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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열정과 치유를 넘어선 공존, 사랑
[이주라의 문화톡톡] 열정과 치유를 넘어선 공존, 사랑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12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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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 단행본 표지 (Ⓒ알라딘)
너무 한낮의 연애 단행본 표지 (Ⓒ알라딘)

1. 결연하게 사라진 피시버거 - 사랑은 열정이라는 낭만적 착각

김금희의 단편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2016)는 제7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2009년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금희 작가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을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필용이라는 한 중년 남성이 20대 시절에 겪었던 사랑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20대 때 함께 어학원을 다녔던 양희라는 후배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는 고백을 듣고 당황하던 필용이, 양희가 내일은 그 사랑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자 그 사랑이 불안해져, 그 후 날마다 “오늘은 어때?”라고 계속 양희의 사랑을 확인하다가, 다시 어느 날 갑자기 양희가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이라고 말하자, 혼란에 빠져 버린,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필용과 양희가 20대 때 맥도날드에 앉아 나누었던 사랑에 대한 위와 같은 대화는 사실 이 소설을 가장 인상 깊게 만드는 부분이다. 종잡을 수 없는 양희의 사랑 방식이 꽤나 매력적이면서도 알쏭달쏭하여 해석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소설이 양희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화자인 필용의 시선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필용으로, 철저히 필용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필용의 삶의 한 순간에서 일어난 위기와 성찰과 깨달음을 보여주게 된다. 모든 소설이 언제나 어떤 깨달음을 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용의 변화는 어떤 깨달음에 기반하고 있다. 필용은 대기업 영업팀장의 지위까지 올라갔다가 돈 처리 문제로 시설관리팀 직원으로 징계성 인사 통보를 받게 된다. 사회적 위치의 전락, 소설의 주인공에게 시작된 위기다. 그의 위기는 20대 때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던, 자신도 어쩌면 사랑했을지도 모르는 양희를 다시 재회하면서 어떤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양희가 공연하는 연극 무대에서 양희와 재회한 후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필용의 위기는 퀸의 노래를 부르며, 구해줘, 구해줘, 구해줘를 반복하는 필용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랬던 필용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의 상태로 변한다. 이 작품은 ‘구해줘’를 부르며 울던 필용이 ‘구해줘’라는 말을 지우며 얻게 되는 깨달음에 대한 소설이다.

퀸의 <구해줘>를 부르며 우는 필용은 비장하고 결연하다. 20대를 떠올리며 들어간 맥도날드 매장에서, 이제는 더 이상 피시버거를 팔지 않는다는 말에, 그 결연하게 사라진 피시버거를 떠올리며, 그 비장함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피시버거와도 같이 필용에게 어떤 존재는 있다가, 비장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필용은 ‘있다/없다’의 이분법적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필용에게 ‘있다’는 ‘하다’의 의미와 동일하다. 삶이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무언가를 ‘한다’의 의미이며, 감정이 ‘있다’는 것은 낭만적 열정을 가지고 사랑을 ‘한다’라는 의미이다.

필용이 살아가는 ‘있다=하다’의 세계는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삶을 추구한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서 징계를 받고 사회적 명예와 위치가 사라진 채 존재의 가치 ‘없음’을 느낀 필용은 그래서 맥도날드에서 발견한 양희의 연극 현수막을 보고 그것을 운명의 계시라고까지 느낀다. 사회적 위신이 사라진 현재의 ‘없어’ 보이는 삶을 20대 때 양희와의 사랑에 대한 추억으로 다시 ‘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필용에게 사랑은 자신의 초라한 상태를 그렇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수단이다. 필용의 목적지향적인 삶에서 사랑은 자신의 존재의 없음 상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열정을 불러 일으켜 주는 상태로 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삶의 열정을 끌어올려주는 사랑, 그 사랑은 열정을 기반으로 한 낭만적 사랑의 전형성을 담지하고 있다.

필용에게 사랑은 대중문화 속에 구현된 낭만적 사랑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필용은 양희의 고백이 너무 덤덤한데다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인 말이어서, 양희가 자신을 농락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필용은 양희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내 평생의 사랑>과 같은 노래를 듣는다. 필용이 생각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평생을 다 바쳐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 그래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무언가를 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양희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고백하였을 때, 필용은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 라고 묻는 법밖에 몰랐던 것이다. 무언가를 해야지만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무언가를 꼭 해야만 하는 것일까? 썸을 타고, 고백을 하고, 데이트를 하고,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하고. 이 ‘하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행동들이 과연 사랑의 본질일까. 또한 사랑이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 차야만 하는 것일까.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구해줘’와 같은 절박한 사랑을 외치며 울던 필용이 ‘구해줘’라는 말을 지워내고도 남는 그 어떤 사랑의 본질을 깨달아 가는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열정을 기반으로 한 낭만적 사랑의 도식이 사랑의 보편 공식으로 자리 잡았던 그간의 사랑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너무 한낮의 연애 드라마 포스터 (ⒸKBS)
너무 한낮의 연애 드라마 포스터 (ⒸKBS)

2. 부끄러워서? - 사랑하는 약자, 사랑받는 강자

필용은 낭만적 사랑의 도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뭔가 극적이고, 열정적이고, 뜨거운 연애를 바란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데이트를 하든, 섹스를 하든, 어떤 행위의 주고받음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필용의 태도는 표면적으로 보면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모습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용은 자신의 감정 앞에서는 매우 소극적이다. 그는 양희의 고백 이후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를 감지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양희가 자신을 오늘도 사랑하는지다. 양희가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안심을 하지만, 늘 양희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까봐 불안해한다. 전적으로 양희의 감정에 매달려 있다. 물론 필용도 양희와의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런데 그 고민은 매우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것이다. 필용이 양희와 사랑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고민하는 것은, 양희가 자신의 애인으로 적합한 조건을 갖추었나이다. 양희가 자신의 허풍 섞인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좋으면서도, 양희의 외모, 가난 그리고 거기에서 묻어나오는 무기력은 싫다. 심지어 은근히 경멸스럽다. 양희와 같이 있는 순간, 양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은 불가해한 기쁨을 느끼면서도,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다 보면 결국 양희는 자신의 애인이 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필용은 매우 영리하게 사랑의 조건들을 따져서 손해 보지 않는 연애를 하려고 한다. 그래서 필용은 양희가 해 주는 사랑 고백을 매번 손쉽게 받아먹는다. 필용은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순간의 기쁨을 받기만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한 사람의 존재 가치를 발견해 주는 일이며, 그의 가치를 아름답게 표현해주려는 노력이어서, 상대의 존재를 밝게 빛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필용은 양희가 표현하는 사랑을 받기만 한다. 이를 통해 그는 매일매일 그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다고 여기며, 삶의 만족을 얻는다. 그래서 필용은 양희의 사랑을 꼭 붙잡고 싶다. 낮은 자존감으로 허세를 부리던 자신의 결핍을 양희의 사랑으로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양희의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 사랑은 필용의 것이 아니었다. 연인 간의 사랑이란 상대가 주는 사랑을 받아먹기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두 사람이 함께 주고받으며 키워나가는 에너지다. 양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고, 그 감정을 필용에게 끊임없이 나눠준다. 이와 달리 필용은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신이 양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양희의 조건에 대해서만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필용은 자신의 감정 에너지를 투여하지 않아도 그 사랑이 영원하기만을 바랐다. 자신의 감정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사랑이 지속되거나 커져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비겁한 욕심이다. 필용은 사랑 앞에서 소극적이고 비겁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들키는 것이다. 사실 필용은 양희에게 분명 어떤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 필용이 느끼지 못했을 지라도 말이다. 구두쇠인 필용은 양희에게 자신의 돈을 썼으며, 허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양희의 고백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양희가 자신의 사랑을 철회한 후 그는 양희에게 매달리게 된다. 결국 그는 양희에게 고백을 하러 간다. 하지만 필용은 양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양희에게 “연민과 구애의 비틀어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필용은 자신의 마음을 양희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한다.

필용은 왜 사랑의 고백을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사랑의 고백은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때 괜찮다는 의미는 항상 나‘보다’ 괜찮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사랑하는 상대는 언제나 하찮은 나보다 빛나는 존재라서, 나는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늘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사랑은 자신을 낮추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필용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 있어 보임은 생존경쟁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할 애인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생존 경쟁 사회의 눈으로 봤을 때, 있어 보여야 했던 것이다. 필용에게 삶은 끊임없이 우열 관계를 가리는 일, 남보다 더 나아보이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양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양희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약자가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약자는 상대에게 많은 것을 내어준다. 사랑은 자신이 무언가를 내어줄 수 있음을 스스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 물론 사랑은 낭만적 사랑에서 말하는 완전한 내어줌이 아니라 서로의 주고받음이지만, 어쨌든 주는 게 있어야 받는 게 생긴다. 필용이 끊임없이 따졌던 조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감정 에너지의 주고받음 말이다. 필용은 사랑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을 일종의 패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필용은 낭만적 사랑과 같은 뜨거운 감정의 열도를 원하지만, 그 감정의 열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랑을 투여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주는 것만이, 사랑을 받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한낮의 연애 드라마 포스터(ⒸKBS)
너무 한낮의 연애 드라마 포스터(ⒸKBS)

3. 그 연극의 콘셉트는 힐링이 아니야 - 함께 하는 사랑

생존 경쟁이 치열해 질수록, 우리의 자존감은 점점 약해져 간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는 무언가를 못한 사람, 무언가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약해진 자존감을 강화시켜주는 것은 칭찬이다. 내 스스로의 칭찬도 좋고, 타인의 칭찬도 좋다. 보통 우리는 타인의 칭찬에 더 후한 점수를 매기는 경향이 있다. 타인이 가장 많이 나를 칭찬해 줄 때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칭찬을 받고 그렇게 자존감을 강화해 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는 사랑이 힐링이라고 여긴다. 내 상처 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전해주는 좋은 에너지를 통해 나의 자존감을 키워나가려는 것이다. 그래서 필용은 양희의 연극 콘셉트를 힐링이라고 생각한다. 연극 무대에서 양희가 관객의 눈을 바라보며 관객의 마음을 읽어 주고, 공감하며, 감정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희의 연극 콘셉트는 힐링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우가 관객을 위로하는 연극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에너지의 투여가 아니라는 말이다.

양희의 연극 콘셉트는 공감, 공존, 혹은 함께함이다. 배우가 마주앉은 관객과 눈을 맞추며 공명하는 그 순간의 에너지가 양희 연극의 전부이다. 관객과 배우가 모두 자신의 감정 에너지를 풀어낼 때,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공명의 순간을 만들고, 고양의 순간을 만들 수 있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어느 한 사람의 사랑만으로는 사랑은 커져나갈 수 없다. 사랑은 호혜적 관계다. 나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지만, 상대도 언제나 자신을 초과한 무언가를 나에게 준다. 사랑은 언제나 불공평한 주고받음이다. 여기에서 방점은 불공평이 아니라 주고받음에 찍힌다. 끊임없는 함께함만이 서로가 계속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요즘 많은 사랑이야기가 사랑은 힐링이라고 말한다. 힐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랑은 종종 사랑받는 주체의 상처만 위로해 준다. 즉, 사랑을 받는 대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만 표현하여, 사랑을 받은 대상이 어떻게 자신의 가치를 찾아 나가는지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이러한 사랑의 서사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쉽게 지워진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계속 사랑 받는 대상으로서만 자신을 위치 지우려 한다. 누군가의 사랑을 계속 받기만을 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상처받았으니까. 그러니까 타자인 상대는 나를 계속 위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힐링 받고자 한다. 힐링으로서의 사랑은 이런 이기적이고 수동적인 사랑의 주체를 생산할 수 있다. 사랑은 힐링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무언가를 받을 생각만 한다. 하지만 사랑은 주고받음으로 키워나가는 것이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는 필용의 변화와 깨달음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이 주체의 능동성의 회복임을, 그리고 그 능동성은 낭만적 열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지속성임을 보여준다. 양희에게 너 멋있어 졌다, 꿈을 이루었구나, 등등의 말을 준비했던 필용은 여전히 우열관계 속에서 상대를 파악하는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 안녕이라는 말을, 사랑했니 하는 말을, 구해줘 라는 말을 준비했던 필용도 아직 낭만적 사랑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을 지우기 시작한 필용은 드디어 다른 깨달음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닌 세계, 있지 않음의 세계이다. 사랑은 있고, 없고,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나 있지 않음으로 존재하지만,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 그리고 상대와 함께 그 사랑을 키워나가는 순간, 존재한다. 내가, 나 스스로가 느낀 사랑은 상대와의 헤어짐 뒤에도 있지 않음의 상태로 늘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내가 사랑을 하는 일이다.

 

 

글·이주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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