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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부모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장윤미의 문화톡톡] 부모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 장윤미 (문화평론가)
  • 승인 2021.11.01 0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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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경험이 없다 보니 죽음을 앞둔 부모를 돌본다는 게 얼마큼 힘든 일이고 어떤 감정인지 잘 모른다. 상상해봤자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짐작하는 게 전부다. 사실 의학적 지식도 없거니와 지식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실천할 용기도, 돈도 없다. 게다가 나 역시 짊어져야 할 생계와 가족이 있다 보니, 부모가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 닥쳤을 때 내 일상을 모두 젖혀두고 돌봄에만 전념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나 역시 보통의 사람들처럼 시설이 괜찮고 비교적 저렴한 요양원을 알아볼 것이고, 내 부모를 잘 봐달라는 명분으로 담당 요양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시로 들여다봐달라는 부탁을 할 것이다. 비록 부모의 돌봄은 다른 사람 손에 맡겼더라도 임종만큼은 반드시 지켜볼 것이라는 비장한 다짐도 해보긴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도 든다.

“밥 묵나?”

박희병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죽음을 앞둔 구십 노모를 환갑이 넘은 아들이 간호하면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1년 동안 어머니가 했던 말들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책이다. 환갑이 훌쩍 넘은 글쓴이의 입에서 나온 ‘엄마’란 단어는 어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절대적 애정이 느껴진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나이, 사회적 지위, 체면을 모두 지워버리고 철없고 순진한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지도록 만드는 아름다운 언어. 그것은 바로 엄마라는 말이다.

 

필자의 엄마는 말기 암과 인지장애를 판정받고 죽음을 앞두고 있다. 엄마의 마지막 돌봄 방식을 두고서 몇 개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팔자는 엄마가 편안한 죽음을 맞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양원 대신 호스피스 병원을 선택한다. 여러모로 호스피스 병원 생활은 요양원보다 고단하고 불편한 곳이다. 물론 불편함과 고단함의 몫은 환자 당사자보다 돌봄을 하는 사람의 것이 더 크다. 한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는 의료 시스템으로 인해 일정 기간이 되면 전원을 해야 하는 불편함, 완화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담당 의사와의 의견 충돌, 그리고 죽음이 일상인 호스피스 병동 생활을 견디는 일은 어찌 되었든 병마로 고통받는 환자와 환갑이 넘은 보호자 모두에게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양원을 선택하지 않은 건 필자인 아들의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외로운 곳에 어머니를 홀로 둘 수 없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독자인 나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환자를 사물화하는 의료 시스템에 생때같은 ‘엄마’를 밀어 넣을 수는 없다는 의지는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중요한 전제이자 조건이지 않았을까.

필자의 글 앞에서 쓰여 있는, 길어봐야 두 문장에 불과한 엄마의 말들에는 그간의 생에 대해 고달픔과 안타까움이,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가족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서러움과 걱정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특히 누워서도 수시로 아들에게 묻는 “밥은 묵나?”, “요새 많이 말랐다. 밥은 묵나?”, “밥 묵고 가라.”는 별것 없는 말에는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와 몸의 상태에 따라 매일 다르게 느껴진다. 밥을 먹는 건 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밥을 먹지 않는 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어머니의 ‘밥 묵나’라는 질문은 아들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과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라 괜히 가슴이 아프다.

“이제 고마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가자. 안 갈래?”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식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모든 의학의 힘을 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해드리는 것, 아니면 모든 의료의 힘을 동반해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해드리는 것. 둘 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선택이 쉽지 않은 이유는 환자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배우자든 자식이든 절대 알 수 없으며, 환자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의학적 사고와 보호자의 판단에 따라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생의 존엄성은 자신이 선택했을 때 빛나는 것이기에 보호자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한들 환자 당사자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나은 선택이란, 그저 산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뿐이다. 최선을 다해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내가 부모를 포기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상 환자의 선택은 그저 쓸데없는 고집으로만 비칠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도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지금은 집에서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서가 되었다. 특히나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을 고칠 수 있는 질병의 하나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커지면서 죽음 앞에서 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에 비교해 상당히 높아졌다. 여기에 비약적인 의료 기술 발전으로 인해 노환도 고칠 수 있는 질병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죽음을 늦추기 위해 첨단 의학, 신약 개발에 기대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경제적으로 여유만 있다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와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병원을 이용하고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이전보다 훨씬 길어지고 그만큼 간섭도 커졌다.

앓고 있는 질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어쩔 수 없이 장기간의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물론 병세가 좋아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병원이 안전하고 깨끗하다고 해도, 익숙하고 편안한 내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다. 혹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주변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갖고 싶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라도 오게 되면 그나마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돌봄을 이유라지만 죽음은 당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에게도 두려움과 공포다.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 무의미하다고 하더라도 살리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병원의 의존도만 높인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생을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에서 보내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는 건 이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의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19 팬더믹 이후로는 요양원에 모신 부모의 임종을 지키기도 어렵게 되었다.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종식된다고 해도 이러한 분위기는 유감스럽지만,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요양원 측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24시간 대기를 하고는 있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조금만 더 머물다 가길 바라는 나의 간절함보다 늘 한발 앞선다.

요즘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은 자연적인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죽음이 인생에서 더 멀어지게 되고 그러니 죽음이 더 두려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너무나 분명한 진실이지만 외면할 수 있다면 가능한 외면하고 싶다.

탄생의 신비는 배워도 죽음의 신비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탄생의 두려움은 얼마든지 희망으로 바꿀 수 있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보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죽음 그다음을 몰라서 두렵다.

그 마음을 잘 아는 글쓴이의 아내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빛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불안해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빛이 보이면 그 빛을 따라가면 된다고.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죽음 이후를 알 수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는 엄마 앞에서 이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다가 보내는 일도, 남의 손에 맡겨 놓고 생계를 이유로 부모의 고통을 잊고 있다가 죄책감에 가슴을 쥐어뜯는 일 따위는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글 · 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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