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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세자매>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세자매>
  • 서성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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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세자매>

 

첫째, 희숙 이야기

첫째 희숙은 질풍노도기의 딸 가희와 살며 꽃집을 운영하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그녀는 늘 기가 죽어있고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사람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해도 자신을 지키거나 방어할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때가 되면 찾아와 돈을 뜯어가는 야비한 남편이 모멸감을 줄 때도 희숙은 제대로 된 말대꾸조차 못하고 그저 비실거리며 웃는다. 남편과 딸에게도 무시와 구박을 당하며 가족에게조차 기가 눌려 주눅이 들어있다.

 

둘째, 미연 이야기

둘째 미연은 광적으로 종교에 집착하며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행복이라 믿으며 자신을 이상적인 가정의 설계자로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다. 대학교수인 자상한 남편은 같은 교회 성가대 메인 보컬인 대학생 효정과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미연은 주님의 계획으로 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완벽해 보이는 미연에게도 치부가 있지만 완벽해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치부를 덮으며 완벽한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 미연은 완벽한 척하는 가식덩어리를 넘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억누른 만큼 내부는 잠재된 광기가 꿈틀거리는 인물이다. 미연의 광기는 어린 딸이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안해야 할 식사 시간을 억압의 시간으로 만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발적인 종교적 실천이나 관용을 허락하지 않는 강제와 억압을 가한다.

 

셋째, 미옥 이야기

셋째 미옥은 연극 극작가로 슬럼프에 빠져 술과 함께 엉망진창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이혼남과 결혼하면서 갑자기 엄마가 돼 엄마라는 역할도 낯설고 버겁다. 엄마가 된다는 게 뭔지 모르지만 잘 해내고 싶어 아들에게 미숙한 손길을 내밀지만 어색하기만 하다. 미옥에게는 풀리지 않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한 번씩 떠올라 그녀를 괴롭힌다. 이 풀리지 않는 기억 때문에 항상 화가 나 있다.

 

상처의 원인을 찾아서

영화가 귀 기울이는 부분은 세상의 수많은 사건보다 그 사건에 반응하는 세 자매의 태도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반응하고 행동을 하는 걸까. 같은 아버지 밑에서 낳고 자랐는데도 세 자매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성격, 재능, 현재 경제적 상황까지 판이하게 다르다. 성장 과정은 성격 형성을 비롯해 살아가는 태도까지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첫째는 괜찮은 척, 둘째는 완벽한 척, 셋째는 안 취한 척하며 살아간다. 영화는 그런 척들을 걷어내고 세 자매의 원 가족이 공유하는 내밀한 상처의 기원을 찾아간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이승원 감독의 전작 <소통과 거짓말> <해피뻐스데이>에서 일관되게 관통했던 서사 구조이기도 하다. 감독은 상처와 후유증 그리고 그 원인을 드러내는 순으로 영화적 시간을 배열함으로써 과거 원 가족의 삶의 형태가 현재 삶까지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충격적으로 재현한다. 전작보다 한결 유하고 서정적인 시선이 돋보이지만, 특유의 화법은 여전하다.

 

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이 영화는 기존 통념의 가족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깨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오히려 가족이 주는 상처가 징글징글하다. 영화 <세자매>는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놓는 것만으로 완벽한 사과와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판타지물이 아니다. 리얼하게 가족의 치부와 사과를 드러내놓는 과정에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가식 없는 소통이 가능한 ‘가족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영화이다.

세 자매가 가진 개인적인 상처의 근원에는 원 가족의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다. 세 자매에게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의 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 아버지가 있었고, 자신도 피해자이자 어른으로서 자식들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방관한 ‘조력자’ 어머니가 있었다. 딸들이 성장한 후에도 아버지의 폭력이 남긴 상처가 현재 삶에 깊숙히 침투해 들어와 치유되지 않은 채 세 자매의 삶에 끊임없이 관여한다.

숨겨둔 상처는 곪는다. 가족이라는 징그럽고 애틋한 존재가 준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후에 치유가 가능하다. 그리고 감독은 말한다. “가족관계에서 진정한 사과가 많은 걸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문제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냐마는 세 자매의 세 가족이 사는 모습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드러나면 겉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자매들의 말할 수 없었던 기억의 매듭 풀기가 시작되고 세 여성의 사적인 치부에서 출발해 원 가족의 트라우마로 서서히 들어간다. 여성의 서사를 이렇게 깊이까지 파고드는 영화를 찍기까지 캐릭터 묘사와 대사에 기울여진 섬세함이 놀라운 영화다. 여성 (인간)의 아픔을 여성의 주체적인 시선으로 여성이 직접 풀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이승원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 안 할 수가 없게 만든 작품이다.

 

 

글·서성희

영화평론가. 대구경북영화영상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센터장으로 영화·영상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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