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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깐부 그리고 대권게임
깍두기, 깐부 그리고 대권게임
  • 성일권 l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21.09.30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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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만 원을 투자하면 몇억 원을 만들어주겠다는 보이스 피싱 문자들이 자주 휴대폰에 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이 많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대부분은 이미 파산했거나 파산 직전의 벼랑에 몰린 사람들이다. 신용카드 대출을 받거나 지인에게 돈을 꾸는 등 돈을 박박 긁어 투자해보지만, 백이면 백 모두 사기를 당해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뿐이다. 아직 거동할 수 있을 때 손과 발을 이용해 삽을 들고 벽돌을 나르거나,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탈것을 활용해 배달을 해보려 하지만, 손을 이용하는 일은 중국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의, 발을 이용하는 일은 젊은 라이더들의 몫이다.

강남의 62평 호화아파트에 거주하며 “집 없어서 청약통장 안 만들었다”라는 ‘외계어’로 서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야권의 한 유력 대선후보는 대학문을 나서면 십중팔구 비정규직 내지 비자발적 실업자 처지가 될 청년들을 만나, 반(反)청중적인 포스트모던적 발언을 이어간다.

“손발로 노동을 하는 것은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것이고, 임금에 큰 차이가 없으면 비정규직, 정규직이 큰 의미가 있겠나? 기존의 노동시장을 조금 물렁물렁하게 유연화하고, 여러분들이 첨단과학 기술을 연마하고 습득하는 게 좋지 않겠냐”라는 그의 발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가진 자’의 나르시시즘에서 나온 유희적(遊戱的) 언어로 들린다. 

우리 현실에 더 유연화할 노동시장이 남아있을까? 임금차이를 떠나 정규직을 원하는 이유는, 정규직 외의 계약직, 알바 등 비정규직에게는 승진, 휴가, 보너스, 권리와 혜택 등 모든 면에서 극심한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더욱이 재계약시 고용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출발점에 서 있는 젊은 세대라고 해서 모두가 비정규직은 아니다. 검사출신의 유력 국회의원의 아들 곽 모 씨(31)는 또래의 청년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겪는 차별과 착취, 고용불안 속에 영혼을 잠식당할 때, 6년치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아, 30대 그룹 전문경영인의 퇴직금 상위 순위에서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요즘 논란의 중심에 있는 성남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의혹을 받는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의 직원으로서 전직 고위 검사와 판사들이 참여한 머니게임에서 ‘어지럼증’이 생길 만큼 열심히 일한 덕택이다.  세간의 의혹에 대해 곽씨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빗대,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게임 속 ‘말’일 뿐”이라며, “제가 입사한 시점에 화천대유는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 위에서 시키면 했고, 열과 성을 다했다. 설계사 입장에서 저는 충실한 ‘말’이었다”라고 주장해, 이 드라마의 내용을 애꿎게 소환한다.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졸지에 부동산개발회사에 취직해, 윷판의 ‘모’ 아니면 ‘도’의 정신으로 일한 게 무슨 죄냐는 것이다. 

서민들은 평생 일해도 벌지 못할 막대한 퇴직금을 받은 이가, 자신의 상황을 사채 빚에 시달리는 이들이 총 456억 원의 상금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경쟁을 벌이는 이야기에 비유한 것은 놀랍지만, 조직 설계사의 ‘말’이라는 고백은 적절한 듯 싶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고백처럼 청와대 민정수석, 검사장, 법원장, 국회의원을 지낸 설계사들의 충실한 손과 발이었던 셈이다. 그가 참여한 ‘대장동 게임’은 이권 개입에는 게 눈 감추 듯하고, 법망에는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잘 빠져나가는 검사 및 판사 출신의 법률 기능사들이 기획한 것으로 참가자들이 출자금 3억 5천만 원으로 4,040억 원의 돈벼락 배당을 받은 게임이다. 반면, <오징어게임>의 최후 승자이면서 유일한 생존자인 기훈이 받은 456억원은 자신을 포함한 참가자 456명이 각기 자신들의 목숨에 1억씩 출자한 ‘목숨값’인 셈이다. 

 

자동차회사에 다니다가 구조조정 당하고, 치킨집을 하다가 망해 수억 원의 빚이 생긴 뒤 이혼 당해 딸과 생이별을 하게 된 기훈(이정재),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수재로 여의도 투자회사에 잘 다니는 줄 알았지만 투자실패와 횡령으로 빚더미에 앉은 상우(박해수), 탈북 브로커에게 돈을 사기당한 새벽(정호연), 조직 보스의 돈을 도박으로 날린 덕수(허성태) 등 다양한 인생 군상을 통해 극한에 처한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 작품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달고나’ 등 낯익은 추억의 게임들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잘나가는 검사와 판사, 그리고 검사출신 국회의원의 아들이 목숨을 내거는 대신 뒷배를 봐주고, 이권에 개입하며 머니게임을 벌였던 ‘대장동 게임’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징어게임>에서 용케 유일한 생존자이자 최후의 승자가 된 기훈이, 이 살인게임을 기획한 천문적인 재산을 가진 부자 오일남을 만나, 왜 이런 게임을 하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변도 참으로 유희적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세상이 재미가 없어. 그래서 뭐 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이 게임을 만든 거야.” 그가 재미삼아 설계한 게임에 기훈을 뺀 455명이 귀한 목숨을 잃었지만, 오일남은 돈 욕심에 서로 죽이고 올라가는 인간 군상의 물성을 지적하며, ‘인간주의자’ 기훈의 순진함을 비웃는다.  ‘<오징어게임>속 말’을 자칭한 곽씨는 오일남처럼 기훈의 순진함을 비웃은 걸까, 기훈의 인간주의에 공감하는 걸까?  

<오징어게임>에 대한 수많은 평론이 나왔지만, 필자의 눈길을 끄는 장면은 깍두기와 깐부의 등장이다. 2인 1조의 구슬게임을 시작하기 전, 힘 있고 똑똑한 참가자들에게 치여 제 짝을 찾지 못한 여성참가자가 깍두기 가 돼 탈락의 위기에 처한다. 실상 1등만 기억하는 매정한 현실 사회에서는, 선두만 빼면 모두가 언제 벼랑에서 떨어질지 모를 깍두기 신세다(영화에서는 깍두기 신세의 여성을 배려하는 연대정신이 잠시 나오지만, 그녀는 결국 탈락한다). 

이제 드라마에서 나와 현실로 눈을 돌려보자. 검사 출신의 권씨 아버지, 고위 판·검사, 국회의원, 유력 언론인 등 권력자들은 실제로는 대장동 개발 같은 ‘머니게임’에서 자신들이 독점하는 룰을 만들어놓고서, 수많은 깍두기 신세의 사람들에게 그들 역시 승자가 될 수 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경쟁 룰에서 밀려난 이들이 자신도 언젠가는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애써 여기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대장동 게이머들은 거대한 이익 앞에서 동료애적인 ‘끼리끼리’ 깐부 정신을 발휘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깍두기들에겐 삶의 막다른 벼랑에서 ‘각자도생’의 길 밖에 없다. 

대선을 몇 달 남겨두고, 이 땅의 깍두기들에게 ‘깐부’가 단지 ‘치맥’용 안주가 아닌, 동료애를 함께 나누며 연대를 도모하는 정신운동으로 작용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알쏭달쏭한 포스트모던적 발언을 일삼는 후보의 실체, 어쩌면 외계인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부터.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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