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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와 ‘보고 듣기’
‘읽기’와 ‘보고 듣기’
  • 홍세화
  • 승인 2011.09.07 18: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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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중에는 <르 디플로>가 잡지 판형으로 바뀌길 바라는 분이 있다. <르 디플로> 한국판이 프랑스판처럼 신문 판형을 고집하는 데에는 ‘월간지이지만 신문’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다. 대중매체의 발전은 적은 사람이 ‘읽는’ 데서 모든 사람이 ‘보고 듣는’ 쪽으로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은 읽고, 텔레비전은 시청한다(보고 듣는다). 잡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은 신문에서 텔레비전 쪽으로 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잡지를 읽는 대신 본다. 매일 신문을 읽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요즘엔 신문도 ‘읽는다’고 말하는 대신 ‘본다’고 주로 말한다. 실제로 신문 읽는 사람(독자)이 줄어드는 건 세계적 현상인데, 그들 대부분은 신문을 들춰 ‘본다’. <르 디플로>는 보는 신문이 아니다. <르 디플로>가 월간지이라는 점은 ‘읽는’ 신문으로서 강점일 수 있다. 이 고정란의 이름도 ‘르 디플로 읽기’다.

과거에 읽는 사람은 소수였다. 읽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무식함에 대해 알고 있었다. 헛헛함이 있었다. 모두 보고 듣게 된 만큼 좋아진 오늘날엔 그 유식함이 거의 사라졌다. 헛헛함도 사라졌다. 대중민주주의가 가진 양면성의 배경 중 하나다. ‘나는 주로 읽는가, 아니면 보고 듣는가’는 주체화와 관련된 물음이다. 주체화의 시각으로 볼 때, 읽는 행위와 보고 듣는 행위는 그 모습만큼 다르다. 읽는 행위가 주체적인 것에 가깝다면 보고 듣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편함을 추구하는 존재인데, 읽는 행위는 보고 듣는 것에 비해 불편하다. 읽느냐, 보고 듣느냐의 차이는 책꽂이가 있는 책상 앞의 딱딱한 의자와 텔레비전 앞의 안락한 소파의 차이와 같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 공짜는 없다. 사람들이 불편하게 읽을 거리는 큰 비용이 들지 않지만, 편하게 보고 들을 거리는 큰 비용이 든다. 그것은 도서관 서가에 가만히 꽂혀 있는 책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신문과 방송의 차이로도 알 수 있다.

종이신문이 사양길에 있는 것은 인터넷의 확산 탓만이 아니다. 조·중·동은 재빠르게 종합편성채널 방송을 차지했다. 대중매체는 앞으로 자본에 더욱 종속될 것이다. 작은 자본에서 큰 자본으로의 이동만 남았다. 그만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겠지만 읽는 시민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체적 시민이 없는 곳에 SNS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태어나지 않고 길들여지듯, 주체적 시민도 태어나지 않고 형성된다. 때때로 불편함을 선택할 줄 아는 존재일 때 권력에도 불편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불편하게 읽는 시민이 사라지고 편하게 보고 듣는 소비자로만 남을 때 <르 디플로> 8월호에 실린 ‘금-언 복합체 시대’는 우리에게도 성큼 다가올 것이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 모른다. 이번호의 ‘신문 접수 나선 자본가들’(7면)은 프랑스의 종이매체들이 빠져 있는 질곡을 보여준다. 바야흐로 ‘금-언 복합체’의 권력 장악은 세계화 현상의 하나가 되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처럼 미디어재벌 자신이 정치권력을 차지하는가, 아니면 조·중·동처럼 대리인을 내세우는가의 미세한 차이만 남아 있다. 

<르 디플로>를 ‘읽는’ 한분 한분의 독자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누구나 아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글•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판 편집인  editor@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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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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