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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폭력, 국가의 무능, 여성의 투쟁 -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1994)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남성폭력, 국가의 무능, 여성의 투쟁 -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1994)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18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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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국가에게 빼앗긴 엄마의 슬픔

<미나리>에서 윤여정의 연기를 칭찬한다면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1994)에서 열연했던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배우 크리시 록(Crissy Rock)의 연기에 반할 것이다. 리버풀에 사는 네 아이의 엄마 마기. 그녀는 어느 날 런던에 있는 한 바에서 파라과이출신의 조지를 만난다. 만난 첫 날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마기는 자신의 아픈 과거들을 떠올리며 조지와 가까워지는 것에 머뭇거린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이지만, 자라면서 각각 다른 남자들로부터 네 아이를 얻었다. 그녀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처럼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서로 다른 아버지로부터 낳은 네 명의 아기, 그들을 키우는 마기라는 이름의 여인은 정부로부터 아기를 빼앗긴다. 아기는 부모의 소유이기도 하지만, 양육능력이 없거나 환경이 나쁠 경우 국가가 보호할 책임이 있다. 나라 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선 이러한 제도로 아기를 보호하는 법이 있다. 영국에서 있었던 실화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마기의 부모로서의 심정과 그 여자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을 한다.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서 마기의 행동이 지나치게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이란 걸 느낄 수 있다. 영화는 마기와 그의 남편 조지를 동정적으로 그리지만 법을 집행하는 국가를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영화는 표면적인 현실의 이면 아래에 무슨 진실이 감춰져 있는지를 질문한다.

양육능력이 없는 부모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분명 좋은 방안이긴 하지만, 결코 영원한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를 양육할 능력이 안 되는 마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보호하려 빼앗아가는 국가를 향해 떳떳하게 항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확실한 부모가 되기 위한 투쟁

어려서부터 아빠가 엄마에게 행사하던 폭력을 보고 자란 마기는 심지어 아빠의 성폭력에까지 시달렸고, 마침내 국가가 운영하는 보호소에 격리보호되어 성장했다. 부모의 정이 그리웠던 그녀는 부모의 책임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네 명의 다른 남편으로부터 네 명의 다른 아이를 낳아 기른다. 어찌 된 일인지 남편들은 다 사라지고 없다. 마지막 전 남편만이 다시 재회하지만 역시 폭력으로 헤어지고 만다.

그 탓에 양육능력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그녀로부터 아기를 빼앗아 격리보호하게 된다. 처음 그녀에게 일이 벌어진 것은 일하러 간 사이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큰 아이가 화상을 입게 된 사건이었다. 그녀의 양육능력을 의심한 사회복지부는 큰 아들 숀을 빼앗아 간다. 숀을 빼앗긴 마기의 가슴은 찢어지듯 아프다.

그녀의 마음이 아픈 것은 단지 숀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다. 엄마로서 그를 지켜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에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다른 어떤 엄마보다도 자식에 대한 열정과 집착이 강한 게 마기다. 그녀의 성장배경을 보면 그녀 역시 빼앗긴 자식과 똑같이 보호소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자식 만큼은 자신처럼 키우고 싶지 않은 게 그녀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반복되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그녀가 아기를 많이 생산하면서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확실한 부모가 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각오와 목표로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은 사건은 위탁모에게 넘어간 큰 아들 숀이 어느 날 신문광고란에 크게 난 것을 본 것이다. 신문에는 숀의 얼굴과 함께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어요. 누구 사랑을 주실 분 있나요? ”

자신으로부터 아이를 빼앗아 가서는 이제 자신의 이름은 완전히 지워져 버렸고, 자신은 마치 아이를 버린 존재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아니다. 마기가 큰 아들 숀을 비록 화상을 입게는 했지만, 그동안 극진한 사랑으로 키워왔던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마기 자신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정부가 하는 짓을 보면 마기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찢어지다 못해 분노와 억울함으로 미쳐버릴 지경이다. 마기는 광분한다.

세 번째 마기의 심장을 다시 찢어놓은 것은 새 남편 조지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사회복지부에서 빼앗아 간 것이다. 이번엔 남편의 신분 불안정성 때문이다. 파라과이에서 건너온 불법체류자신분의 조지는 정부에서 불안정한 환경으로 분류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법적인 것은 그렇다 쳐도 세 번째 아기를 빼앗기는 마기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그녀가 미쳐버리지 않는 게 다행이다.

이런 그녀의 마음이 치유되려면 아기를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그러려면 좋은 환경이 입증되어야 하고 그런 방법이 쉽게 형성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지와의 첫 번째 딸을 빼앗긴 후 다시 그녀는 두 번째 딸을 임신한다. 역시 국가는 이번에도 아기를 빼앗아 간다. 병원에서 막 회복을 끝내는 시점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사회복지사는 아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을 통보한 후 무자비하게 빼앗아 간다. 광분한 마기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까지 한다. 아기 보다도 마기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 조지는 마기의 몸을 막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집에 온 이후 여전히 흥분한 마기는 왜 아기를 빼앗겼느냐며 조지를 힐난한다. 화를 낼 대상은 국가지만, 이제 국가에 대고 화풀이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 대신 만만한 게 조지다. 분노에 가득 찬 마기는 조지의 몸을 때리면서 심한 욕을 해댄다. 분통이 터지고 그걸 발산할 대상이 없어 답답한 마기는 더 이상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지경에 다다른 조지도 자책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죽고 싶다고 말한다. 주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아내 마기의 질책 앞에서 조지는 주저 앉아 버린다. 그런 남편의 힘 없는 모습을 본 후에야 겨우 정신이 돌아온 마기는 슬쩍 손을 내밀어 조지의 손을 잡으며 위로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그들은 참기 힘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간다.

 

믿고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의 위로

영화는 법적인 측면에서 마기가 얼마나 잘못 살고 있는 가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로 마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의 원인을 보여주고,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를 따져 묻게 만든다. 마기가 그렇게 어렵게 된 원인은 알고 보면 모두 남자들 때문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폭력과 남편들의 폭력 등이 마기를 지금의 어려운 상태로 이끌었던 원인제공자들이다.

국가는 이들의 행위에 대해서 근본적인 대책은 없다. 사회 자체가 남성 폭력적인 분위기이고, 여성은 보호받지 못한다. 그 피해자가 마기 같은 여자고, 그녀가 단지 아기 양육에 불안정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양육권을 박탈하는 행위는 형식적인 처방일 뿐 엄마의 고통을 전혀 치유해주지 못한다.

영화가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바로 남성 폭력에 대한 부분이다. 이러한 폭력적 풍토에서 조지라는 남성이 보여주는 성격은 여자를 존중하고 보호해 주는 정 반대의 분위기를 암시한다. 남성의 폭력으로 상처를 입은 마기에게 조지는 구원의 샘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처음 조지를 만났을 때 마기는 너무 두렵고 다시 남자를 받아들인다는 게 힘들기만 했다. 하지만 역시 어려운 생을 살아온 조지는 마기를 보자마자 사랑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연을 들은 이후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그건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연대의식일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동병상련이면서 도와 주고 싶은 대상으로 보인 것이다.

다른 남성들과 조지는 정반대로 대비되어 묘사되었다.

마기의 바로 전 남편은 두 시간이나 자기를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로 마기를 두들겨 패거나, 돈을 타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 개패듯이 여자를 팬다. 마기 조차도 폭력에 길들여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을 행사한다. 주먹, 언어의 폭력 등. 반면 격한 정서에 사로잡혀 자신을 오히려 때리고 심한 말을 퍼부어도 조지가 마기를 대하는 태도는 침착하고 부드럽다. 그는 전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조지라는 존재는 마기에게 있어 그간 영국에서 봐았던 남자의 세계, 폭력으로 점철된 가부장의 권력이란 실체가 전혀 다르게 부각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조지를 통해 마기는 새롭게 태어난다. 주먹 보다는 말로, 성급한 행동 보다는 사려깊은 사고, 감정적이고 다혈질적인 행동이 아니라 차분하고 합리적인 주장, 무엇 보다도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신사도 정신, 정열적인 애정 등은 다른 남자들과 구별되는 조지의 특징이었다.

구제불능인 줄 알았던 마기의 심적 고통이 치유되는 것은 바로 조지를 통해서였다.

절망에 사로잡혀 조지의 아픈 상처를 일부러 콕콕 찌르듯이 공박하는 마기에게 조지는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며 호소한다. 그가 비행기 티켓을 찢으며 마기의 편에서 끝까지 있을 거라고 다짐하는 대목에서 마기는 힐링을 경험한다. 그건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보여주는 진실한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을 도와주고 싶다는 조지의 말에도 마기는 자기 비하를 한다. 나같은 여자를 왜 도와주려 하느냐. 나는 그럴 가치가 없다. 나같은 건 그냥 놔둬야 해. 당신은 당신 갈 길을 가라. 나를 내버려둬라. 사랑 따윈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동화속에나 나오는 거야. 극도의 자기비하의 심리상태가 바로 마기의 곪은 상처였던 것이다.

조지의 메스는 정확히 그녀의 환부에 접해 있었다. 마침내 조지의 사랑을 확인한 마기는 심리적 안정을 갖고 아이를 갖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기 시작한다. 이후 아이를 빼앗기면서 불안해 하는 마기에게 조지는 계속 희망을 주며 말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냐. 당신을 도와주는 내가 곁에 있잖아.

이렇게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있어 마기는 힐링되어 갔던 것이다. 자기 모멸, 자기 비하, 무능력 속에 빠져 있던 마기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자신의 바로 곁에서 계속 응원해 줄 어떤 사람이었다. 조지의 존재는 바로 그런 것이었고, 결국 마기는 무기력의 늪에서 빠져나와 정부의 형식적인 제도를 넘어선 진정한 인간주의가 무엇이고, 그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여인으로 남게 되었다.

 

 

글 · 정재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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