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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의미하는 것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수호’가 의미하는 것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1.03.3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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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이라는 자가 사퇴의 변으로 “국민보호”를 이유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들먹였다는 사실은 대단히 서글픈 일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보호를 원하지 않고, 개인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에 극도의 불편함을 느낀다.

 

자유주의자들만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고, 또 그걸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그가 자신의 표현처럼 “헌법적 가치의 수호기관인 검찰”의 최고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어이없다. 그의 얘기를 더 열거하면, “헌법과 법치가 파괴되고, 상식과 정의가 무너지는 걸 더 이상 지켜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 헌법엔 ‘표현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는 담겨 있어도, ‘사상의 자유’는 별도로 명시돼 있지 않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세워 집권층을 거스르는 견해를 갖는 이들을 사상범으로 내몰아 압박하고 탄압할 수 있었던 것은 법률 지식을 출세와 영달의 발판으로 삼아온 검사와 판사 같은 이른바 ‘법돌이’들의 적극적 지지 내지 소극적 고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이 꼭 집어 강조한 ‘자유민주주의 수호’는 그동안 옳지 못한 집권세력이 전유해 온 사상의 ‘독점’과 또 다른 사상들의 ‘배제’를 떠올리게 하는 셈이어서 곱씹을수록 씁쓸하다. 윤석열처럼 헌법이나 법률을 자주 들먹이는 이른바 ‘법돌이’들의 세계관은 달달 외운 법조항의 디테일에 근거한 것이어서 법률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그들의 직업적 전문성과 소명의식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총장 사임 기자회견 중인 윤석열>, 2021 - 뉴스1
<윤석열 총장 재임 시절에 지지자들이 보낸 격려 화환들>, 2020- 뉴스1

 

‘사상의 자유’가 빠져있는 헌법

사상의 자유를 옥죈 이승만의 의도였을까?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의 미필적 고의였을까? 이 나라의 헌법에는 사상이라는 단어가 철저하게 배제돼 왔다. 그렇다보니 사상의 자유가 집권세력과 ‘법돌이’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종종 오독되고 왜곡된다. ‘사상’이라 함은 쉽게 말해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의미한다. 자유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로 사상의 범주를 국한시킬 수는 없다. 윤석열이 태극기 부대의 지지 속에 과거 권위주의시대에 사상범을 갈랐던 ‘자유민주주의’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꺼내든 것은 세계관이나 인생관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다. 필자는 그의 말 한마디에서 과거 독재정권에 부역한 법돌이들의 ‘사상의 구분짓기’라는 행태를 심각히 느낀다.

사상의 구분짓기는 왜 위험한가? 일부 학자들은 사상의 자유가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해석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는 결이 다르다. 전 세계 헌법의 전범인 인권선언과 유럽연합(EU) 기본권 헌장이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심지어 전범국인 일본헌법에서조차 ‘사상 및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데도 우리 헌법에서는 사상을 아직 금기시하고 있다. 계몽주의시대의 비판적 지식인 볼테르가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사상을 말할 권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말한 사실은 교양상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검사들에겐 한마디로 미친 객소리다. 사법고시 9수를 하면서 법조항을 깡그리 외운 윤석열이 이런 헌법의 틈새를 놓칠 리 없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적시하고 있는 만큼, 민주주의의 기본 상식은 사상의 자유를 구가하고 이를 보장하는 것인데도 검찰총장이라는 사람이 자유민주주의 외의 여타 사상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면, 그건 분명 정치적이며, 초헌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이 밀레니얼 세대의 현실적 다원주의 및 다양성에 위반되는 철 지난 자유민주주의를 들먹였다는 점은 자신을 유력 대권주자로 부상시킨 보수세력에 대한 화답으로 읽혀진다. 

자유민주주의는 어원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학적 결합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사실 자유주의에 방점을 둔다. 내 능력대로 산다는데 뭔 상관이냐는 듯이, 끼리끼리 정보를 교환하며 고가의 아파트 몇 채를 사들이고, 아이들에게 고액 과외를 시키고, 각종 스펙을 만들어 유학을 보내고, 사법기관이나 정치권과 끈끈한 관계를 맺어 탈법과 불법을 저지르고도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 게 지금껏 한국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행태였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사실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은가? 만일 윤석열의 장모가 가짜 은행잔고를 만들고 불법 경매에 나서 수십억 원의 부당이익을 냈다면, 검찰개혁에 기세당당했던 검사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는커녕 오히려 감싸고 수사를 방해한 게 아닌가?

한국의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사무엘 헌팅턴이 1989년 구소련 붕괴당시에 선언한 ‘공산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흔히 들먹이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민주의와 같은 좌파 이데올로기를 악마화하고 그 종말을 주장해왔다. 지난 30여 년간, 집권세력과 자본세력, 재벌언론들은 선거 때마다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목청껏 외쳐대고, 색깔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댔다. 

그 결과, 친기업적인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급속도로 이뤄지고, 중고교와 대학, 취업, 취미, 특기, 직장 등이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이 되고, 이 자본을 취득하는 데 자본의 크기와 양이 결정적으로 작용해왔다. 동년배들이 꿈을 접고 한창 생업에 뛰어들 때, 윤석열이 장기간 고시낭인으로 지내며 ‘검사’라는 상징자본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는 대학교수이던 부친의 든든한 경제력이 자리한다. 윤석열이야 용케 사법시험에 합격이라도 했지만, 부모의 경제력이 취약한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세상을 등져 사는 낭인이 되거나, 눈을 낮춰 어거지로 밥벌이를 하기 마련이다.

 

철지난 자유민주주의와 ‘사상의 구분짓기’ 

대학교수의 아들이자, ‘서울법대생’, 그리고 ‘검사’였던 윤석열이 만난 이들은 거의 대부분 그 자신처럼 능력과 실력을 앞세운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다. 윤석열의 장모가 연루된 이른바 ‘정대택 사건’에서, 나경원 의원의 남편 김재호 판사가 별다른 이유없이 재판을 1년 이상 미루며 윤석열 장모측에 시간을 벌어준 것(MBC <스트레이트>, 2020년 3월 보도), 윤석열의 아내 김건희씨가 대표로 있으며 재벌들의 막대한 후원을 받은 전시기획사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당한 것, 서울대 실험실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교수연구진의 개인지도를 받아 해외 SCI급 논문에 이름을 올린 나경원 전 의원 아들의 스펙쌓기 특혜의혹, 나 전 의원 딸의 학교성적 수정 등에 대한 무혐의 처리 등은 그들만의 ‘능력과 실력’에 기반한 것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국민적 법의 상식에 어긋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의 사익만 추구하는 이기적 자유주의자일지언정, 평등과 공정을 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틈만 나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자신들처럼 능력 있는 1%가 나머지 99%를 지배하기 위해 동원하는 선전술에 다름 아니다. 정치, 사법,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전반의 시스템은 그들의 배를 더 불려주는 합법적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찰개혁, 교육개혁, 경제개혁, 세제개혁 등 개혁이라는 단어에 어떻게 그렇게 격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들의 기득권에 조금이라도 위배될라치면 그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며, 아나키즘이고, 좌파이며, 종북이다. 

사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포함)는 공동체 유지에 필수적인 보완관계에 있다.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 당시, 미연방은행이 사회주의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해 자유주의자들이 초래한 금융자본의 위기를 가까스로 수습한 것도, 앞서 1997년 극단적 자유화로 인한 규제완화와 민영화로 촉발된 금융위기를 극복한 것도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적 합의의 결과였다. 

거대 금융자본의 횡포에 맞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모토를 앞세운 오큐파이 운동이 일어나, 상위 1%가 대부분의 자산을 독점하는 기형적인 사회구조의 해체를 요구하는 성난 목소리가 시애틀에서부터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도쿄, 서울에 널리 울려 퍼졌다. 그렇게 ‘자유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이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민주주의 기반이 취약한 지역에서는 패거리를 진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역습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서 기승을 부리며, ‘그들만의 울타리’를 높이 친 자유민주주의 세력은 촛불시민혁명의 염원을 안고 탄생된 문재인 정권에 들어 개혁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다음 정권의 도약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윤석열이 사퇴의 변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내뱉자 태극기를 앞세운 자칭 ‘자유민주주의자’들이 쌍수를 들어 열광하며, 그를 대권 후보 지지율 1위에 올렸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TBS 의뢰로 3월 5일 전국 만 18세 이상 1천 23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를 조사한 결과, 윤석열은 32.4%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4.1%,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14.9%였다. 만일 그가 정치무대에 오른다면 대단히 성공적인 데뷔인 셈이다.

윤석열의 ‘색깔론’을 보면서, 필자의 뇌리에는 과거 박정희 유신독재의 풍경이 설핏 떠오른다. 돌이켜 보자면, 자유민주주의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이념이었고 태극기부대의 로망이기도 하다.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을 맡았다가 1946년 대구 10·1 사건 당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박정희는 그 후 180도 전향해 자신의 사상적 순수를 과시하듯,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살육됐다. 

그럼에도 아직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그들은 입만 열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열창한다. 윤석열이 얼마 전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성지격인 대구에 다녀온 뒤,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패싱하며 문 정권 하의 헌법과 법치가 파괴되는 꼴을 참을 수 없어 ‘거사’를 결심했다고 말한 대목은 총과 탱크만 들지 않을 뿐, 쿠데타에 버금가는 폭탄선언이다.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으면서, 국민보호 운운하며 무소불위의 발언을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쿠데타로 대통령직을 강탈한 전두환의 골목길 기자회견을 연상케 한다.

 

검수완박 vs. 검수완독 

박근혜 정권 당시, 헌법 제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구를 놓고, 당시 집권층과 보수언론, 재계는 자신들이 누려온 탐욕를 정당화하려는 문구인 ‘자유’를 민주 앞에 넣고자 온갖 여론전을 펼쳤으나, 사회적 갈등과 대립만을 부추겼을 뿐 무위로 끝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의 목적은 선거를 앞두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일 뿐, 국민의 ‘자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들의 ‘자유’와 일반 국민이 소망하는 ‘자유’는 엄연히 다르며, 오히려 상반되기까지 하다. 그들의 자유는 자신들의 권력과 재력, 능력에 기반해, 물질적 소유와 교육, 문화, 정신, 사상, 언론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이익과 탐욕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적 자유’이며, 급기야 그들은 헌법에 자신들의 이기적 자유를 영구히 보장하는 문구의 명문화를 기도하기까지 했다.

반면에 일반 국민이 소망하는 자유는 ‘자유’를 독점하는 세력에 적절한 나눔을 요구하는 ‘사회적 자유’다. 헌법 제1조에서 굳이 ‘자유’를 적시하지 않은 이유는 자유주의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특정세력의 ‘자유’만이 아닌 모든 이들의 자유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이 문재인 정권의 검찰개혁에 대해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총장직을 사퇴했으나, 그 진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설마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려 선량한 국민보호를 이유로 자신들의 검수완독(검찰수사권 완전독점)을 끝까지 부여잡고, 구시대적 사상전쟁을 벌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무위적인 허탈감 때문이 아닐까? 자유민주주의자들로 위장한 세력의 바람대로, 설마 내년 3월 9일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나서는 ‘용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국민앵커’ 손석희씨가 대표이사로 있는 JTBC에서는 윤석열의 식성에 대해 “삼겹살, 돈까스, 빵, 그리고 무한대의 주량”이라는 대식가적인 ‘식탐’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그의 식성취향이 과연 뉴스가치가 있는 건지 의아하지만, 그가 사퇴의 변에서 내비친 자유민주주의에의 열망은 한낱 대식가다운 식탐에 불과한 건 아닐지?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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