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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강호아녀>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강호의 의리는 땅에 떨어졌지만, <강호아녀>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1.06.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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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의 ‘홍콩느와르’

지아장커는 현재 중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2018년 영화 <강호아녀>는 지아장커의 초기작 <소무>(1997)의 첫 장면처럼 버스 안에서 시작한다. 때는 2001년, 장소는 산시성의 다퉁. 차오(자오타오)는 이 지역 갱단의 두목 빈(랴오판)의 애인이다. 차오와 빈은 쇠락해가는 광산 도시에서 도박장과 유흥업소 등을 운영하며, 아주 잘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홍콩느와르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오우삼의 <첩혈쌍웅>(1989)의 주제가가 흘러나올 때, 빈은 조직원들과 함께 술을 나눠마시면서 “하나가 되자”고 외치며 ‘의리’를 강조한다. 그들은 또 한자리에 모여 황태래의 홍콩느와르 영화 <강호정2-영웅호한>(1988)을 넋을 놓고 지켜본다. 총소리가 난무하고, 주윤발과 유덕화가 주먹으로 피 터지게 치고받는 장면이 화면에 비친다.

 

차오와 부하들은 홍콩느와르 영화를 진지하게 감상한다.
빈과 갱단원들은 홍콩느와르 영화를 진지하게 감상한다.

빈에게 자금을 대던 보스 얼융이 피습당해 세상을 떠나자, 빈도 라이벌 갱단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빈은 갱단의 청년 두 명에게 파이프를 맞아 다리를 다친다. 이때, 빈은 자신이 홍콩느와르의 영웅이 된 듯, 부하들에게 잡혀 온 두 청년을 호기롭게 풀어준다. 그러나 빈은 갱단의 공격으로 목숨까지 위태롭게 되고, 차오는 빈을 구하기 위해 불법으로 소지하고 있던 총을 발포한다. 차오가 체포되어 신문 당할 때까지, 영화는 홍콩느와르처럼 흘러간다.

 

차오는 빈을 구하기 위해 총을 꺼내 든다.
차오는 빈을 구하기 위해 총을 꺼내 든다.

두 개의 ‘강호’

다리를 다친 빈은 목발을 짚은 상태로 차오와 함께 야외로 나간다. 차오는 눈앞의 화산을 가리키며, ‘활화산인지, 사화산인지’ 궁금해한다. 차오는 “화산재가 고온에서 연소 되었기에 가장 깨끗할 것”이라고 말한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sh Is Purest White‘이다). 그러나 빈은 “다 태워버려도 아무도 모를, 망할 곳”이라고 냉소한다. 그런 다음 빈은 ’강호‘를 언급하며 차오에게 총을 건넨다. 차오는 “옛날도 아닌데 강호가 웬 말이냐?”고 반문하지만, 빈은 “사람이 있는 곳은 다 강호이기 때문에, 지금 너도 강호에 있다”고 말한다. 빈은 차오의 오른손을 잡고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하면서, 총 쏘는 법을 알려준다.

빈은 ’의리‘를 상징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상‘을 곁에 두고 있고, 홍콩느와르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주인공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빈이 ’강호‘라는 말로 포장한 강호의 진짜 실체는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으로, 깡패들이 피도 눈물도 없이 이권다툼을 벌이는 살벌한 세계이다. 반면, ’가장 깨끗한 것‘이 있다고 믿는 차오에게 ’강호‘는 무협지의 무사들이 이해관계를 버리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차오는 빈의 총을 자신의 총이라고 끝까지 주장하고, 결국 5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이제부터 차오는 빈과 떨어져 강호에서 혼자 자신의 삶을 헤쳐나가게 된다.

 

지아장커의 ’멜로드라마‘

2006년, 차오는 출소한다. 그러나 4년 전에 먼저 출소한 빈은 나타나지 않는다. 지아장커의 2006년 영화 <스틸 라이프>의 셴홍이 남편을 찾아 싼샤에 온 것처럼, 차오는 빈을 찾아 싼샤에 온다. 자오타오가 연기하는 셴홍과 차오는 옷차림까지 비슷하다. 이때부터 영화는 멜로드라마로 전개된다. 홍콩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기도 하지만, 빈은 자신을 위해 감옥을 간 차오에게 의리를 지키기는커녕 다른 여자를 만나며 배신을 한 상태이다. 빈이 비겁하게 차오를 피하자, 차오는 경찰의 도움까지 받아 빈을 만난다.

 

차오는 빈을 찾아 싼샤까지 온다.
차오는 빈을 찾아 싼샤까지 온다.

다른 지아장커의 영화처럼, 이 영화도 대부분의 장면이 롱테이크로 흘러간다. 그 가운데 차오와 빈이 5년 만에 만나 모텔방에서 대화하는 장면은 매우 긴 롱테이크로 연출되어 있다. 다소 공허한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두 사람은 마주 보거나 나란히 앉는다. 같은 장면에서 한 사람이 화면 밖으로 나가거나 카메라가 움직이는 한 사람을 따라갈 때, 그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을 준다. 빈이 “나는 네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며, 강호를 떠났다”고 하자, 차오는 “당신을 찾으려고 강호를 떠돌았다”고 대꾸한다. 빈은 ’의리‘ 따위가 아니라, “물질적인 성공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돈 없이 같이 돌아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종이를 태우며 액땜을 시도하지만, 자신이 오른손잡이라는 사실까지 빈이 잊어버렸다는 걸 알게 되자, 차오는 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지는 가슴 아픈 롱테이크 장면은 눈물을 흘리는 차오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그리고 그들의 이별을 슬퍼하듯 비가 내리는 가운데, 빈이 떠나간다.

차오는 다퉁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여행사를 한다는 남자를 만나 신장에 가기로 한다. 다퉁에서 7천7백km 떨어진 신장에서, 차오는 강호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행사가 아니라 작은 매점을 한다는 그 남자는 차오가 감옥에 갔다 왔다고 하자 관심을 끊는다. 차오는 신장에 가는 걸 포기하고 한밤중에 낯선 곳에 내린다. 거기서 차오는 UFO를 목격하고, 무수한 별을 본다.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은 결국 강호가 아닌가!

2017년, 뇌출혈로 몸의 일부가 마비된 빈이 휠체어를 타고 차오를 찾아 다퉁에 온다. 차오는 예전의 빈처럼, 도박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러나 차오는 예전에 빈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니다. 차오는 빈에게 “살면서 죄값을 치루라”고 악담을 퍼붓고, 빈을 능멸하는 옛날 부하에게 주전자로 머리를 내리치며 “갈 데까지 가보자”고 소리치는 거친 여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차오는 빈을 돌봐주고 치료해 준다. 차오가 빈의 휠체어를 밀고 가며 대화를 나누는 매우 긴 롱테이크 장면에서, 빈이 그 이유를 물어보자 차오는 “당신에게 남은 감정은 전혀 없지만, 강호에서는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번에는 빈이 차오의 마음을 확인하고, 포기하게 된다. 예전에 ’강호‘를 논했던 화산 앞에서, 빈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회복되지 않는다.

 

’타락한‘ 강호의 여인

2018년 1월 1일, 빈은 “나, 갈게”라는 짧은 음성 메시지를 남긴 채 떠나간다. 빈이 떠났다는 걸 확인하는 차오의 모습은 CCTV 카메라의 화면으로 보인다. 무심하게 대상을 포착하는 카메라 앞에서, 차오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다.

2001년부터 2018년까지, 교통수단은 버스에서 고속 열차로 바뀌고, 투지폰은 스마트폰이 되었다. 다퉁에는 고층 아파트가 빽빽이 들어섰고, 싼샤 댐은 이전의 풍경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무시무시한 변화 속에서, 강호는 점점 더 타락해갔다. 배신과 사기가 난무하고, 도둑질과 강간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차오는 이상적인 강호의 가치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망연자실한 차오에게 다가가는 카메라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면서 건물을 부수는 망치 소리 같은 사운드가 크게 들려올 때,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악전고투는 결국 실패했으며 시대착오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 제공: (주)에스와이코마드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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