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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자의 '자기력'(magnetic force)
[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순자의 '자기력'(magnetic force)
  • 지승학(영화평론가)
  • 승인 2021.03.3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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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나리>

자전적 서사는 자석과 같다. 뭔가를 끊임없이 자기 위치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영화<미나리>는 자전적이기도 하거니와 자석과도 같은 이런 '자기력'(magnetic force)을 가진 두 개의 힘이 각각의 서사 속에 놓여 있다. 하나는 부모의 서사에, 다른 하나는 자식의 서사에. 그래서 두 서사는 어떤 때는 서로 붙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대립각을 세우 듯 서로 밀어내기도 한다.

 

이를 테면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앤(노엘 케이트 조)과 데이비드(앨런 킴)는 미국사회에 적극 다가가려는 노력을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데이빗과 앤(노엘 케이트 조) 역시 할머니 순자(윤여정)에게 반감과 친근함을 번갈아 드러낸다.

 

그 과정 속에서 할머니 순자(윤여정)는 어떤 기적을 일으킨다. ‘재미교포’와 ‘재미교포 2세’와의 세대 간 이야기로도 보이고 ‘한국인’과 ‘미국인’의 관계로도 보이는 이 서사의 얽힘 속에서 서로를 가장 강하게 밀어내는 순간에 순자의 자기력은 극에 달한다. 저항의 간극들을 모두 붕괴시키는 핵융합과 같은 어마어마한 자기력을 점진적으로 발휘하기 때문이다. 

 

먼저 순자는 수맥탐지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농장을 위한 수맥탐지보다 미나리를 위한 순자의 눈썰미가 더 정확했던 이유는 이를 더 없이 잘 설명해준다. (사실, 수맥탐지 역시 전자기력을 응용한 것이라 하니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음으로 순자의 자기력은 데이비드의 심장병에서 발휘된다. “뛰지마.” 데이빗이 거역하면 안 되었을 이 금기의 명령은 결국 순자의 자기력에 의해 완전히 극복된다. 의학적으로도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이 일은, 자연스레 늘어난 운동량 때문이라고 건조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순자의 자기력이 데이빗에게도 전이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이유는 이렇다. 데이빗의 심장판막의 중심이 점점 좁아지게 된 기적은 비유적으로 마치 자기력이 자기중심을 향해 힘을 발휘하듯 판막 자체에서도 그 힘이 발휘된 덕분이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자의 자기력은 자신의 몸에서 나타난다. 갑작스런 풍으로 마비된 그녀의 몸, 한 쪽 팔이 몸 중심에 붙어버린 듯 보이는 그녀의 몸은 자기력을 은유적으로 잘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자기력은 매우 함축적이다. 모든 갈등의 간극이 하나의 중심으로 모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핵융합에서 그러하듯 이런 현상에서는 반드시 '열'이 발생한다. '화재'라는 사건이 결정적인 이유는 그래서다. 

이를 종합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모든 걸 불태워버린 화재는 마비된 몸의 나약함이 빚어낸 비극이 아니라 모든 걸 ‘녹여낸’(녹일 융(融)) 신뢰 회복의 순간이라는 것. 이른바 ‘융합’(融合)이라 할 수 있는 이 순간은, 영화 속에서 재현된 모든 갈등, 부부의 갈등(깨질 뻔한 제이콥과 모니카의 관계), 세대 간의 갈등(데이비드와 순자), 인종 간의 불신(폴과 제이콥)들을 모두 녹여내어 일종의 신뢰 회복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게 순자의 자기력에 의한 신뢰 회복의 순간은 제이콥과 데이빗이 미국 아칸소의 한 개울가에서 ‘미나리’를 차분하게 수확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불'(열,화재)과 대비되는 '물'에서의 '미나리'. 그 미나리는 모든 대립을 녹여낸 결과이자 순자의 자기력 그 자체이기도 하다. 윤여정이 거둔 놀라운 성취는 바로 그 수많은 대립을 녹여내는 자기력, 그 융합을 향한 정확한 연기력 덕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순자의 자기력이 행한 일련의 기적들과 중심을 향해 무너진 그녀의 몸 그리고 그 몸 상태 탓에 벌어진 화재 사건은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신뢰, 화합, 공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들이라고. 그러므로 순자의 자기력은 의학적 뇌졸증으로서, 개인적인 불행으로 귀결된 것이라고 말하기보다 사회적 메시지로서 사회적 융합으로 새롭게 종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자에게 전 세계가 매혹당한 것은 전에 없던 이러한 융합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미나리>의 강렬한 힘은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서사가 지닌 자기력과 (윤여정의 연기력에 의한) 순자의 자기력에 의해서 그렇게 밀도 높게 발휘된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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