리트 내력벽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붕괴하였다. A동에 매장이 집중된 탓에 수백 명에 달하는 고객과 종업원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건물붕괴와 함께 그 안에 매몰되었다. 백화점 건물은 각 층의 바닥이 되는 콘크리트 슬래브 판과 천장재가 시루떡처럼 포개져 깊숙이 주저앉아 있었다. 사고 현장 주변은 건물 붕괴 시의 폭풍 현상으로 뒤집힌 차량과 백화점 안에서 튕겨 나온 상품, 그리고 사상자의 소지품이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 주변으로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신발 중에는 그 안에 발목 아래만 남은 발이 들어 있는 것이 목격됐다. 발목 위의 신체는 짓눌리고 부서져 여기저기 널려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사고 현장과 가까운 서울성모병원(당시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잿더미 같은 것을 뒤집어쓴 경증 환자들이 좀비처럼 비척비척 모여들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시신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119와 사설 구급차가 이송한 수많은 중증 환자는 수용 가능 여부를 모른 채 서울성모병원에 도착했다. 붕괴시각에 가족이 삼풍백화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유가족들 또한 병원 앞으로 몰려왔다. 환자를 수송하는 차량들과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뒤엉켜 병원 앞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이 삽시간에 목숨을 잃은 삼풍백화정 붕괴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단일 사고였다. 시체가 뭉개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31명을 포함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 등 직접적인 피해자만 모두 1,446명에 이르는 대참사는 고도성장한 한국의 실체가 끔찍한 위험사회이자 부패사회임을 입증하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부실 공사와 부실 관리였지만, 잘못된 공사를 가능케 한 근본적인 원인은 건설 비리였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부패와 부실의 먹이사슬’ 생태계의 참담한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붕괴된 백화점에서의 구조작업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붕괴된 백화점에서의 구조작업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예견된 참사

 

1987년 설계 당시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삼풍랜드'라는 이름으로 서울 서초동 삼풍아파트의 종합상가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상가건물이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 이 건물의 용도는 어쩐 일인지 종합상가에서 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삼풍그룹의 회장 이준은 시공사인 우성건설에 지하 4층, 지상 4층의 건물을 백화점 용도에 맞춰 개축해 달라고 요구했다. 건물의 용도를 변경하면 구조 또한 상당 부분 때문이이었다. 우성건설이 건물의 안전성을 우려해 요구를 거절하자 이준은 계약을 파기했다. 대신 삼풍그룹의 계열사인 삼풍건설에 지상 5층으로 확장공사를 지시했다. 법률상 건물의 사용 용도변경에 의해 구조를 바꿀 때는 반드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삼풍 그룹은 서초구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뒤 불법으로 용도를 변경하고 공사를 강행하였다.

용도를 바꿔 증축한 삼풍백화점은 필연적으로 여러 문제에 맞닥뜨렸다. 먼저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애자 오로지 기둥만이 모든 하중을 버티게 되었다. 이전보다 더 큰 하중을 버텨야 하는 이 기둥조차 천장에 구멍을 뚫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규격과 개수를 줄였다. 대표적으로 기둥의 고장력 철근 설치 개수가 16개에서 8개로 반 토막 났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L자형 철근 대신 ㅡ자형 철근을 썼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방식으로 비용부담을 줄였다. 그 결과 바닥과 기둥의 연결이 충분하지 못해 붕괴 시점에 아무런 제동 없이 각 층의 바닥이 되는 슬래브판이 주저앉아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기둥의 철근이 끊어진 모습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기둥의 철근이 끊어진 모습 (출처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삼풍건설은 불법으로 증축한 5층의 내부 구조와 용도마저 임의로 변경하였다. 건물 5층에는 롤러스케이트장이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백화점 용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식 식당가가 들어섰다. 5층 바닥에 배수로가 설치되고 온돌의 효과를 내기 위한 콘크리트가 대량 추가되면서 하중이 3~4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 모든 증축 과정에 편법과 불법이 동원되었다. 설계단계에서부터 허가용 도면과 시공용 도면을 따로 작성하고, 공사를 끝낸 후에 설계변경을 승인받았다. 선설계-후시공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속이 텅 빈 상태로 완성된 백화점은 심지어 준공일을 예정(1990년 7월 27일)보다 6개월 이상 앞당겨 1989년 12월 1일에 화려하게 개장하였다.

신식 백화점은 꽃분홍의 화사한 겉모습을 하였다. 그 속은 무리한 용도변경과 설계변경을 강행한 결과로 처음부터 곪아 있었다. 건물 붕괴 원인을 조사한 결과 삼풍백화점 붕괴는 설계, 시공, 감리, 관리 등 건설의 모든 과정에서 ‘총체적 부실’이 저질러져,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고였음이 밝혀졌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

 

1995년 11월 8일 서울지방검찰청은 삼풍백화점의 붕괴에 관한 ‘백서’를 발표했다. 검찰은 이 사고를 여러 부실 요인이 5년여에 걸쳐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해 일어난 ‘전형적인 인재’로 결론지었다. 부실시공이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부실 관리도 붕괴에 일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엉터리 안전점검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8개월 전에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이후 각종 시설물과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점검이 행해졌다. 삼풍백화점도 1994년 10월과 11월, 그리고 1995년 3월 세 차례에 걸쳐 안전점검을 받았으나 전혀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와우아파트 붕괴처럼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나 세 차례나 안전점검을 통과한 것이다.

초대형 참사의 원인이 ‘고의냐 과실이냐’를 따지는 일은 ‘방만한 관리 탓이냐, 사고가 일어날 것을 알고도 방치했냐’의 문제와 상통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하루 전에 옥상의 균열과 사무실 문의 아귀가 맞지 않는 문제 등 붕괴 조짐을 안건으로 한 회의가 열렸다. 게다가 붕괴 당일 여러 차례 열린 대책 회의는 회장 이준을 비롯한 백화점 관계자들이 붕괴 전조 현상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붕괴가 진행 중이던 당일 오후 4시의 2차 긴급대책 회의에서 구조기술사 이학수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이준을 안심시켰고 백화점은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채로 매장 영업을 이어갔다. 일각에서는 미필적인 살인으로 해석하고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필적 고의’는, ‘어떤 행위로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행하는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 이준을 필두로 한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은 백화점이 붕괴할 것이라 짐작하였을까. 건물 자체가 순식간에 무너진 일은 선례가 없었기에 상상도 못 한 일이었을까. 검찰은 삼풍백화점 관계자들이 ‘백화점이 곧 무너져 많은 사람이 죽는다’는 걸 인지했음을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사고 당일 백화점 간부들이 붕괴 시각까지 백화점 안에 남아 있었고 회장의 며느리 역시 지하매장에서 구조된 사실, 붕괴로 인한 손해가 영업으로 얻는 이익보다 크다는 점 등을 고려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일단락되었다.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회장 이준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삼풍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뇌물수수죄를 적용하여 각각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300만 원,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200만 원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은 사장 이한상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실형이 선고되었지만 삼풍백화점 인허가와 관련된 비리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준 회장 인터뷰 (휴먼TV 다큐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영상 캡쳐(99년 9월 2일))
이준 회장 인터뷰 (휴먼TV 다큐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영상 캡쳐(99년 9월 2일))

 

 

님들의 크신 희생

 

삼풍백화점 붕괴는 하나의 사건으로 언급되기보다는 대체로 성수대교 붕괴와 묶어서 거론된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리기 약 8개월 전인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경 한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교량의 하나인 성수대교가 붕괴하였다. 성수대교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한강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다리를 통과 중이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버스 1대, 봉고 1대, 자가용 2대 등 차량 4대가 상판의 붕괴와 함께 강물 속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 발생 시간이 아침 출근 및 등교 시간이라 학생을 비롯하여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뒤집혀 추락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16번 버스 안에는 9명의 무학여중과 무학여고 학생이 타고 있었고 이날 이들은 모두 생을 마감했다. 무학여고는 사고 이후 지금까지 추모일을 정해서 이날 숨진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고가 난 성수대교는 동아건설이 1977년 4월 착공해 2년 8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총 길이 1,160m, 폭 19m로 79년 12월에 완공됐다. 사고 후 물 위로 드러난 상판은, 속이 드러날 정도로 상당히 부서졌는데도 철근이 일부밖에 눈에 띄지 않아 육안으로 부실 공사였음을 추정케 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보름이 지난 1994년 11월 4일에 ‘성수대교 붕괴사고 원인 조사의 중간 결과’를 발표하는 대한토목학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한토목학회가 사태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서울시로부터 붕괴 원인 및 사후대책 조사를 요청받기 전인 사고 당일 오후 1시에 서울대 장승필 교수를 위원장으로 한 사고위원회를 자체적으로 구성하여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한 중간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토목학회가 성수대교 붕괴 전에 그 교량에 대하여 안전진단을 실시한 적은 없었다.

서울시의 의뢰로 시행된 서울시내 노후 주요 구조물에 대한 토목학회의 안전진단 중 한강 교량에 대해서는 양화대교, 한남대교, 마포대교, 원효대교, 잠실대교, 영동대교 등 6개만 이루어졌다. 안전진단 중 한강 교량의 수중부 기초에 대한 수중조사, 즉 구조물의 외형 조사만 실시하였다. 1979년 완공된 성수대교는 건설 이후 아직 20년이 지나지 않아 안전진단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토목학회가 분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원인은 설계, 시공, 점검 및 유지관리 미비에 있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마찬가지로 총체적 부실이 원인이었다. 직접적 원인과 건축물의 구조적 원인 외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과학적 논리보다 우선하는 정치, 행정 편의, 실적 위주의 논리를 꼽았다.

성수대교가 붕괴되기 전에도 1981년 제주도 현수교 붕괴사고를 비롯하여 공사 중이던 팔당대교와 신행주대교가 붕괴하는 사고가 있었다. 팔당대교 시공업체는 교량 바닥판 구조물 공사를 하면서 설계를 멋대로 변경하고 설계 기준에도 못 미치는 부실공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공사의 시행청인 경기도 공영개발사업단은 부실시공에 의한 사고인데도 불가항력의 사고인 것처럼 건설부에 허위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성수대교가 붕괴하기 불과 몇 년 전에 차례로 교량이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지만 성수대교 붕괴를 막지는 못했다. 모두 부실공사와 점검 및 관리 부실로 인해 일어난 사고였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주저 앉고 1년이 지나기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서울 중심부의 고급 백화점이 불과 완공 5년여 만에 붕괴한 사고는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0여 년 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연상시키는 이 끔찍한 사고는 처음부터 부실시공의 비판 속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아니라 도심지의 초호화 백화점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더더욱 할 말을 잃게 했다. 붕괴 사고 이틀 후인 1995년 7월 1일 서초경찰서에 출두한 회장 이준은 기자들을 향해 “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준은 7년 6개월의 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했다. 당뇨와 고혈압, 신장병으로 투병하던 그는 출소 후 6개월이 지나 노환으로 사망했다. 

애초 서울시는 사고 직후 유족들에게 사고 현장에 위령탑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유족 보상금으로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백화점 용지를 팔았고, 위령탑은 사고와 전혀 무관한 양재 시민의 숲에 세워졌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75-3번지에서 5km 떨어진 양재 시민의 숲에는 502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삼풍참사 위령탑’이 서 있다. 매년 6월 29일이면 유가족은 강변북로 한복판에 서 있는 위령탑에 들러 탑에 새겨진 그리운 이의 이름을 어루만진다.

 

삼풍위령탑 (직접촬영)
삼풍위령탑 (직접촬영)

 

 

‘성수대교사고희생자 위령비’는 성수대교가 멀리 보이는 서울숲 인근에 세워졌고 위령비에는 무학여고 교사로 재직한 변세화 시인의 추모시가 적혀 있다. 

 

“이 증언의 강 언덕에 오늘 부끄러이 조촐한 돌 하나 세워 비오니 님들의 크신 희생 오랜 날 깨우침 되오리니...” 

 

성수대교 붕괴로 목숨을 잃은 어느 무학여고 학생의 학부모는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든지 올 수 있어. 올 수 없다고 장담 못 해요. 미리미리 방지해 줬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냐 이거야”라고 말했다. 그는 5년 뒤에 자살을 선택했다.

 

 

- 박수연: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재학. 호기심과 열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가 균형을 이루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안치용: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김민주: 경희대학교 외식경영학과 3학년 재학. 지나치기 쉬운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그저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는 중이다.

- 신다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메모리[人]서울프로젝트 기억수집가. 『1995년 서울, 삼풍』,

서울특별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백서』, 1996.06.00.

홍성태. 『사고사회 한국』, 2017.06.16.

홍성태. 『삼풍사고 10년 교훈과 과제』, 2006.04.05.

 

2. 기사

「23년 전 오늘, 멀쩡한 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한겨레. 2018.06.29.

「삼풍백화점 붕괴-설계서 감리까지 총제적 不實」, 중앙일보, 1995.07.26.

「`전원 유죄'로 끝난 삼풍참사 법정소송」, 한국경제. 2005.06.30.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원인-설계.감리.준공검사 총체적 부실」. 중앙일보. 1995.07.01.

「[사회부 24시] 삼풍백화점과 그라운드제로 그리고 세월호」, 중앙일보. 2015.07.01.

 

* 학술논문 

 편집부. (1994) 성수대교 붕괴사고 원인조사의 중간결과. 대한토목학회지, 42(6), 21-23

 전몽각. (1995), 성수대교의 붕괴. 대한토목학회지, 43(1), 10-15

 

* 기사

 무학여자중학교.고등학교 학생들 등교길 참변, KBS 뉴스 9,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버스승객등 24명 사망」, 연합뉴스, 1994.10.21..

 「성수대교 붕괴현장 스케치」, 연합뉴스, 1994.10.21..

 「인재가 부른 참사 ‘팔당대교 붕괴’」, 중부일보, 2017.11.05.

 「준공 5개월 앞두고 무너진 신행주대교」 동아일보, 2017.7.31.

 「신행주대교 부실공사 의혹」, 동아일보, 1992.8.1.

 「<緊急診斷> 성수대교 붕괴사고 전문가 진단(3)」, 연합뉴스, 1994.10.21..

 「삼풍백화점 건물 붕괴」, 연합뉴스, 1995.06.29.

 

 * 영상

 다큐멘터리영화「논픽션다이어리」, 정윤석, 2013.

 

 * 블로그

  「더 가까워야 잘 기억할 텐데 : 서울에 있는 사회적 참사 추모 공간」, 서울문화재단, 2020.6.10.

 

 * 단체

  무학여자고등학교 동창회

 

 * 기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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