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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의 주인, ESG시민의 탄생
멋진 신세계의 주인, ESG시민의 탄생
  • 안치용 | ESG 연구소장
  • 승인 2021.06.30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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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사회·지배구조의 새로운 패러다임, ESG

불가역적 변화. ESG열풍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이자,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시작이라는 게 나의 진단이다. 투자영역에서 시작된 ESG가 일종의 미러링 방식으로 기업경영에 급속하게 반영된 뒤, 시민생활과 사회 영역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ESG투자(자본시장)→ESG경영(경제·산업계)→ESG사회(시장·공공·시민사회)의 흐름이 이미 시작돼 되돌릴 수 없는 형국에 접어들었다. ESG사회의 내용은 생활ESG로 요약된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가치’에너지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지속가능발전, 사회책임경영, ISO 26000, MDGs와 SDGs 등으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축적된 가운데 기후위기가 본격화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비대면 사회가 도래하고 4차산업혁명의 파고까지 덮치면서 ESG시대는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본시장과 기업경영을 넘어서 사회 전 분야의 변화를 만들어낼 시대의 확고한 변곡점으로 우리는 ESG를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사회는 이미 시작됐다고, 가능하다.

 

ESG의 등장

사회책임투자(SRI)의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돼야 할 인물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도 등장하는 웨슬리 목사는 일찍이 1760년 ‘돈의 사용법(The use of money)’이라는 설교에서 SRI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제시했다.

 

“우리의 고귀한 생명이나 건강 혹은 정신을 해치는 방법을 통해 돈을 얻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사악한 거래 행위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사악한 거래에는 하나님의 원칙이나 국가의 법에 위반되는 모든 방법이 포함된다. (…) 또한 이웃의 재산이나, 이웃의 신체 … 그들의 영혼을 해쳐서도 안 되는 것이다.”

- 러셀 스팍스,『 사회책임투자 세계적 혁명』

 

자본주의 태동기에 내려진 SRI에 관한 웨슬리 목사의 정의는 종교적이었고, 그런 종교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세계 최초의 사회책임 뮤추얼펀드 ‘파이어니어 펀드(Pioneer Fund)’가 1928년에 출현한다. 이 펀드는 주류 및 담배회사에 대한 모든 투자를 금지했으나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1971년에 이르러서야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사회책임투자 뮤추얼펀드라고 할 수 있는 ‘팍스 월드 펀드’가 성립한다. 주로 베트남전에서 돈을 버는 기업을 투자대상에서 배제하는 ‘반전(反戰) 펀드’였다.

SRI 펀드의 선구자들을 거쳐 SRI펀드는 자본시장에서 점차 늘어나고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비중이 확대됐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초,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가 연례서한에서 ESG투자를 천명하면서 SRI는 명실상부하게 자본시장의 주류로 자리를 잡는다. 한 마디로 ‘ESG투자=SRI’다.

SRI에서 투자대상을 고를 때, 익숙한 용어를 빌면 재무성과와 비(非)재무성과를 같이 본다. 흔히 ‘투 트랙 어프로치(Two track approach)’라고 하는 방식이다. 투자대상을 고르는 과정을 스크리닝(Screening)이라고 하는데, 정리하면 “SRI의 스크리닝은 ‘투 트랙 어프로치’로 재무성과와 비재무성과를 함께 검토”한다.

SRI에서 비재무성과를 검토하는 기준으로 도입된 것이 ESG이다. 재무적 성과 외에 환경·사회·거버넌스 측면의 성과를 살펴보겠다는 발상이다. 요즘은 ESG성과를 재무성과와 명확하게 구분되는 비재무성과라고 두부 자르듯 나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단순화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주목할 사항으로 ESG 전에는 SEE라는 기준이 있었다. SEE의 앞 두 가지는 사회와 환경이고 나머지 E는 윤리(Ethics)를 말한다.

SEE가 ESG로 이행하며 ‘윤리’가 ‘거버넌스’로 바뀌었다. 생각보다 큰 차이이다. 윤리경영 대 지속가능경영, 또는 윤리투자 대 사회책임투자(SRI는 줄여서 책임투자(RI)라고도 한다)의 대립에서 왜 윤리란 말이 설 자리를 잃은 걸까. SRI에서 기본적으로 윤리적인 성격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자본시장의 투자결정에서 웨슬리 목사가 주창한 것과 같은 엄격한 윤리적 가치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만은 없는 게 현실이다. 윤리적 투자원칙은 종교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통용될 수 있겠지만, 국가·종교를 넘어서 보편적인 투자윤리를 풀어내기는 용이하지 않다. 윤리라는 말 자체에 내포된 모호성이다. 윤리를 투자지표로 구체화하는 데에도 한계가 발견된다.

또 최고경영자·투자결정책임자 등의 능력과 도덕적 자질이 우선시되기 때문에 불가불 ‘개인’으로 환원되는 측면이 있다. 조직이나 시스템이 아닌 개인에 의존하는 윤리투자는 지속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연유로 윤리란 말이 투자기준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환경적·사회적 성과가 뛰어나면서도 좋은 거버넌스를 갖고 있는 기업에 투자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수렴돼 SEE가 ESG로 바뀐다. 

통상 지배구조라는 말로 번역되는 거버넌스는 기업 등 조직이 전반적으로 운영되는 총체적인 시스템 같은 것인데, 자주 투명성이나 공정성과 연관지어 설명된다.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는 거대담론 용어로 거버넌스를 차용하기도 한다. 기업 수준에서는 자본시장에 공시를 잘하고 있는지, 회사 조직 및 직무와 관련한 내부 통제가 유효한지, 상호견제와 감시 같은 게 적정한 수준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등을 따져보게 된다.

ESG투자나 ESG경영에서 거버넌스가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는 반면 ESG사회에서 거버넌스는, 당연히 독자적인 주제 영역을 설정할 수 있지만 주로 ‘우리 공동의 미래’(세계환경위원회가 1987년 발간한 ‘지속가능발전’ 관련 보고서-역주) 등에서 제시된 인류의 생존 키워드인 ‘환경’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인프라와 플랫폼으로 파악하는 게 더 합당한 이해일 것이다. ESG투자나 ESG경영과 달리 ESG사회는 세계시민의 지평에서 지구촌의 임박한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재앙을 막기 위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체계로서 거버넌스를 필요로 한다.

그런 측면에서 자본주의 태동 이래 고수된 기업 등 조직의 성과를 경제적 성과로만 보는 성과측정방법론을 탈피해 경제·사회·환경 성과를 함께 보는 트리플 버틈라인(TBL)은 ESG투자나 ESG경영과 맥락을 같이한다. 반면 ESG사회는 경제와 사회 두 측면을 강조한 더블 버틈라인(DBL)과 더 유사하다. 사회적 기업을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되는 용어인 DBL은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성과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데, 이런 이해보다는 사회적 성과를 효율적으로 추구하는 방식이라는 설명이 더 적합해 보인다. ESG를 사회와 국가 차원에 적용할 때도 그렇게 설명하는 방법이 더 낫다고 하겠다.

 

ESG, TBL, 지속가능사회

기업 등 조직의 경영에서 하나의 성과(버틈라인)가 아니라 세 개의 버틈라인, 즉 경제·환경·사회성과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경영방침을 흔히 지속가능경영이라고 한다. 이해관계자를 경영의 중심에 놓는 사회책임경영은 지속가능경영의 동의어다.

자본시장에서 (기왕이면) 지속가능경영을 하는 기업에 투자하자는 게 앞서 살펴보았듯 SRI다. 당연히 스크리닝 과정에 ESG를 살펴본다. 사회책임투자를 하기 위한 투자기준인 ESG가 이제는 사회책임투자와 사실상 동의어가 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SRI는 ESG투자다.

소비자 또한 기왕이면 지속가능경영을 하는 기업의 상품을 사자고 하는 게 사회책임 소비다. 윤리적 소비, 지속가능소비라고도 한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아니면 같은 값이면 CSR을 잘 이행하는 기업, 또는 ESG 성과가 좋은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는 생각이다. 공정무역은 윤리적 소비와 살짝 다른 구조를 갖는다. 해외시장에서 물건을 사올 때 생산자의 생계비를 보장해주는, 즉 소셜 프리미엄이 포함된 공정가격을 주고 구매하겠다는 소비자 운동이 공정무역이다. 인과관계의 순서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회책임소비나 공정무역소비는 같은 흐름으로 파악된다. 

투자영역에서 사회책임소비 및 공정무역소비와 비슷한 유비(類比)가 성립하는 게 민간 투자영역의 SRI와 공공영역의 SRI라고 할 수 있다. 공공영역의 SRI, 즉 공공영역의 ESG투자는 공정무역소비가 소셜 프리미엄까지 가격에 반영하듯, 전후방 효과·연쇄효과·시계열 효과 등 사회적 효과를 심층적으로 반영한 투자결정을 내린다. 영국이 2000년 7월 3일 국민연금 등의 SRI를 의무화한 데는 요약하면 이런 배경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은 SRI가 투자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한 기념일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자본시장을 곧바로 겨냥해 바꿔나가는 운동이기에 주류적인 흐름이다. 몇몇 종교단체에서 책임투자 간판 단 펀드 몇 개를 운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런 흐름은 점점 더 세계적으로 확장되다가 2020년 래리 핑크의 선언으로 ‘ESG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영어로는 ‘Economy’로 표현되는 한 경제권의 관점에서 이런 흐름이 수렴돼 한 경제권 내에서 지속가능사회의 순환구조가 완성된다. 이때 ‘Economy’ 내의 선순환을 막는 또 다른 외부변수의 개입을 우리는 우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자본시장의 ESG투자를 높은 수준으로 달성했다고 치자. 분명 그 자체는 반길 일이지만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매우 개방적인 게 고민이다. 예컨대 국내 자본이 이른바 술, 담배, 도박 등 ‘죄악의 주식’을 외면하는 바람에 그것이 외국 핫머니만의 투자처가 된다면, 투자수익을 외국에 빼앗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비용은 비용대로 물고 투자수익은 투자수익대로 잃게 된다. 

이런 사태는 매우 극단적인 예외에 속할 것이지만, 국내 자본시장의 ESG투자를 확대해 ESG경영을 촉발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ESG생태계를 구축하는 데에 장애요소이기는 하다. 복잡한 논의여서 단칼에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ESG투자와 ESG기업을 늘려 해외에서 들어오는 투자에서도 ESG투자 비중을 늘리는, 즉 핫머니를 쿨머니로 대체하는 국가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는 원론은 확인가능하다. 

핫머니는 ‘분기 자본주의(Quarterly Capitalism)’라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체화한 자본이다. 핫머니와 분기 자본주의는 서로 호응한다. 반면 쿨머니는 ESG자본주의와 호응한다.

“같은 값이라면”을 넘어서 “더 지불하고라도 사회책임을 다한 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겠어요”는, 과도적으로 매우 중요한 태도다. “더”라는 과도적 과정을 거친 후에 “같은 값”의 시대가 가능해지며, 그때서야 비로소 ESG는 특이점이 아니라 제품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기본조건이 된다. 

ESG기업이 ESG소비자와 만나려면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지속가능경영 혹은 ESG경영을 했다는 사실을 사회가 알게 하려고 하는 소통이 사회보고(Social Reporting)이고 GRI라는 구체적인 작성기준이 마련돼 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지속가능보고서, 사회책임보고서, 기업시민 보고서이고, 같은 말로 나아가 ESG보고서는 소비자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정식 용어인 사회보고가 웅변하듯 소비자·자본시장·노동자 등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소비현장에서는 소비자가 참고할 표시가 필요하다. 참치분쟁에서 등장한 (실효성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돌핀 세이프(Dolphin safe)’ 같은 레이블링, 인증, 이력 등 다양한 표시를 통해 소비자가 ESG소비를 할 수 있게 정부·소비자단체 등에서 지원해야 한다. 착한 소비가 총체적으로는 정치적 각성인 만큼 정보파악을 넘어서 적극적 연대로 나아간다면, 소비를 통한 사회개선이 크게 어렵지는 않을 터이다. SNS 등 연대할 수단이 많다는 게 착한 소비에는 유리한 환경인 셈이다.

소비자의 각성은 ESG사회의 핵심이다. 자본시장에서 ESG투자결정, 미러링으로서 기업의 ESG경영에 이은 ESG사회로의 비상은 결국 소비자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에 (소액)주주로 참여하는 소비자는 투자→경영→소비라는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ESG세례를 받는다. ESG소비가 ESG사회를 점화하려면 소비의 주체인 소비자가 ESG상품을 구매하는 의식 있는 소비주체 수준에 머물러선 곤란하다. 깬 소비자이자 동시에 ESG시민이기도 하다는 다층성을 자각하고 생활 속의 ESG를 실천하면서 다른 ESG시민과 기꺼이 연대하는 일종의 촛불정신이 필요하다. 생활ESG를 실천하면서 ESG시민이 된다는 것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인류문명까지 포괄한 모든 부문에서 전례 없이 강력한 촛불혁명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한 ‘Economy’ 내의 소비자는 ESG소비를 실천하며 ESG소비자로 거듭난다. 그런 거듭남을 통해 ESG투자와 ESG경영을 더 촉진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낸 ESG소비자는 한 단계 더 결정적 비약을 준비해야 하는데, ESG시민으로의 전환이다. 이 전환이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 시민혁명의 핵심이다. 기후위기와 4차산업혁명, 언택트와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한꺼번에 돌파할 계기 혹은 가능성은 자본주의 기업에 사냥당하는 개별 소비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연대하는 ESG시민으로서 민주적 시장과 효율적 사회를 창안하는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데서 발견된다.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 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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