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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봉준호 영화의 희생양들①-<살인의 추억>과 네 남자
[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봉준호 영화의 희생양들①-<살인의 추억>과 네 남자
  • 임정식(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0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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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만과 서태윤 형사가 백광호에게 범인의 사진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다.
박두만과 서태윤 형사가 백광호에게 범인의 사진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후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는 평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봉준호 영화의 장르적 특징은 평범하지 않다. 장르 영화의 기존 문법을 살짝 비틀고, 장르 영화의 영토를 반걸음쯤 벗어난다. 봉준호 영화의 이러한 장르적 특징은 <살인의 추억>(2003)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마다 ‘범인을 잡지 못하는 스릴러’라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지만,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을 통해 ‘봉준호라는 장르’의 탄생을 알림으로써 우려를 탄성으로 바꾸었다.

<살인의 추억>과 관련하여 빠짐없이 거론되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희생양이다. 이 영화에서 언급되는 희생양의 특징은 ‘빨간 옷을 입은 여성’으로 요약된다(후반부의 피해 여성들은 예외이다). ‘비가 내리는 날 살해당한다’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비 내리는 밤에 혼자서 어두운 시골길을 걸어가던 여성들이 살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 경찰관이 빨간 원피스를 입고 빗속을 걸어가는 유인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피해 여성들은 10대 여학생부터 주부까지 다양하다. 여기에 1980년대의 시대 상황이 추가된다. 민주화 시위 진압에 전경이 동원됐고, 그로 인한 인력 부족으로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다. 따라서 <살인의 추억>의 희생양과 관련하여 여성, 군사정권이라는 키워드는 유효하며 또한 적절하다.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범은 성적 변태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가 여성 피해자들을 살해하는 방법은 엽기적이다. 손과 발을 뒤로 묶고, 끈으로 목을 조르고, 복숭아 조각이나 볼펜, 숟가락 등을 사체의 자궁 속에 집어넣는다. 즉 연쇄살인범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젊은 남성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살인의 추억>의 희생양을 빠짐없이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희생양과 관련된 일종의 고정관념 혹은 선입견을 확장하면, 남성 희생양도 여럿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희생양들은 일그러진 권력구조에서 비롯된 폭력 혹은 후진적인 수사 시스템과 관련되어 있다.

 

'살인의 추억'의 수사팀.
'살인의 추억'의 수사팀.

<살인의 추억>의 남성 희생양은 모두 네 명이다. 그 가운데 희생양의 징후가 가장 뚜렷한 인물은 백광호(박노식)이다. 그는 신분, 육체, 정신의 측면에서 희생양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백광호는 마을에서 술집을 하는 소시민의 아들이다. 또 왼쪽 뺨에 큰 흉터(화상)가 있고, 체격은 왜소하고, 말은 어눌하다. 여기에 “맛이 간 아들놈”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정신상태도 오락가락한다. 흉터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불길에 던졌기 때문인데, 그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덮쳐라 백 씨”라는 평가를 듣는다. 아버지의 평판은 아들에게 대물림된다. 박두만(송강호)은 심문 과정에서 백광호의 성적 욕망을 은근히 활용하려고 한다.

백광호는 태령경찰서 형사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에게 조사를 받는다. 그런데 백광호가 체포되는 계기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방앗간 할머니가 ‘이향숙이 살해되던 날 밤에 광호가 이향숙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걸 봤다’라는 말이 단초가 된다. 그런데 방앗간 할머니는 “작년부터 노망났다는 얘기가 있던” 인물이다. 두 형사의 조사 방법은 폭력적, 반인권적이다. 지하의 취조실에서 속옷만 입힌 채 백광호를 때리고, 다짜고짜 넘어뜨린 후 군홧발로 짓밟는다. “인상 드럽네.”, “얼굴만 봐도 막 화가 나네.”라는 조용구의 대사는 그들의 조사 방식이 얼마나 일차원적이고 폭력적인지를 알려준다. 게다가 박두만은 운동화 발자국 사진을 조작하고, 백광호를 산에 데려가 삽으로 땅을 파면서 파묻겠다고 협박한다. 

백광호는 온갖 폭력과 협박, 회유에 시달린다. 하지만 폭력을 앞세운 수사는 비극으로 끝난다. 백광호는 자신의 집에서 난동을 부리던 조용구에게 상처를 입힌 후 달아나고, 박두만과 서태윤(김상경)의 진술 강요를 피해 도망치다가 기차에 치여 숨진다. 백광호는 우연히 목격한 내용을 형사들에게 진술하는데, 박두만은 이 진술을 백광호의 행위로 오인한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깨닫고 범인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지만, 겁에 질린 백광호는 결국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다. 경찰이 비과학적, 폭력적인 수사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 결과다. 백광호는 폭력 경찰의 희생양인 셈이다.

 

애인이 준비한 링거를 맞고 있는 박두만 형사.
애인이 준비한 링거를 맞고 있는 박두만 형사.

<살인의 추억>에서 조병순(류태호)도 희생양에 포함된다. 그는 마을 근처 레미콘 공장의 직원이다. 아내는 병들어 누워 있고, 두 명의 어린 아들이 있는 가난한 집의 가장이다. 조병순은 한밤중에 숲에서 음란행위를 하다가 붙잡힌다. 박두만은 조병순이 변태라고 단정한다. 장독에서 발견된 외설 잡지와 브래지어가 그 증거이다. 그런데 조병순에 대한 주민들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아내 병간호를 잘하고, 교회 잘나가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두만은 막무가내이다. 변태들은 원래 그렇다고, 딱 보면 티가 난다고 말한다. 겁에 질린 조병순은 빨간 속옷 차림으로 꿈과 풍문을 뒤섞어 횡설수설한다. 거꾸로 매달아 자백을 강요하는 폭력을 견디다 못한 채 거짓 자백을 한다.

박현규(박해일)도 조병순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1년 전쯤 마을에 와서 공장에 다니는 이방인이다. 방송국 음악 프로에 엽서를 보내 비가 오는 날이면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틀어달라고 요청한다. 경찰은 살인사건이 비가 오는 날 발생했고, 그때마다 ‘우울한 편지’가 방송됐다는 점에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경찰의 이러한 가정에는 과학적인 근거도, 합리적인 논리도 없다. “노망기가 있는” 방앗간 할머니의 목격담과 변태라는 추측에 근거해 백광호와 조병순을 범인으로 단정한 행위와 다르지 않다. 또 박현규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도 폭력이 난무한다. “죄 없는 사람 잡아다가 족치는 거, 동네 애들도 다 아는” 상황이 반복된다.

<살인의 추억>에는 범인(죄인)이 따로 있다. 백광호, 조병순, 박현규는 무고한 인물들이다. 그런데도 권력기관의 폭력에 의해 인권을 철저하게 유린당한다. 게다가 백광호는 목숨까지 잃는다. 그들은 여러 측면에서 희생양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백광호는 신체적, 정신적 측면에서 비정상적인 인물이다. 조병순은 성적으로 변태적인 요소가 있다(그는 빨간 여성 팬티를 입고 다닌다). 박현규는 마을의 이방인이다. 르네 지라르가 제시한 희생양의 조건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조병순과 박현규가 목숨을 잃지 않거나 추방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희생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추측과 가정에 의한 의심만으로 폭력에 시달리고, 인권 유린의 상처를 입는다.

 

피의자로 체포한 박현규를 윽박지르고 있는 박두만 형사.
터널 입구에서 박현규를 윽박지르고 있는 박두만 형사.
박두만 형사가 미국에서 전달받은 유전자 분석 서류를 들고 서태윤에게 달려가고 있다.
박두만 형사가 미국에서 전달받은 유전자 분석 서류를 들고 서태윤에게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살인의 추억>에는 또 다른 부류의 희생양이 있다. 박두만으로 대표되는 태령경찰서 형사들이다. 그들은 가해자와 희생양이라는 상반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박두만은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목격자도 증거도 없다. 그가 알고 있는 혹은 할 수 있는 것은 경험에 의존한 수사뿐이다. 그것은 전근대적, 비과학적이다. 무속인을 찾아가 부적을 받아오고, 순전히 느낌만으로 누가 범인인지 가려낸다. 게다가 피의자들에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한다. 박두만은 무능한 인물이기도 하다. 태령경찰서 수사팀은 <살인의 추억>에서 5건의 연쇄살인 사건 중에서 한 건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 박두만의 무능과 관련해서는 짚어볼 대목이 있다.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오로지 박두만의 무능 때문인가 하는 점이다. 박두만은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수사반장은 상부에 전경 2개 중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전경들은 모두 시위 진압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사체에서 검출된 정액과 박현규의 유전자를 비교하기 위해 증거를 미국에 보내는 장면은 수사 시스템의 후진성을 보여준다. 국내에는 유전자 분석 장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두만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 플래카드와 시위대 진압 장면으로 상징되는 1980년대의 폭압적 권력 구조와 ‘과학수사’와는 거리가 먼 수사 시스템의 희생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두만은 표면적으로 가해자이지만 부분적으로는 희생양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과학수사’를 표방하던 서태윤이 후반부에 광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폭력 형사인 조용구가 파상풍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살인의 추억>에는 다양한 종류의 희생양이 등장한다. 백광호는 희생양의 징후를 복합적으로 지닌 인물이다. ‘변태적 인물’ 조병순과 ‘이방인’ 박현규는 폭력 경찰에 의해 인권을 침해당하고 육체적인 고초를 겪는다. 박두만은 이들과 결이 다른 희생양이다. 그는 권력 피라미드의 하층부에 있는 인물이다. 군사독재정권이 만들어낸 희생양인 셈이다. 박두만은 범인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능 경찰이 됐다. 그리고 퇴직한 후에는 녹즙기 판매사원이 된다. 백광호, 조병순, 박현규, 박두만에게 나타난 희생양의 특징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하지만 각 인물의 행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의 야만적인 권력 구조와 시대적 폭력이라는 원류를 만나게 된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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