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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당신얼굴 앞에서>, 죽음 앞에서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당신얼굴 앞에서>, 죽음 앞에서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8 0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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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나이를 먹어가는 느낌을 함께 공유하는 데 있다. 감독도 그의 영화의 출연자도 그리고 데뷔작부터 그의 영화를 보아온 평론가도 늙어가는 중이다. 영화는 대중 매체이기 때문에 주로 젊은 관객층을 소구 대상으로 설정하게 된다. 그 결과 감독의 나이에 부합하는 영화가 드문 편인데, 홍상수는 자기 나이를 따라가며 영화를 찍는 드문 감독이다.

 

담배 앞에서

<당신얼굴 앞에서>(2021)에는 주인공 상옥(이혜영)이 담배 피우는 장면이 4번 나온다. 동생 정옥과 산책할 때, 예전에 살았던 이태원의 집을 찾아갔을 때, 영화감독 재원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와 헤어질 때이다. 상옥이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단조로운 기타 소리가 부가되어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준다.

첫 번째 담배 피우는 장면에서, 상옥은 개울가에서 담배를 피운다. 이때 상옥은 높이가 낮은 다리 아래에서 몸을 불편하게 비틀었다가 앉은 자세를 취한다. 몸을 구부리며 담배를 피워무는 제스처는 온몸으로 담배 한 대를 갈구하는 절실한 느낌이 뿜어져 나온다. 이혜영 배우의 깊은 연기의 내공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여기에 개울물 소리와 사운드트랙이 어우러져 그 간절한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네 번째 담배 피우는 장면에서, 상옥과 재원은 술집 ‘소설’에서 나와 우산을 쓰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카메라는 뒤쪽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고, 그들은 담배를 함께 피운다. 골목 끝에서 멈춰선 그들은 마주 보며 웃기도 한다. 이때 다소 망설이는 듯 줌인하며 다가가는 카메라와 빗소리 그리고 사운드트랙은 언뜻 평범해 보이는 화면을 멜랑콜리한 정서로 가득 채우면서 미묘한 감동을 준다.

 

상옥이 불편한 자세로 담배 피우는 장면은 그 간절함이 느껴져 매우 인상적이다
상옥이 불편한 자세로 담배 피우는 장면은 그 간절함이 느껴져 매우 인상적이다

추억 또는 기억 앞에서

이혜영은 이만희 감독의 딸이다. 이만희의 영화 가운데, <기적>(1967), <방콕의 하리마오>(1967), <생명>(1968), <휴일>(1968)의 제작자는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제작자로 알려진 전옥숙이다. 홍상수는 전옥숙 제작자의 아들이다. 이만희와 전옥숙이 함께 영화를 만든 50여 년 후에, 그들의 아들과 딸이 1960년생 감독과 1962년생 배우로 만나 함께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만희와 전옥숙의 영화에서, 가장 작품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 <휴일>(유튜브 한국고전영화 채널에서 볼 수 있다)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당신얼굴 앞에서>가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상옥의 하루를 그린 것처럼 <휴일>은 주인공 허욱의 24시간을 담아낸 영화인데, 박정희 정권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너무 절망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이 검열에서 문제가 되었다. 문공부는 허욱이 머리를 깎고 입대하는 설정으로 결말을 바꾸면 상영 허가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뿐만 아니라 가장 타격이 클 수밖에 없는 제작자까지 모두 반대해 결국 개봉하지 못했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은 재원과의 약속이 변경되어 잠깐 틈이 나자 어릴 때 살던 이태원의 집을 찾아간다. 그 집의 정원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집 건물은 개조해서 가게가 되어있다. 상옥은 가게 주인의 호의 덕분에 집 안으로 들어가 아마도 예전 자기의 방이었을 공간에 이른다. “옛날 기억이 다 난다.”고 했던 상옥은 휘몰아치는 기억 앞에서 괴로워하며, 추억을 따라 옛집을 찾은 걸 후회한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상옥은 의자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어린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나이는 여섯 살에 이름은 지은이라는 아이는 가게 주인의 딸로 추정된다. 지은이는 가게 주인이 말한 대로 “인천에 산다.”면서도, “인천에는 집이 없고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에게 인천의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아파트이기 때문에, 여기가 집이라고 하는 것일까? 홍상수 영화에서는 이상하게 앞뒤가 맞지 않거나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오가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이 종종 있다.

지은이가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두 번째 반복할 때, 상옥은 감동한 듯 “지은이 예쁘다.”라며 아이를 너무나 따뜻하게 품에 안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벽과 방문 사이에 앉아있는 상옥을 미디엄 숏으로 잡고 있어서 그녀가 기억의 방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는 잠깐의 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방문을 후회하는 내레이션, 갇혀있는 듯한 미장센 그리고 상옥이 이 집에 살았던 나이와 비슷한 아이가 등장해 시종일관 뒷모습으로만 보이는 점 등은 상옥이 어린 시절의 자신(또는 내면 아이)과 대면하는 장면으로 해석하게 된다.

상옥이 지은을 안아주는 장면은 <무릎팍도사>(2008년 2월 20일 방영)에 이혜영이 게스트로 출연해 언급한 일화를 떠오르게 한다. 진행자 강호동이 ‘아버지(이만희 감독)에 대한 그리움’을 질문할 때, 이혜영은 “우리 아버지는 끌어안을 때 앞을 보고 탁 안아서 꽉 끌어안아요. 부서지게, 언제나 그렇게 포옹을 해요. 언제나….”라고 답한다. 그리고 동시에 두 팔을 들어 아버지가 안아주던 모습을 재현하는데, 그것은 상옥이 아이를 포옹하는 팔의 제스처와 거의 비슷하다.

 

상옥은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면한다
상옥은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면한다

죽음 앞에서

상옥은 술집 ‘소설’에서 영화감독 재원(권해효)을 만난다. 재원은 오래전 상옥이 출연한 영화의 몇 장면에서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점을 언급하면서, 상옥에게 영화출연을 제안한다. 이때 상옥의 손은 배 부위에 잠깐 머무는데, 영화 도입부에서 상옥이 소파에 누워 배를 만졌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그녀가 어디 아픈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재원이 영화를 찍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고 하자, 상옥은 영화출연이 어렵겠다면서 비밀을 털어놓는다. ‘불치병에 걸려 5~6개월 정도 살 수 있는데, 다행히 아직 고통은 없다. 병원에는 가지 않을 거고 집에서 하는 일 하고 돌아다니고 하다 아파지면 진통제 맞고 견디다 죽을 생각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죽음을 대하는 상옥의 결심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죽음의 모티브는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계속 반복되었지만 다소 추상적이었다. 그러나 <당신얼굴 앞에서>의 죽음은 구체적이다. 홍상수는 늙어가고 있으며, 그의 영화를 데뷔작부터 보아온 우리 역시 죽음을 현실로 생각할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

상옥은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솟아나는 눈물을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볍게 닦아낸다. <무릎팍도사>에서, 이혜영은 부모가 헤어졌다고 말하기 직전에 얼굴을 그냥 쓸어내리는 것처럼 눈물을 닦으며 슬픔을 감추었다.

이어서 상옥은 17살 때 자살하려 했던 일을 이야기한다. ‘죽으려고 마음먹고 서울역에 갔을 때, 광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실체가 뭔지, 세상이 뭔지, 가슴으로 느꼈다.’

재원은 며칠 여행을 떠나 단편영화라도 같이 찍자고 제안하고, 상옥은 동의한다. 다음 날 아침, 상옥이 자고 있는데, 재원의 음성 메시지가 온다.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내용인데, 홍상수 식으로 묘하게 말을 비틀어서 전달함으로써, 위선적인 느낌을 준다. 상옥은 실소한 다음, 그 메시지를 두 번째 들을 때는 깔깔대며 몸을 비틀며 웃는다. 그녀의 반응에 다소 과장된 면이 있기 때문에,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릎팍도사』에서, 이혜영은 부모가 자기를 낳았는데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 눈물을 감추고 활짝 웃는다. 그러므로 상옥의 웃음은 슬픔에 대한 방어기제처럼 보인다.

상옥은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내레이션과 재원과의 대화를 통해, 죽음 앞에 선 자신의 기도와 깨달음을 들려준다. 상옥은 “미래의 악에서 구원해 주시고, 항상 여기 있게 하소서.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 순간만이 천국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또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다시 생각났다.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두렵지 않다. 이미 다 완성되었으니 더하고 뺄 것도 없다. 은총도 다 있다.’라고 재원에게 말한다. 상옥은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다짐하지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이태원의 옛집을 방문하거나 재원과의 약속을 기대한다. 인생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로 부지불식간에 자꾸 끌려가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결국 인생은 ‘일장춘몽’일 뿐이다

에필로그

영화 도입부에서, 상옥은 잠자고 있는 정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옥은 정옥의 손을 만질까 말까 망설인다.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반복된다. 이번에는 잠든 동생의 손을 가볍게 터치한다. 죽었을 리는 없겠지만, 상옥은 잠에 빠진 정옥이 살아있는지 확인해 보고싶어하는 것 같다. 상옥이 뒤척이며 얼굴의 방향을 바꾸자, 정옥도 자리를 이동한다. 상옥은 동생의 얼굴 앞에서 동생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 그리고 덧붙인다. “무슨 꿈을 꾸니?” 사운드트랙과 함께 카메라가 뒤로 빠지며 영화가 막을 내릴 때, 우리는 불현듯 ‘인생은 일장춘몽’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사진출처: (주)영화제작전원사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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