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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싱 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
[이승민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싱 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
  • 이승민(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12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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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미싱타는 주인공들
들판에서 미싱타는 주인공들

선명하게 가를 수 있는 감정은 앙금이 없다. 좋다. 싫다. 밉다. 사랑한다. 로 설명가능한 감정은 도리어 깔끔하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더 많다. 좋은데 만나면 짜증이 나고, 밉고 싫은데 이해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지만 분노가 치밀고 걱정스럽고, 행복하지만 불안한 게 인간의 감정이다. 대개 이런 복잡한 감정에는 ‘내’가 개입되어 있다. 상대나 상황만 보면 선명한 선 긋기가 가능하지만 그 속에 내가 개입되어 있을 때는 선명한 감정도 울퉁불퉁 복잡해진다. <미싱타는 여자들: 전태일의 누이들>은 1977년 9.9사건에 연류된 청계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낸 작품이지만, 그 시절을 온 몸으로 살아낸 여성 노동자들의 ‘복잡한 미움’을 담은 장이기도 하다.

 

마주보기 1 - 시대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초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평화시장 들어간 소녀들은, 늘 잠과 배가 고팠다. 16시간 일하는 것은 다반사이고 명절 직전에는 보름씩 밤을 새며 일을 했다. 잠과 배 보다 더 고팠던 것은 배움이었다. 강제로 배움의 권리를 박탈당한 어린 노동자에게 노동교실은 유일한 배움터이자 사람 사는 공간이었다. 늘 번호로 불리던 곳에서 처음으로 이름으로 호명되고, 한자도 배우고, 은행 활용법도 익히고, 무엇보다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노동 환경과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었다. 한국 노동사에서 가장 암울한 시간이지만 한 인간에게는 가장 빛나는 시절이기도 했던 그 시절 소녀들을 영화는 40년이 지나 지금 다시 대면한다.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 세 여성을 중심축으로 당시를 마주하는 영화는 한편으로는 청계피복노동조합 활동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인물들이 그동안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풀어놓는 여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과거를 재현하거나 소환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낸 개별 인물들이 과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 한다. 이들은 영화와 함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 자신의 빛깔을 찾아가고 장롱 속 그 시절을 개인 기록을 풀어낸다. 영화의 시간은 그동안 시대가 간과하고 개인조차 묻어둔 그 시절 그때 자신을 어루만져 준다.

 

함께 노래하는 주인공들
함께 노래하는 주인공들

마주보기 2 - 동료 

영화는 세 인물의 인터뷰로 진행되지만, 세 인물을 마주하는 짝들이 존재한다. 세 인물은 각각의 짝들과 함께 스크린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자신들이 가진 개인 기록들을 디지털화 한 스크린은 이들이 묻어둔 사적 기록이자 역사이고, 무엇보다 기억의 형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기억을 형상화하는 다양한 도구는 오늘날 매체와 기억의 관계, 나아가 사적 자료가 역사가 되어가는 아카이빙 작업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영화 도입부 지금을 인터뷰하면서 당시를 그린 초상화에서, 개인의 사진첩 속 사진에서, 개인이 보관한 유인물과 문서 자료들은 스크린 앞 두 인물들과 만나 과거를 소환하는 동시에 현재 속 과거를 발견한다. 당시 10대였던 50대 여성은 그때처럼 언니, 동생으로 서로를 친밀하게 부르면서 많이 웃고 많이 울면서 시공간을 넘나든다. 이들 말 속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걱정과 섭섭함, 즐거움과 행복도 함께 녹아 있다. 영화는 시대와 인물을 동일시 하지 않고, 시대 속에 개별 인물들의 다양한 삶과 감정의 결을 마주하게 한다. 영화는 디지털화된 사적 자료들과 개인들의 묵은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다시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한다.

당시 뉴스나 신문 같은 공적 기록보다는 개인이 보관하는 사적 자료(사진, 편지, 공소장 등)에 의존해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기록은 말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촉매제로 활용된다. 사적 기록은 당시 사건에 대한 공적 기록의 부재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적 자료의 아카이빙 가치에 대해 역설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적 기록들은 디지털로 저장되어 프로젝터를 통해 인물들과 마주한다. 어두운 방 프로젝터로 마주한 과거 자료들은 마치 기억의 터널처럼, 공개적으로 배치되고 소환한다. 

 

현재 다시 찍은 단체 사진
현재 다시 찍은 단체 사진

마주보기 3 - 과거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은 서로를 멋지게 조우한다. 영화는 세 여성이 언덕 위 탁 트인 공간에 놓인 미싱을 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서로의 이름을 새기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은 화장실 한번 가려도 좁아서 미싱판을 넘어가던 좁고 답답했던 그 시절을 겪고, 지금 여기 하늘 아래 들판에서 다시 또 새롭게 ‘미싱타는 여자들’이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의 기억 터널에서 지금 여기로 함께 걸어나오는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처음과 조우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여정의 ‘마주보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지금은 폐허가 된 과거의 공간에서 현재 나와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행위는 ‘복잡한 미움’을 마주하면서 껴안은 시간이기도 하다.

 

사진 속 과거 나와 만남
사진 속 과거 나와 만남

<미싱타는 여자들>은 70년대 한국 노동사, 그 속에서도 다시 누락된 여성 노동사를 여성의 목소리로 풀어낸 작업이자, 영화라는 장이 상처와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치유하는 장이 될 수 있음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 맨 마지막에 현재의 그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과거의 그들의 회화가 될 때 고통스러운 과거도 지금 우리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이승민
영화 연구자, 평론가,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영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 <한국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아시아 다큐멘터리의 오늘>(공저), <영화와 공간>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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