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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2) - 손보미와 정소현의 초기 소설을 중심으로
[이병국의 문화톡톡]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2) - 손보미와 정소현의 초기 소설을 중심으로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1.11.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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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2) - 손보미와 정소현의 소설을 중심으로

 

3. ‘실수’라는 위선적 봉합의 불가능성

 

손보미가 ‘오차’로 인해 발생한 삶의 균열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그려냄으로써 결여를 그 자체로 제시하고 있다면 정소현은 균열을, 결여를 봉합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들을 통해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소현은 「양장 제본서 전기」처럼 기억을 통해 존재의 결여를 메우려는 과정에 대한 소설을 쓴다. 그것이 비록 주체의 고독을 위안해주는 것으로 그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기억을 통해 그 과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정소현의 첫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의 해설에서 김형중이 정소현의 소설을 “‘전도된 형태’의 가족 로망스”(282쪽)라고 읽어내는 것 역시 가족을 찾는 행위로 존재를 채우려는 과정에 의미 부여한 것에 다름 아니다. 김형중이 읽어낸 것처럼 정소현의 인물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버려진 존재, 기원이 없는 존재”(283쪽)라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주체의 텅 빈 자리. 그곳에서 오히려 주체들은 위안을 얻는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위안을 얻는 것일까.

 

사진출처-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사진출처-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양장 제본서 전기」의 영지와 동일한 인물인 「빛나는 상처」의 ‘미애’와 「폐쇄되는 도시」의 ‘삼’을 보자. ‘미애’와 ‘삼’은 모두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과는 다른 곳에서 헤맨다. 그곳은 ‘미애’에게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자 버림받은 ‘삼’이 “팔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 아파트와 도시가 사라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못해 보일러실 문을 열고 지하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어차피 다 없어질 것들이군. 복이 문 앞에 놓인 플래시로 안을 비추었다. 그곳은 기억보다 넓지 않았다.(140쪽)

난 그 집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자 이상하게도 오히려 불안해졌다. 그 집에 가면 정말 그때처럼 깊이 잘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278쪽)


그들이 기억하는 공간은 없어지거나 곧 없어질 곳이다. 혹은 존재하고는 있지만 애써 피하고자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곳을 찾는 이유는 자신의 상처와 마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균열을 봉합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버림받은 존재인 그들은 위안의 흔적을 발견하고자 자신의 기억으로 침잠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치유의 가능성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기억보다 넓지 않”은, 자신을 품어줄 수 없는 “어차피 다 없어질 것들”과 마주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간이 존재할까 봐 “오히려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소현의 주체들이다.

 

위안은 기억 속의 한 때로 귀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그저 추구에 머무르는 한에서 주체는 자신에게 부재한 것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과 똑같은 타자들을 만난다. 버림받은 기억을 공유하는 ‘복’과 어머니에게 학대받은 기억과 죽은 어머니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가 그들이다. 그들은 거울처럼 ‘삼’과 ‘미애’를 비춘다. 그들은 ‘삼’과 ‘미애’가 무의식 속에 억압해 놓은 자신의 모습이다. 억압된 것은 귀환하기 마련이기에 그들은 ‘삼’과 ‘미애’의 동일시를 불러온다. 주체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여정은 “길을 잃고 어딘가를 오랫동안 헤매느라 집으로 돌아오지 못”(143쪽)하며 “골목을 걷다 보면 한없이 새로운 골목이 생겨났고, 나는 그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267쪽)고 말하는 방식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떠나기 전의 상황은 어떠할까. 그들이 머물러 있던 곳은 그들에게 어떠한 결핍의 기원이 되는 것일까.

 

주체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외부에서 찾을 때 위기는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주체를 주체이게 만드는 타자는 주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들은 주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전혀 다른 외부, 낯선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체의 지근거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크며 더 위험하다. 정소현의 주체들이 균열을 일으키는 공간은 자신들의 집이다. 그곳은 “퇴락한 일본식 목조 이층집”(152쪽)이거나 고아가 된 아이를 위탁하여 키워주는 위탁부모의 집이거나 “사방이 산으로 아늑하게 둘러싸인 전원주택 단지”(85쪽)로 겉으로만 보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은 외부의 침입에 취약하며 그에 못지않게 내부는 붕괴의 조짐으로 뒤덮여 있다.

 

집은 위안과 휴식의 공간이다. 사적인 공간인 집에 머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분명하다. 모호하지도 불확실하지도 않은 자명한 세계. 사적이고 자명한 그곳은 그렇기 때문에 취약하다. 권위와 강제가 존재하며 사적 억압과 폭력이 발생하기가 쉽다. 또한, 사소한 침입에도 무너질 위험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정소현은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그려내지만 결국 하나로 소급된다. 파국을 불러오는 것이 다름 아닌 주체 그 자신이라는 것.

 

나는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퇴장시킴으로써 한 시절을 정리했다. 너도 그렇게 정리한 과거의 인물이며 내 삶에 다시 끼어들면 안 되는 존재였다.(85쪽)

 

라고 말하는 「너를 닮은 사람」의 ‘나’는 갑작스레 나의 집을 찾아온 ‘클라인’으로 인해 당혹스럽다. 십여 년 전 독일어 교실에서 처음 만난 그들은 같은 이름을 가졌다. 그래서일까.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겪어내고 일곱 살 연상의 부잣집 남자와 결혼해 “낮잠처럼 무의미하게”(83쪽) 지내는 ‘나’의 앞에 과거의 ‘나’와 같은 ‘너’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의 인물”인 클라인이 ‘나’의 앞에 나타나게 된 표면적 이유는 미술교사인 클라인이 ‘나’의 딸인 리사를 때렸기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혀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나’의 현재는 ‘너’를 경유해 온 과정에 있다. ‘나’란 존재가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음으로써” 한 시절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결여하고 있던 것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주체가 자신을 확고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그것은 타자를 배제한 자리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배제되고 거부된 것들은 억압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이름의 ‘너’는 필연적으로 ‘나’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클라인, ‘너’는 ‘나’가 외면하고 지워내고 싶어하는 과거의 이름이다. ‘너’는 ‘나’에게 “왠지 내가 가난에 굴복한 속물이 된 것 같아 모욕당하는 기분”이 들게 하며 “네가 가지지 못한 것, 가진 것 모두 내게 이상한 열패감을 가져다”준다. ‘너’는 ‘나’의 결여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관계는 「이곳에서 얼마나 먼」에서도 반복된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불행은 그녀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231쪽)라고 말하는 ‘나’는 오랜 친구이자 한집에서 같이 자란 ‘제인’에게 부모를, 가족을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아주 먼 곳 어딘가에서 죽은 듯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229쪽)하면서도 그녀가 ‘나’의 주변에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는 ‘제인’을 찾는 여정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제인’을 오인하며 그 오인된 자리에 피해자로서의 ‘나’를 가져다 놓는다. 가해/피해의 관계가 역전되어 있는 두 사람의 관계만큼이나 오인된 맥락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사진출처-JTBC 홈페이지
사진출처-JTBC 홈페이지

「너를 닮은 사람」과 「이곳에서 얼마나 먼」의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억압한다. 용서를 빌어야 할 대상이었던 타자는 오히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클라인과 제인, 그들은 완벽하다고 상상된 ‘집’에서 배제된, 배제되어야만 하는 타자이다. 주체의 환상 속에서 비롯된 공간은 타자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곳을 침범하는 타자는 위험한 존재이다. 하지만 타자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주체는 자신의 존재 증명의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 「지나간 미래」의 ‘나’가 환상 속에서 보는 것이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만들어 온 ‘과거’였듯이 이들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는 타자가 결국 자신의 모습이라는 아이러니. 타자를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주체 자신이라는 인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지나가지 않아요. 나는 여기 있는 게 아니라 갈기갈기 찢겨 과거들 속에 흩뿌려져 있어요”(99쪽)라는 클라인의 외침은 결국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언술이 된다. 주체는 자신의 결여를 채울 수 없으며 오히려 균열을 일으킨 자기 자신만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균열을 다른 방식으로 메우려 한다.

 

너는 실재 인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내가 억눌러두었던 죄책감과 내 자신을 경멸하는 마음이 너를 닮은 존재로 현현한 것이 분명했다. 너는 실재가 아니라 내게서 분열되어 나온 병리학적 인격체일지도 몰랐다.(111~2쪽)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나는 통장을 그냥 놓고 가게를 나왔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실망해서도, 그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질투가 나서도, 제대로 인사조차 못한 내가 바보스럽게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그 여자가 제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47쪽)

 

「너를 닮은 사람」의 ‘나’는 ‘너’를 “내가 억눌러두었던 죄책감”으로 호명하고는 ‘너’를 차로 친다. “선의에 의한 사고”로 명명된 살인은 주체의 균열을 봉합하려는 행위이지만 이는 다시는 봉합할 수 없는 틈을 발생시키고 만다. 「이곳에서 얼마나 먼」의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제인을 외면했듯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을 사는 제인을 부정함으로써 이를 봉합하려 한다. 그렇지만 용서해줄 대상을 부정한 상태에서 “속죄하기 위해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라 말하는 위선은 달콤하긴 하지만 봉합의 불가능성만을 강조할 뿐이다.

 

정소현은 주체를 균열의 지점에 세워 놓고는 마치 그것을 봉합할 수 있을 것처럼 기대하게 한다. “죽은 식물을 땅에 묻을 때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지만, 묻고 돌아서 손을 터는 순간 그 다짐을 금세 잊고 똑같은 일을 반복”(46쪽)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게 마련이지만 삶의 균열은, 그로 인해 생긴 비어 있는 틈은 무엇으로도 봉합할 수 없다. 「실수하는 인간」을 보면 아버지의 폭력과 무시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석원은 ‘실수’로 아버지를 죽인다. “실수예요, 아버지. 잘 아시잖아요”(44쪽) 라는 석원의 말은 그 실수가 의도된 것임을, 그러므로 그에게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아버지 살해는 “동네 개를 실수로 차로 치어 죽였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무게의 죄책감”(45쪽)을 불러온다. “콘돔이 찢어져 실수로 태어난 놈”(71쪽)인 석원은 시작부터 파열된 상태였다. 그것은 봉합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실수’라고 가정된 모든 행위는 달콤한 위선이라는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는 기만일 뿐이다. 주체는 자신의 결여를 봉합하려는 행위를 멈춘다. 그럼으로써 주체는 분열증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기만하며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가 된다. 정소현은 결여를 자신의 존재 의의로 내면화한 무시무시한 주체를 그려냄으로써 존재의 처연함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4. 다시 시작되는 위안의 풍경

 

손보미와 정소현의 인물들이 겪는 문제의 본질은 문제에 대한 대답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는 데에 있다. 「육인용 식탁」의 ‘나’와 「실수하는 인간」의 석원은 문제를 외재화 하는 오류를 범한다. 현상과 본질 간의 균열은 언제나 현상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그들은 현상에 의해 균열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본질이 된다. 그들의 본질은 이미 그들이 처한 상황, 즉 현상의 반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해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갈라진 틈을 실체화하는 제스처로서 이미 소설의 증상이 된다.

 

손보미와 정소현. 그녀들은 한편에서 현상을 재배치함으로써 다른 맥락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그로 인해 재정립된 상황은 소설 속 인물들이 위안으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다.

 

손보미는 두 편의 소설을 병치시킴으로써 인물들 간의 간극을 축소하려 한다. 기법적인 측면의 특수성을 옆으로 빼놓고 본다면, 「담요」의 아버지와 「애드벌룬」의 아들이 거울 쌍처럼 대체 우주를 살아가고 있는 서사가 바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담요」에서 아들이 덮고 있던 ‘담요’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자책하지만 「애드벌룬」에서 아들은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의 죽음과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자책한다. 어찌 되었건 각각의 단편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파셀’의 콘서트에서 사고를 경험하고 비슷한 정도의 죄책감을 갖고 생활한다. 그들의 삶은 한순간의 사건으로 균열을 일으켰지만, 현상은 반복과 변주되어 존재에게 위안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마을 앞 놀이터에서 마주친 어린 부부와 별스럽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는 그 과정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을 “담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26쪽)라고 말한다. 자신들을 “인간쓰레기”라고 말하는 어린 부부는 그저 “작고, 동그랗고, 차가운 아이들”이며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행복한 노래만 흘러나오는 곳”(28쪽)에 가고 싶어하는 평범한 존재일 뿐이다.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 그것은 다른 세계에서 살아남은 아들의 일상성으로 나아간다. “거기에는 자신의 침대를, 자신이 방금까지 누워 있었던 흔적들 - 이를테면 흐트러진 베개와 구겨져 있는 싸구려 이불 같은 것들”(240쪽)로 이루어진 일상의 세계. 그것은 위안의 자리이자 주체의 자기 의지가 가능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아들은 자신의 삶이 “실에 연결되어서 공중으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떠 있는 것”(230쪽)임을 깨닫는다.

 

정소현은 억압된 것을 회귀시키는 방식으로 위안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양장 제본서 전기」의 영지가 무엇과도 마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기원으로 정립함으로써 위안을 삼았다면 「돌아오다」에서는 할머니에 의해 억압된 존재였던 ‘엄마’가 어린 ‘윤옥’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나’에게 위안을 얻게 한다. ‘나’는 “퇴락한 일본식 목조 이층집”에서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할머니와 함께 산다. 집에 대한 집착만큼 할머니는 ‘나’에게 집착한다. “할머니는 내가 꺾이고 좌절해 자신에게만 의지하길 바랐던 것”이며 “그래야 자기 옆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그래야 할머니 자신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할머니의 외로움을 위한 보험 같은 거였다.”(173쪽) ‘나’는 그러한 할머니 곁에서 자신을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좌절감 속에서 살아간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어떠한 맥락도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한 ‘나’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윤옥’으로 인해 삶의 위안을 얻는다. ‘윤옥’은 “오래전 가고 싶었던 길로 훌훌 떠났다가 잠시 이곳으로 돌아온 또 다른 나”(168쪽)인 것만 같다. ‘나’는 ‘윤옥’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지만, 어느 날 윤옥은 사라지고 그녀가 남긴 가방 속에서 한 아이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 사진은 ‘나’였으며 윤옥이 자신의 ‘엄마’였음을 깨닫고는 그녀를 가여워한다. ‘엄마’와의 공감은 ‘할머니’와의 관계로 전이된다. “나는 할머니가 어느 밤 돌아온 가족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난 그날까지 어떤 마음으로 집을 지켰는지, 수를 놓으며 무엇을 견뎌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183쪽)고 말한다. ‘나’는 ‘윤옥’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균열이 지닌 간극을 이해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것은 정소현이 다른 소설에서 보여준 위선적 봉합을 넘어서는 방식이다. 위안은 어긋난 틈을 메우려는 시도가 아닌 그것을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는 듯이,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나도 이 집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183쪽)라는 진술이 가능하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는 위안의 풍경을 상황에 대한 주체의 인식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존재의 결여를 받아들이는 주체들을 통해 억압된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삶의 균열을 그대로 감싸 안을 때, 비로소 위안이 가능하다고 손보미와 정소현은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이후 작품들이 써나가는 위안의 풍경은 추후 다른 지면을 통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길 기대해본다.

 

 

글 ·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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