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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네 아내를 의심하지 말라”-<황해>와 <베를린>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네 아내를 의심하지 말라”-<황해>와 <베를린>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05.03 1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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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포스터.
'황해' 포스터.
'베를린' 포스터.
'베를린' 포스터.

배우 하정우의 영화 속 이미지는 어둠의 정수를 제 몸으로 빨아들여 검은 광채를 뿜어내는 흑석(黑石)에 가깝다. 가혹한 운명의 차가운 물결에 휩쓸려 상처받은 영혼이 살인자 혹은 범법자의 의상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아니 여느 사람들보다 더 끈끈하고 묵직한 감정이 흐른다. 그 감정이 죄의식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해>와 <베를린>에서는 아내에 대한 의심이 이야기의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의심으로 인해 파국을 맞이한다. 이 과정에서 인물의 진심 혹은 인간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하정우가 악역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배경이다.

하정우가 연기한 인물들은 대부분 그 처지와 행적이 처절하다. 그중에서 인생사가 꼬일 대로 꼬여서 가장 대책 없는 인물로 <황해>의 김구남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조선족자치주 연길시의 택시운전사다. 그런데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아내와 연락이 안 된다. 주위 사람들은 아내가 바람이 났을 거라고 수군거린다. 그래서 김구남은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환상에 빠지곤 한다. 그는 노름꾼이고, 빚쟁이이고, 빈털터리인 데다 오쟁이 진 남자일 수도 있다. 이때 검은 유혹의 손길이 김구남을 옭아맨다. 조폭 두목이 거액을 내밀면서 은밀한 제안을 한다. 서울 가서 사람 하나 죽이고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말한다.

김구남은 순식간에 살인 청부업자의 하수인이 된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인다. 제3의 인물들이 김구남의 타깃을 살해한다. 그 순간부터 김구남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의 처지가 된다. 빚을 갚고 아내도 만나보려고 시작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김구남은 얼어붙은 산야를 홀로 헤맨다. 산비탈을 돌멩이처럼 구르고, 운동화는 찢어져 발가락이 다 보이고, 총알을 맞은 팔뚝에서는 연신 피가 흐른다. 김구남은 낯선 땅, 낯선 산자락에 주저앉아서, 셔츠로 상처를 싸매면서 기어이 꺼이꺼이 운다. 그러나 울음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 인생사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한바탕 울음으로 해결될 상황이면 차라리 나은 편이다.

김구남은 마침내 서해의 작은 고깃배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둔다. 배의 주인인 늙은 어부는 김구남의 시신을 뱃전 너머로 짐짝 버리듯 내던진다. 그는 검은 바닷속으로 맥없이 가라앉는다. 이제 연변의 노모는 아들 김구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세상을 뜨고, 서너 살짜리 딸 승희는 고아로 자라날 것이다. 김구남의 불행한 죽음은 아내의 불륜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됐으니, 그 죽음은 헛되고 또 허무하다.

 

'황해' 스틸컷.
'황해' 스틸컷.
'황해' 스틸컷.
'황해' 스틸컷.
'황해' 스틸컷.
'황해' 스틸컷.

김구남은 <황해>에서 자주 어깨를 움츠리고, 이마를 찡그린다. 1월 초순의 어두운 골목 모퉁이에서 자신이 죽여야 할 인물을 기다리는, 새벽 3시의 추위를 견디는 방식이다. 겨울 산속을 홀로 헤맬 때는 외롭고, 살인 청부업자 면정학의 추적 앞에서는 위태롭다. 김구남의 고단한 운명과 퇴로 없는 절망은 무채색으로 표현된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와 영혼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가혹한 운명 앞에서는 다만 쓸쓸할 뿐이다.

김구남이 거주하는 공간은 지하생활자들의 세계이다. 빈 술병과 구질구질한 잡동사니만 나뒹구는 연변의 낡은 아파트이거나, 서울과 지방의 싸구려 여인숙이거나, 남루한 민박집 뒷방이다. 특히 여인숙의 방들은 허름하다는 말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황량하고 서늘하다. 차가운 느낌을 주는 흰색 계통의 곰팡이 핀 벽지와 추레한 이부자리, 주전자만 달랑 놓여있기 일쑤다. 김구남은 그 춥고 더러운 여인숙 방의 무늬 없는 바람벽에 기대어 혹은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악몽을 꾼다. 그 여인숙의 상호 중 하나가 ‘희망여인숙’인 것은 역설적이다.

김구남은 <황해>에서 눌변이다. 대사가 있다고 해도, 투박한 연변 사투리로 낮고 짧게 말한다. <황해>는 어둡고, 낮고, 음울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김구남의 잿빛 겨울 점퍼와 짧은 머리, 콧수염은 이런 특징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외양에 불과하다. 김구남은 거칠고 무뚝뚝하고 우악스러운 사내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이다. 김구남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내의 유골을 품에 안고 밤바다로 나아간 것이다. 이 유골은 아내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김구남은 서해의 흔들리는 물결 위에서 아내의 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김구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아내와 함께한다. 물론 이 행위가 아내를 의심한 죄를 완전히 씻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김구남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베를린>도 <황해>와 유사한 이야기로 전개된다. <베를린>의 표종성은 육체적 강인함과 최고의 격투 실력을 갖춘 야성의 남자이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북한 비밀첩보 요원이며, 지문마저 감지되지 않는 일명 ‘고스트’이다. 당에 대한 충성심도 매우 높은 ‘공화국 최고 영웅’이다. 양복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은 007시리즈에 나올법한 이미지다.

그러나 표종성은 김구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식칼이나 도끼 대신 총이나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해도, ‘도구’에 불과한 인물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는다. 표종성은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한 그 ‘도구’로서의 삶을 거부한다. 그래서 표종성은 배신과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그의 내면은 핏빛 상처로 멍든다. 그 비극은 아내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 표종성은 결말에서 평양의 동중호에게 전화해 복수를 다짐하지만, 실현 가능성은 장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표종성은 부초처럼 먼지처럼 지상을 떠돌거나, 이끼처럼 조용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베를린' 스틸컷.
'베를린' 스틸컷.
'베를린' 스틸컷.
'베를린' 스틸컷.
'베를린' 스틸컷.
'베를린' 스틸컷.

<황해>와 <베를린>에서는 아내에 대한 의심이 스토리 전개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황해>의 김구남이 살인 청부 제의를 받아들인 진짜 이유는 서울에서 아내의 불륜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초반에 김구남의 아내와 관련된 불온한 입방아들을 미끼로 던져놓는데, 김구남은 그 미끼를 덥석 문다. 그래서 김구남은 서울에서 청부살인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아내를 찾아 나선다. 그는 한때 아내를 의심했다. 아내의 불륜은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구남은 이제 아내가 물결을 따라 고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황해>는 마지막 장면에서 김구남의 아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여준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올라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다. 김구남이 마지막으로 기억한 아내의 얼굴은 행복에 가득 차 있다. 아내가 남겼다는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의심의 먹구름을 흩어버렸을 수 있다. 아내가 서울에서 한 남성에게 “남편에게 가겠다.”라고 말해 싸움이 벌어졌다는 전언이다. 여기서 김구남은 안도했을까? 아내의 진정한 마음은 김구남에게 있었음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베를린>의 표종성의 아내 련정희는 독일 주재 북한대사관 통역관이다. 필요에 따라 남성들에게 ‘접대’도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런데 표종성은 음모에 휘말려 아내를 의심한다. “수가 틀리면 마누라까지 고발할 사람의 당성을 어케 의심하갔어?”라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는 처지가 된다. 표종성은 음모를 알고 난 뒤에는 목숨을 걸고 아내를 지키려는 남편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죄 없는 아내를 의심한 죄의 대가는 크다. 그는 총격전의 희생양이 된 죽은 아내를 업고 억새밭을 비틀거리며 걷다가 쓰러지고, 걷다가 쓰러지고, 마침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울컥 울음을 쏟아낸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게 오는 법이다.

<황해>의 김구남과 <베를린>의 표종성은 비극을 맞이한다. 아내에 대한 의심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거꾸로 해석할 수도 있다. 두 사람에게 아내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김구남과 표종성의 선택이 영화 전개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이유다. <황해>와 <베를린>은 기본적으로 액션물이며, 화려한 액션과 복수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들은 외형상 거칠고 사나워 보인다. 하지만 그 인물들의 내면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깃들어 있고, 그래서 <황해>와 <베를린>은 액션 영화의 외피 속에 멜로영화의 속살을 감추고 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 배우 하정우는 아내에 대한 순정과 죄의식을 동시에 지닌 인물들을 질과 결이 다른 액션 연기로 실감 나게 표현해냈다. 바로 이러한 점이 하정우의 매력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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