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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은 없다!
정상가족은 없다!
  • 이병국 |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6.30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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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방송인 사유리의 비혼 출산 소식은 한국사회에 논란을 불러왔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해외의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한 이 일을 두고,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됐다. 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인식과, 비혼모 출산으로 인해 전통적 가족상이 붕괴하고 사회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비판적 인식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신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여성 인권과 관련된 문제다. 여기서 태아의 생명권과 관련되는 낙태이슈를 제외하더라도, 출산의 주체인 여성이 ‘임신’과 ‘양육’에 관한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현상 자체가 전통적 가족관계를 해체할 위험요소로 인식되는 상황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족’에 관한 일반적 인식이다. 우리는 가족을 자연적, 생물학적 단위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저 살벌하고 폭력적인 사회체제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구원의 체계가 가족인 것처럼 여긴다.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온갖 사회적 위기 속에서 우리가 기댈 유일한 사적 안전망으로 간주하는 것은 개인을 받쳐줄 사회적 보호제도가 전무한 상황에 기인한다. 

김희경에 의하면,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가 근대화 과정을 통해 강력해졌다고 한다. 1960~1970년대 경제개발 논리로 인해 사회보장 및 복지 서비스는 가족에게 위임됐으며, 사회의 경제적 부강은 가족의 희생 위에서 이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저임금 노동력의 필요로 장려된 핵가족 정책이나 그로 인해 발생한 전통적 가족 부양의 문제는 접어둔 채 다시금 강요된 ‘바람직한 가족상’을 보면, 국가가 어떻게 ‘가족’을 통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개념화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1) 그런 점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은 자연발생적인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의존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된 실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모른다.(2)

여하튼 우리는 가족을 낭만적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구성원들 간의 친밀함에 바탕을 두고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며 정서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상상은 이상적인 것과 결합한다. 당연하게도 이때의 ‘이상적인 것’이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에 응답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을 인용하면 “공동체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공동체의 ‘동일성’, 즉 동일성이라는 가치에 따라 서로 관계있다고 사람들이 느끼는”(3) 것이야말로 ‘정상성’이며 집단적 동일성을 붕괴시키는 ‘다름’은 갈등을 유발할 뿐이므로 배제돼야만 한다. 그러므로 비혼 여성과 그녀가 낳은 아이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위협하고 더럽히는 불순한 것이므로 사회에서 추방돼야 할 비정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비정상성’은 역설적으로 ‘정상성’의 민낯을 폭로하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내재된 폭력성과 부조리를 밝힌다.

 

정상가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두 종류의 가족형태 

그렇다면 정상가족은 어떤 형태인 것일까. 우리의 인식 속에서 정상가족은 전근대의 대가족 형태는 아닐 것이다. 이는 근대 이후에 구성된 개념으로 이른바 이성애로 결합한 부부인 부모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4인 가족의 형태일 것이다. 자녀를 하나만 둔 3인 가족도 정상가족에 포함되지만, 흔히 ‘4인용 식탁’으로 상징되는 구성원 비율을 우리는 ‘정상가족’으로 상상한다.(4) 그렇기 때문에 이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가족의 정상성은 기실 존재하지 않는다.

윤이형의 소설 「승혜와 미오」(『작은마음동호회』, 문학동네, 2019)에는 두 종류의 가족 형태가 나란히 등장한다. 하나는 승혜와 미오가 구성하는 레즈비언 동거가족이고, 다른 하나는 이호와 이호 엄마로 구성된 한부모 가족이다. 두 가족 모두 정상가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서술자인 승혜가 베이비시터로서 이호를 돌보며 두 가족은 연결된다. 이 소설의 주된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아이를 원하는 승혜와, 그런 승혜가 원하는 가족이 돼줄 수 없는 미오와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비롯되지만, 그 이면에는 레즈비언 커플을 가족으로 승인하지 않는 사회, 더 나아가 정상가족의 범주를 한정하는 사회와의 갈등이 놓여있다. 그런 점에서 승혜 엄마의 “동성애 그거, 정신 나간 애들이 하는 거 아니냐, 다 잡아다가 병원에 가둬야 되는 거지 저거 저거”(41쪽)라는 말은 승혜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없게 하고, 그를 비정상의 잔여물로 낙인찍어 ‘정상’에서 배제시킨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관계라는 이유로 전통적 가족주의를 위반하는 ‘위협적 존재’인 승혜와 미오는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사람”(48쪽)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시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들은 ‘누락된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기혐오 속에서 폐쇄된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있을 수 있다거나 있어야 한다는 문제를 떠나 이미 그냥 그렇게 세상에”(49쪽) ‘있는’ 존재다. 그들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사고해야 할 당위가 아니다. 오히려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다른 가능성의 층위를 지닌 존재이기에, 당위적 사고에 기반을 둔 정상성을 재맥락화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게 옳다. 

이호와 이호 엄마로 구성된 한부모 가족도 유사하다. 통계를 보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가족’은 한국 사회에 지배적 가족 구성의 형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부모 가족을 가족 구성원이 채워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상이 아닌 가족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차이가 차별이 돼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차이를 차별로, 옳고 그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차이는 “우리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57쪽) 그러나 사회적 편견은 가부장적 권력에 의해 정상성에 포섭되지 않는 가족을 타자화하며, 타자화된 존재는 허상 속에서 자기모멸과 자기부정의 피학적 위치를 강요당한다. 

윤이형은 승혜와 이호 가족을 결속시켜 이를 돌파해 나간다. 승혜가 수행하는 돌봄노동은 이호 엄마가 수행하는 생계부양의 임금노동을 가능케 하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수행되는 비가시적 노동을 가시화한다. 이는 비경제적이라고 간주된 돌봄노동을 임금노동의 자리로 옮김으로써, 생계 부양을 남성의 역할로 제한하는 사회의 편견을 무너뜨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이성애 중심 가족의 형태를 재고하게 만든다. 작가는 타자화된 정체성을 새로운 공동체의 형태로 묶음으로써 승혜와 이호 엄마 모두를 주체화된 자리로 옮기는 것이다. 

승혜와 이호 엄마의 관계는, 승혜와 승혜 엄마와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로 나아간다. 사회적 편견으로 동성애를 “정신 나간 애들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승혜 엄마 역시 “자신을 키우느라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해 - 아마도 지금 이호의 엄마처럼 - 필사적인 삶을 살아온 엄마”(41쪽)이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승혜는 이호 엄마를 통해 자신의 엄마와의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물론 실제로 그것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인지는 소설 내에서 확인할 수 없지만,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 속에서 갈등은 단지 정체성 투쟁의 장에서 대립해야 할 문제가 아닌 용해시킬 수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남편 생일에 시가 어른들께 생색내기” 좋은, “집들이 음식으로 딱”(31쪽)인 ‘전시용 밀푀유 나베’를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어떤 아득한 세계의 상징, 영원한 불가능의 표지”로 여기며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정상성의 기표가 아닌 이호와 이호 엄마를 위해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더불어 자신의 입에도 넣음으로써 그것이 “심심하고, 슴슴하고, 대단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그 아무렇지 않음 때문에, 실망스러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그 별거 아님”(57~58쪽)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호 가족이 승혜의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수용한 것처럼 말이다. 이 ‘아무렇지 않음’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이 아닐까. 

 

가족, 그 내밀한 공동체에 가해지는 균열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정상가족이 실제의 가족 구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재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사회에 보편적 가치가 있다면, 그것이 정상성 담론에 기댄 차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환대가 가능하다고 믿는 그 ‘보편적’ 공동체는 개별적 주체의 정체성을 구성하기보다는 남성 주체와 여성 타자의 위계에 바탕을 둔 여성의 희생을 통해 구성되며 내부로부터 곪아 가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정상가족이라는 낭만적 신화를 덧씌운다.

 

폭력은 밝은 곳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살았던 적도 있다// 보이는 것도 흰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도 흰 것일 때// 겹겹의 백지처럼/ 어두운 곳엔 없는 기도를 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어른이 될까// (……)//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침대의 밑, 겨울의 끝에 대해 생각했다// 깨지기 직전의 시간을 모자처럼 눌러쓰고/ 얼굴 끝까지// 마구잡이로 쌓아올린 그릇들// 더 깊은 얼굴이 되면/ 따뜻한 손을 갖게 될까// 지우고 싶지 않은 것들 사이엔 반드시/ 지우고 싶은 색이 있다// 가족의 색/ 가족의 문/ 가족의 반성과 가족의 울음 가족의 일상 가족의 방식 가족의 손과 가족의 얼굴 가족의 정지/ 그리고 가족의 가족// 알약은 깊은 곳에서 녹는다/ 녹는 곳엔 바닥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말이다// 얼굴에 그린 그림을 가면처럼 쓰고 있던 아이들이/ 다 지워질 때까지

- 안미옥,「가족의 색」(『온』, 창비, 2017) 부분

암묵적으로 사회가 용인하고 추동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가족을 집단으로 간주하고 가족 구성원 개인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럼으로써 가족 부양과 생존의 책임을 사적 영역에 전가해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를 가족주의 구조 안에서 수행토록 한다. 이는 돌봄을 위시한 삶의 제반 조건을 가족 내부의 문제로 한정 지어 사유하도록 만든다. 안미옥 시인은 가족의 위태로운 내부를 폭로한다. 한때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살았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겹겹의 백지처럼/어두운 곳엔 없는 기도”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맑고 깨끗하리라 믿었던 하얀 세상은 “보이는 것도 흰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도 흰 것”으로 그저 밝기만 한 곳에서도 자행되는 “폭력”을 감당해야만 하는 공간으로 의미화된다. 

그곳에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는” 존재는 “깨지기 직전의 시간을 모자처럼 눌러쓰고” 얼굴을 감춘다. 가족은 “지우고 싶지 않은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우고 싶은 색”이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폭력”이 자행된 곳임은 짐작할 만하다. 같은 시집의 다른 시에서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식탁에서」)을 감각했던 것처럼, 정상적으로 보이는 저 “흰” 세계는 그 “흰” 색 때문에 다른 색을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폭력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너무도 분명해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만, 그 믿음이 담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얼굴에 그린 그림을 가면처럼 쓰고” 지워지는 “아이들”과 마주하게 한다. 

내부에 도사린 폭력적 관계를 직시할 수 없게 하는 것, 그 문제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가족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공고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관계로 상상된 가족, 그 내밀한 공동체에 균열을 가하는 것은 “가족의 일상 가족의 방식”에 숨은 “가족의 손과 가족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데에 있다. 가족에게 투사된 이데올로기를 “정지”시키고 “가족의 색”이라고 가정된 “흰” 것에 묻은 얼룩을 드러내고 “가족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한다. “절박한 질문을 손에 쥐고 있어도/ 일주일이면 희미해지듯”(「나의 문」) 차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근간이 가족에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사회적 공동체의 층위에서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닥이 없이 “녹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글·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1)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동아시아, 2017, 165~172쪽 참조.
(2) 가족서사에 관해 연구한 권명아는 “가족은 명확하게 사회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구성된 실체”이며 가족 개념은 “가족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는 사회적 역학 관계에 따라 봉건적이거나 근대적인 성격의 가족 이데올로기로 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권명아,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책세상, 2000, 14쪽.
(3) 리처드 세넷, 『무질서의 효용: 개인의 정체성과 도시 생활』, 유강은 옮김, 다시봄, 2014, 78쪽.
(4) 한국의 가구 형태 중 부부+자녀로 구성된 이른바 정상가족은 2000년 전까지 50%를 약간 상회하였으나 2019년에는 30% 이하로 떨어졌다. 오히려 1인 가구가 30%를 상회하고 한부모, 조손 가구, 비혈연 가구 형태 등이 뒤를 이었다. 오진방, ‘12시간 노동, 30분 면회. 미혼모에게 벌어진 일’, <오마이뉴스>,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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