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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게임이 버려지는 이유와 우리가 패배감을 느끼는 이유는 멀지 않다 - <내언니전지현과 나>
[송아름의 시네마크리티크] 게임이 버려지는 이유와 우리가 패배감을 느끼는 이유는 멀지 않다 - <내언니전지현과 나>
  • 송아름(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18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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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게임이 만들어지고, 실행되고, 결국 버려지고야 마는 과정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단순하게는 잘 못 만들어진 게임이 밟는 수순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테고, 조금 더 깊이 따진다면 게임의 내·외부적 문제나 게임사의 태도 등을 통해 다른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고려사항 중 유저의 의견은 특별한 것이 될 수 없다. 게임의 종료 자체가 소비자의 무관심이 이끌어 낸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버려진 게임'에 많은 유저가 남아 게임이 '제대로' 운영되길 바라고 있다면, 적어도 이 게임이 ‘망겜’으로 취급받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게임이 ‘버려진’ 데에 유저의 무관심이 관여하지 않았다면 이를 넘어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 년 동안 해온 유저들의 이야기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영리하게 이 차이를 파고들며 유저들의 추억 속 게임의 외면과 긴 시간 이 나라가 집중해 온 가치의 폐해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짚어낸다.

 

1999년 7월 출시된 일랜시아는 레벨업을 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즉 굳이 퀘스트를 향해 달려 나갈 필요가 없는 역할 수행 게임이었다. 그저 캐릭터를 통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게임이었던 일랜시아는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되지 않은 채 '망겜'이 되어 버린다. 운영진이 관리하지 않는 게임은 남아 있는 이들까지 위협하는 버그들이 난무하고 더 이상 게임 속 평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아직 일랜시아에는 자신의 과거를 그곳에서 찾는 누군가가 남아 있다. 자신이 행복했던 때의 기억을 가지고, 또 여기에서 함께 했던 커뮤니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그저 순수하게 무엇인가가 하고 싶어서 아직 일랜시아 '세계'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게임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와 함께 스스로가 왜 이곳에 계속 남아 있는지 역시 아직 게임에 남아 있는 뚝심만큼이나 명확하게 알고 있다.

감독은 일랜시아에 남아 있는 길드원들을 직접 만나면서 그들에게 이 버려진 게임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들은 자신이 이 게임을 하던 그 시기에, 혹은 게임을 할 때 가지고 있는 행복했던 기억들을 일랜시아에 남아 있는 이유로 꼽았다. 사실 이는 꽤 슬픈 답변이다. 20대 청년들이 과거의 추억을 당겨 회상한다는 것은 그들이 게임을 하던 그 행복한 시기를 지나 마주한 현실이 그때와 같은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랜시아를 지나온 그들이 마주한 것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미래와 그저 순서가 정해진 듯한 길을 밟아가는 것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뼈 속 깊이 새겨넣은 자신들이다. 게임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과는 다르게 내 삶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꿈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른 현실을 깨닫는 것 외에 희망적인 무엇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천천히 설명해가는 지금의 삶은 조금은 버겁고 조금은 재미없는, 그래도 그저 모두가 이 시기를 이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 속에서 천천히 밟아나가야 하는 고행이었다.

 

이 다큐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멈추었다면, 벌써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청년들에 대한 연민 이상을 이야기한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과거에 환호하는 이야기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작으로 약 10여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레트로’의 유행 역시 1990년대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쉽게 말해 30대를 넘어서기 전부터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은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충분히 넘치도록 이야기되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이 대열에 숟가락을 얹는 것뿐이라면 그 대상이 굳이 게임이어야 할 필요 역시 없다. 그들의 과거에 대한 연민은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추억 팔이’에 그치지 않겠다는 이 영화의 의지는 제목에 분명 담겨 있었다. 감독은 제목에서 게임 속 닉네임 '내언니전지현'에 멈추지 않고 그와 함께 현실을 살아온 '나'를 구분했다. 일랜시아에 남아 있는 자로서의 '내언니전지현'과 일랜시아를 남긴 자들에게 주목하는 '나'는 이 작품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영화는 남은 유저들의 이야기와 함께 역시나 일랜시아가 활발하던 시기를 추억하는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내언니전지현'이 공감한 것이 같은 상황에 놓인 유저들이었다면, '나'가 포착하려는 것은 왜 이 게임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있었다. 과연 왜 이 게임은 버림받아야 했을까? 감독은 당시 이 게임의 개발자들을 만나면서 천천히 그 이유를 찾아 나간다. 개발자들을 만나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발자들의 시작과 일랜시아에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의 시작이 같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추억은 같은 곳에 있다. 개발자는 처음 사람들이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그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일랜시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게임 안에서의 커뮤니티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결속력을 주며, 결국 어떤 행복에 도달하는지를 분명하게 경험한 순간을 설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그때의 즐거움과 행복은 추억일 뿐이다. 게임‘사’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그들의 즐거움은 무가치 한 것으로 취급해버렸기 때문이다.

 

명확한 퀘스트가 없다는 것은 특별히 돈을 쓸 이유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현질로 빠르게 목표에 가 닿는 이들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계층의 탑이 높아야 다시금 현실을 유도할 수 있는 논리를 일랜시아는 전혀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일렌시아가 버려진 이유는 결국 그것이었다.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것에는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철저한 논리는 일랜시아의 업데이트를 막았고 버렸다. 처음 즐거워하며 무엇이든 만들어보자는 개발자들의 시도와 관심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것에 몰두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유저들에게는 커뮤니티를 빼앗아갔다. 즐거운 것, 좋아하는 것은 미뤄두고 일단은 달려 보라는 이 사회의 거대한 압력은 그곳에도 있었다. 일랜시아를 만들었던 개발자에게 일랜시아의 NPC를 설명하는 유저들과 자신이 만든 것을 기억하지 못해 당황하면서도 그 세계를 다시 떠올리려 애쓰는 개발자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선 꼭 간직하고 싶었던 그 기억이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린 지금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현질로 빠르게 목표에 가 닿아야 하는 게임들 사이에서 일랜시아를 밀려났다. 결국 돈이 되지 않아 밀려난 일랜시아는 이 사회에서 그 돈 때문에 급하게 뛰어야 하고 그 돈 때문에 좌절해야 하는 많은 이들과 다르지 않다. 이 게임의 유저로 목소리를 냈던 청년들의 불안은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 되어버렸는지를 드러낸다. 쓸모 있는 누군가가 되는 것은 분명한 실체로 증명해야만 가능한 지금, 이익을 내지 못해 버려진 일랜시아는 곧 우리의 위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다큐가 IMF를 전하는 뉴스에서 부터 시작했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일랜시아가 출시되는 그 시점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이를 통해 보여준다. IMF 이후 긍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한 '유연화'는 여기저기 들러붙어 유연하게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법을 사회 전반에 깔아 두었다.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유연화는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게임의 유연화는 놀이가 아닌 현질로의 생산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극복하려 해도 이는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마치 IMF를 함께 극복하자며 격려하던 앵커가 전한 첫 기사가 높아진 물가상승률에 대한 것이었던 것처럼. 영화가 선택한 뉴스의 장면들은 유저와 망겜 사이를 예리하게 연결하면서 지금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감독이 이 망겜 아래 남아 있는 이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까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취해낸다. 감독이 끝내 넥슨 관계자를 만나 4시간에 걸친 회의를 이끌어내고, 길드원들과 함께 게임 속 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들이 문제를 어떻게 헤쳐나가고야 말 것인지를 차분히 설명해준다. 생각을 함께하는 이들을 모으고, 회의를 통해 동의를 구하며, 결국 상대와의 대화를 통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이 과정은 그저 힘든 세대라고만 치부하고 보아왔던 그들이 그들만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이는 디즈니를 향한 무리한 인수 요청과 결국 거절당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넥슨의 논리와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어떻게 좇을 것인가. 망겜의 유저와 게임사는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고, 결국 함께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해법이 되고 있었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남아 있는 이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게임사는 답했고 일랜시아는 변화했다. 이쯤에서 주의할 것은, 이것만으로 그들이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거나, 이 기억으로 자신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결론 내리는 것은 비약이라는 점이다. 덧붙여 이 작품이 현재의 청년 세대들이 어떤 ‘참여’를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식의 해석 역시 쓸데없는 일이다. 대개 ‘청년’ 감독들이 영화로 보여준 성취는 엄청난 사회의식으로 튀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해석은 촌스러움의 극단에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누군가는 즐겁고 즐거웠다. 그 즐거움 속에 나와 너의 기억이 있고 영화는 그 기억이 왜 없어졌는지를 쫓았을 뿐이다. 애착을 가지고 달려들 수 있었던 이유의 중심엔 적어도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그리고 우리를 모아주었던 기억이 먼저 자리했었다. 이 환희가 전제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아무 곳에서나 쉽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 아니 게임을 넘어서 발휘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 한국 현대문학의 극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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