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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끝까지 보아야 한다, 무엇이 방해하려 하더라도 – 영화 <눈꺼풀>이 기억을 기억하는 법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끝까지 보아야 한다, 무엇이 방해하려 하더라도 – 영화 <눈꺼풀>이 기억을 기억하는 법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04.19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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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꺼풀>의 후반부, 바다 속 거대한 존재가 작은 배 한 척을 손으로 감싸 안았을 때, 우린 섬에서 떡을 짓는 노인이 무엇을 해왔던 것이었는지, 떡을 먹고 먼 길을 가야 한다며 작은 섬에 내렸던 이들이 누구였을지를 알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며 흘러나온 달마에 관한 이야기에, 달마도가 그려진 달력의 4월을, 그리고 단기 4347년과 서기 2014년을 놓쳤다 해도 영화 <눈꺼풀>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2014년의 4월은 우리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때를 알아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앞으로도 이 기억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기억은 우리의 눈앞의 놓인 것들이 덮고 덧씌워질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느 저편에 박혀 굳이 들추어야 딸려 나오게 되었을 때, 그것이 맞잡을 수 있는 감정은 생생함에서 멀어진 후다. 기억이 깊이 새겨진 듯하다가도 눈앞의 현실 뒤에 서고, 결코 잊지 못할 것 같다가도 문득 떠올리는 것으로 바뀔 때, 기억을 놓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영화 <눈꺼풀>은 너무도 단순하고 당연한, 그래서 잠시 잊었을 방법을 제시한다.

 

작은 섬에 홀로 살고 있는 노인, 그는 바다의 움직임과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 소리가 지나간 후 자신이 떡을 지어 먹여야 할 이들이 방문하는 탓일 것이다. 외롭게 홀로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이에게 건네는 따뜻하고 하얀 떡 한 덩이. 그것은 망자에게 보내는 온기이자 예의일 것이다. 이 하얀 떡은 뱀, 지네, 풍뎅이와 같이 결코 하얀 떡과는 어울리지 않는 검은 것들과의 공존 속에서 지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들이 공존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그도 그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그것들 역시 그를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불 속으로 뱀이 들어간다 해도 그가 방 밖으로 놓아주면 그뿐이고, 거미 바로 옆에서 떡을 찐대도 거미가 매달린 그대로라면 떡을 망치지 않는다. 이 섬에서, 망자에게 보내는 하얀 떡을 짓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없다.

파도가 거칠어지고 쇠가 튕기고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바다 멀리서 들려오던 어느 날, 노인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연락을 취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 후 안전한 듯 보였던 섬에 검은 쥐 한 마리가 바닷물에 밀려 들어온다. 검은 쥐는 그가 떡을 빚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던 섬 안의 다른 생물들과는 다른 공포를 드리우며 집안을 헤집는다. 그 사이 배를 타고 섬에 당도한 두 학생과 선생님. 학생들은 왜 이곳에 들러야 하는지를 모를 만큼 앳되고, 선생님은 먼 길 떠나기 전 떡이라도 먹고 가자고 이야기해줄 수 있을 만큼 담담하다. 아직 이곳에 당도하기엔 너무도 아까운 이들은 그렇게 자신들을 배웅해 줄 떡을 기다린다. 그러나 노인의 떡 준비는 검은 쥐로 인해 흔들린다. 쥐를 잡기 위해 휘두른 절굿공이는 망가져 버리고, 불상을 뒤집어 쌀을 찧을 때 절구는 부서져 버린다. 쥐가 빠져버린 우물물은 냄새가 나 더 이상 쓸 수 없다. 이 상황 속에서 그들을 배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노인은 한쪽이 부서진 절구를 우물 속으로 던져 버린다. 홀로 배웅하고, 혼자만의 방법으로 망자를 위로했던, 그리고 안전했던 섬 안에서의 추모를 던진 셈이다. 그가 해왔던 넋의 기림은 분명 최선이었겠지만,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문제가 생겼을 때 홀로는 더 이상의 대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후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절구를 던진 행위는 포기라기보다 새로운 존재를 깨우는 매개로 작용한다. 우물 깊은 곳 어디선가 조용히 잠들어 있어 보이지 않았던 존재, 그 존재는 절구로 인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그것이 손을 뻗어 침몰하던 배를 받아냈을 때, 그것은 노인이 혼자서는 할 수 없던 거대한 움직임의 시작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눈을 떠 카메라를 한참 동안 응시할 때, 우리가 기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다. 결국 관찰하고, 목도하고, 주시하고, 보고 또 보는 것, 바로 이것이 기억을 촘촘히 그리고 두껍게 쌓아 잊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참선을 하다 견디기 힘들만큼 졸음이 쏟아지자 스스로 눈꺼풀을 도려내고 다시 참선을 이어갔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며 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 영화 <눈꺼풀>은 작품 자체로 답한 셈이다. 눈꺼풀을 도려내면서까지 보려고 했던 것, 누군가가 가리려 방해하는 것, 홀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주시, 그것이 바로 기억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이들의 의무일 것이다. 끝까지 당시를 쫓고, 지금에는 어떻게 당시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은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똑똑히 바라볼 때 매일 갱신되는 현재로 끈질기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김없이 봄이 오고 벚꽃이 떨어질 즈음, 누군가는 한 시도 놓을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누군가는 이쯤 되어서야 떠올리며 죄스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죄스러움만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없기에 오래지 않아 휘발될 죄의식이 아닌 오래도록 발휘할 수 있는 굳건한 목도의 힘,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는, 그리고 행동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눈꺼풀>(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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