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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현대사회의 계급과 탐욕, 폭력에 관한 묵시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현대사회의 계급과 탐욕, 폭력에 관한 묵시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1.11.08 1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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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영화평) '뉴 오더'

 

일각에서 영화 <뉴 오더><기생충>과 연결지어 “<기생충>을 소환하는 영화. 무자비하게 급발진하는 스릴러”(워싱턴 포스트),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보다 신랄한 계급 우화”(퍼스트포스트)라고 말했다. 영화의 시작부터 전편(全篇)을 관통하는 녹색은 확실히 계급과 관련한다.

두 영화의 다른 점도 많다. 계급의 갈등과 적대는 완연하지만 <기생충>이 종국에 우화로 끝난 것과 달리 <뉴 오더>에서는 본격적인 투쟁과 전면적인 폭력이 분출한다. <뉴 오더>에서 그린 것을 계급투쟁과 투쟁과정의 폭력이라고 규정하기엔 마땅치 않고, 영화와 별개로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다. 상대적으로 훨씬 덜 폭력적인 가운데 계급투쟁의 성격을 <기생충>이 더 뚜렷하게 드러냈다면, <뉴 오더>는 계급적대를 배제하지 않지만 계급 외에 인종과 폭력의 문제 등 다른 요소를 함께 묘사했다. 한 마디로 라틴아메리카적인 사회갈등을 이 영화는 다뤘다.

 

색깔의 영화

이 영화의 주연은 단연 나이안 곤잘레스 노르빈드이다. 미셸 프랑코 감독이 제시한 8명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비중이나 의미상으로 가장 큰 배역은 나이안 곤잘레스 노르빈드가 연기한 마리안이다.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미래, 멕시코 사회를 배경으로 마리안의 결혼식 날에 영화가 전개된다. 벌거벗은 마리안이 하얀 벽을 배경으로 선 채 녹색의 비를 맞는 장면, 녹색의 물이 아래로 콸콸 흘러내려 가는 계단, 녹색 줄기에 빨강 잎을 인 기이한 나무 등 영화의 도입부는 프랑코 감독이 할 이야기를 압축해서 미리 보여준다.

극중에서 마리안이 입은 옷의 색깔은 빨강이다. 마리안의 역할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영화에서 분명하게 부각되는 색깔로, 극중에서 이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은 마리안이 유일하다. 러닝타임 내내 분명하게 제시된 극중의 색은 마리안의 빨강, 민중의 녹색이다.

녹색과 달리 빨강이 계급을 의미하지는 않는 듯하다. 비록 부유층의 일원이자 또한 대표 격이기도 한 마리안이 빨간 옷을 입긴 했지만, <뉴 오더>에서 계급대립은 색조의 차이로 나타난다기보다는 유채색(지배계급)과 무채색(피지배계급)으로 식별되는 듯하다. 결혼식에 폭도가 난입해 아수라장이 벌어지는 장면.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사람들과 무채색에 가까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이때 색상만으로 계급이 충분히 구분된다.

유채색과 무채색의 대비 외에 인종을 통해 계급은 식별된다. 결혼식장을 채운 부유층과 기득권 계층은 대체로 백인종의 외양이고, 거리를 메운 시위대는 원주민 혹은 혼혈의 모습이다. 결혼식이 열린 마리안의 저택 내에서도 인종 구분은 확연하다. 집주인과 결혼식의 주인공, 하객 등은 백인이고, 시중드는 사람과 운전사 등은 원주민 아니면 메스티조이다. 빨강 옷을 차려입은 주인공 마리안은 금발의 전형적인 백인이다.

인종을 통한 계급식별은 영화적 설정이 아니라 실제 멕시코사회의 반영이다. 프랑코 감독은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의식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프랑코 감독은 구조적인 인종 차별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결과와 경제적 불평등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며 예를 들어 멕시코에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디어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으면 가능한 한 원주민 같지 않아야 한다고 전했다. 서구 열강의 이른바 신대륙발견과 이어진 수탈의 역사는 아직 다양한 행태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북미에서는 흑인이 차별의 주요 대상이라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역사의 차이로 비()백인이 차별의 포괄적인 대상이다.

<기생충>에서 높이의 차이로 계급을 표현한 것과 달리 <뉴 오더>에서 계급을 그리는 방법은 복합적이다. <뉴 오더>에서는 <기생충>이 그리지 않은 또 다른 사회세력을 등장시키는데, 군부이다. 군부는 과거 한국사회에서도 큰 힘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그 힘이 거의 소멸한 상태이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군부는 한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또 지금까지 무시하지 못한 권력집단이다.

극중 군인들은 실제로 군복을 착용한 모습인데, 군복의 특성상 민중 혹은 피지배계층이 던지는 녹색 페인트와 흡사한 계열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군부 내에도 인종에 따른 계급차이가 완연하다. 마리안을 납치하거나 거리에서 민중과 맞서는 군인들은 인종상 원주민에 가까운 반면 장군들은 백인에 가깝다. 후자의 예로 영화가 끝날 무렵 교수형 장면에서 단상에 앉은 두 명의 장군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다. 군부나 민중이나 폭력의 주체라는 점 또한 동일하다.

 

그러나 당연히 둘의 차이는 크다. 민중의 폭력은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지만 군부의 폭력은 사회의 구조적 수탈을 존속게 하는 가학적이고 억압적이며 부당한 폭력이다. 폭력은 미시적으론 큰 차이 없이 불편하고 부당한 것이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선 정당한 폭력과 부당한 폭력으로 나뉜다. 영화에서 어느 쪽이 부당한 폭력이고 어느 쪽이 정당한 폭력인지가 한눈에 드러난다.

군복의 색과 저항의 페인트 색 사이의 차이 또한 언급돼야 한다. 같은 계열이지만 둘의 색깔이 다른데, 굳이 의미를 부여하며 구분하자면 저항의 페인트 색은 멕시코 국기의 세 가지 색깔 중 하나인 그 녹색과 닮았다. 군인 대다수와 시위대 대부분이 같은 계급에 속해 있지만, 대결하는 상황을 반영하듯 둘의 색깔은 같은 듯 갈린다. 19805월 광주에서 그러했듯, 군부는 계급상 시위대와 동질하지만 같은 계급에 폭력을 행사하곤 한다. 러시아혁명기 등 몇몇 예외가 전해질 뿐이다.

조직된 체계적 폭력(군부)과 자발적인 엉성한 폭력(시위대)이라는 차이도 있다. 영화에서 그린 시위대는 과거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기와 달리 단일한 이념이나 조직 노선 없이 즉자적으로 움직이는데 이것은 점차 현대 시위의 특성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세상은 가능할까

멕시코에서는 빈곤의 정도는 다르지만 인구의 절반이 넘는 6,400만 명의 사람이 빈곤하게 산다. 빈곤층 대다수는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깨끗한 물이나 음식, 의료 서비스,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다. 소수가 부를 독점하고 있다. 멕시코에는 상류층이 거주하는 구역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보안이 아주 철저하다. 15분 거리에 있는 빈민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이런 문제가 멕시코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선진국보다 빈부 격차에 의한 거주 구역 분리가 더 심해서 확연히 눈에 띈다. 인간의 이기심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모두가 손을 놓고 있으면, 결국 머지않아 폭발하고 말 것이다.”

프랑코 감독이 설명한 <뉴 오더>의 연출의도이다. 영화에서 마리안의 비중은 압도적이다. 나신으로 녹색의 비를 맞으며 강한 인상을 보여준 첫 장면 이후 돋보이는 빨간 색 투피스를 입고 스토리의 축을 형성한다. 마지막 죽음의 장면에서도 처음에 입은 그 빨강 옷을 입은 채이다.

영화에서 마리안에게 빨간색을 사용한 이유는 다층적일 것이다. 멕시코 국기와 프랑스혁명기의 삼색기에 빨간색이 들어있음은 쉽게 연상된다. 결혼식 날 예식을 앞두고 마리안은 시위대가 거리를 장악한 긴박한 상황인데도 과거 자기 집에서 일했던 사람을 돕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갔다가 곤경에 처해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도입부에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을 잠깐 비춘 후 빨간 투피스를 입고 납치되어 고통받고 학대받다가 끔찍한 결말을 맞는 마리안은 시대의 희생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감독이 때로 무당의 역할을 한다면, 마리안이란 배역은 제사에서 드리는 흠 없는 희생양과 다름아니다. 무결한 신부의 죄 없는 죽음. 이것 또한 가톨릭 사회인 멕시코에서 흔히 떠올릴 수 있는 희생의 모습이다. 마리안의 이마에 적힌 16이라는 숫자. 별다른 의미 없는 임의적인 숫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예수의 탄신일로 16일을 기념한다는 사실을 참고로 기억해 본다.

마리안과 마찬가지로 다른 계급의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선 인물로는, 마리안 집안의 집사 격인 마르타(모니카 델 카르멘)와 그의 아들을 들 수 있다. 마리안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마르타 모자 또한 선의를 보답받지 못하고 희생당한다. 교수형을 당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영화의 대미를 장식한 데서 어떤 의도를 읽어내야 할까.

교수형을 집행하는 엄숙한 무대와 대미의 음악 ‘Toque de Bandera’(국민의례용 음악)에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주의의 위용을 볼 수 있다. 마르타가 교수형 당하기 전 클로즈업 된 두 인물은 장군과 자본가이다. 멕시코 국가를 지배하는 두 장본인이다. 멕시코가 누구의 나라인지를 냉정하게 지적하며, 누구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마리안과 마르타라는 대표적인 두 계급의 희생은 무기력의 소묘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프랑코 감독은 영화 <뉴 오더>는 일종의 경고라며 영화에서 그려진 디스토피아는 머지않은 현실이며 불평등 문제를 시민들이 정당하게 담론화하지 못하고, 어떤 반대의 목소리든 침묵을 강요당한다면, 결국 혼란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흐름이 빠르고 역동적이다. 폭력이 기계적이고 인간적 머뭇거림을 배제해 인상적이었다. 미셸 프랑코는 <뉴 오더> 이전에 칸영화제에서 세 차례 수상한 멕시코 영화계의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이다.

 

 

글·안치용
영화평론가 겸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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