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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거장의 영화 교과서 -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거장의 영화 교과서 -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12.06 14: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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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의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80대의 거장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교과서 같은 영화이다. 영화에서 동일한 사건이 세 번 반복되는데, 한 번은 관련자의 버전으로, 한 번은 가해자의 버전으로, 마지막으로 피해자의 버전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이 마지막 버전에서는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이라는 제목들과 달리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에서 ‘진실’이라는 글자가 살아남는다. ‘누군가의 진실들’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진실이 마지막에 펼쳐지는 것이다.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진행되는 사건이라는 플롯은 더 이상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 버전의 이미지들와 사운드들의 진행을 보고 있으면 한 사람의 거장이 우리에게 이미지의 윤리학에 대해 위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의 관점에서 시작하여 그와 종국에는 결투를 벌이게 되는 자크 르 그리(아담 드라이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그리트 드 카루주(조디 코머)의 관점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는 역순으로 ‘진실’부터 이야기해보자. 마르그리트는 반역자 가문의 외동딸로 태어나 가문의 이름을 되살릴 방법이 결혼뿐인 여인이다. 그래서 돈은 없지만 이름의 명예는 있는 장 드 카루주의 결혼하여, 마르그리트 드 카루주가 된다. 그런데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 장 드 카루주는 오직 후사를 보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거친 방식으로만 자신을 다루는 사람이다. 마르그리트의 유일한 위안은 장 드 카루주가 전장에 참여한 사이 재정을 관리하면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크 르 그리가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찾아와 마르그리트를 겁탈한다. 자크 르 그리는 처음엔 사랑을 고백하지만 울부짖으며 도망치는 마르그리트를 붙잡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난 뒤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겁박을 할 뿐이다. 마르그리트는 이 사건을 집으로 돌아온 장 드 카루주에게 고백하고 이 일을 공론화해줄 것을 요구한다. 장 드 카루주는 그것이 정말로 겁탈이었는지 의심부터 하고, 더럽혀진 아내를 그냥 둘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다시 범한다. 한 번도 장 드 카루주와의 거칠기만 한 관계에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 없는 마르그리트는 그 시간 역시 견뎌낼 수밖에 없다. 이후에 장 드 카루주가 마음대로 결투를 통해 이긴 자가 진실의 지위를 차지하는 재판을 신청할 때에도, 그녀는 견뎌낼 수밖에 없다. 장 드 카루주의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책망하고, 재판장에서는 자크 르 그리와의 성관계에서 즐거움을 느꼈기 때문에 임신을 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에도, 견뎌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녀는 장 드 카루주가 자크 르 그리와의 결투에서 지면, 자신도 발가벗겨져 화형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인데도 남편을 응원하는 일밖에는 할 수가 없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주도성은 자신이 피해자인 사건에서도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

가해자 버전의 진실을 보여줄 때 거장에게 배우는 이미지의 윤리학은 빛을 발한다.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에서 마르그리트는 친구에게 자크 르 그리가 잘생겼다는 말을 지나가듯 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녀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그녀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진실은 친구와의 대화를 거들었던 그 한 마디 뿐이다. 그런데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 버전에서 마르그리트는 자크 르 그리에게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끌림을 느끼는 것처럼 그려진다. 가해자인 자크 르 그리는 마르그리트가 하지 않았던 말들도 기억하고, 기억조차 할 수 없이 지나치듯 한 말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는 전쟁밖에 모르는 남편과 살면서 대화가 되지 않아 고통 받고 있으며 지적이며 책을 좋아하는 자신과 더 맞는다는 자크 르 그리의 생각은, 사실 그와 그의 부하 사이에서 나온 아이디어이지 전혀 마르그리트가 이야기한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자크 르 그리만의 시간은 마르그리트를 결국 겁탈하게 만든다. 마르그리트와 함께 한 시간이 아니라 자크 르 그리가 혼자 꿈을 꾸듯 산 시간, 이런 모습 처음 본다며 자크 르 그리를 거드는 부하의 시간이 마르그리트의 성에 남편이 없는 시간에 몰래 찾아가 겁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겁탈하는 장면에서 ‘마르그리트가 말하는 진실’과 ‘자크 르 그리가 말하는 진실’은 격렬하게 충돌하는데, 마르그리트가 자크 르 그리로부터 도망치는 모습이 얼마나 필사적인가부터 겁탈하는 장면까지 완전히 다르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자크 르 그리의 진실’에서는 도망치다 붙잡힌 마르그리트가 결국 자크 르 그리에게 범해질 때, 마르그리트의 외침이 흥분으로 변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사운드뿐만 아니라 겁탈 장면은 포르노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면서 가해자 중심의 사고가 얼마나 저열하고 끔찍한 폭력을 낳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마르그리트의 진실’에서 마르그리트는 견딜 수 없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데, 자크 르 그리의 관점에서는 좋으면서 윤리관 때문에 자신을 거부하는 ‘척’하는 것일 뿐이게 되는 것이다. 이 편리한 사고방식은 이 겁탈 사건 이후 자크 르 그리의 주장이 ‘관계는 있었지만 합의 하에 있었다’에서 ‘관계는 전혀 없었다’라고 적당히 변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

자크 르 그리의 관점만큼 폭력적인 것이 장 드 카루주의 관점이다. 장 드 카루주의 관점에서 자신은 영웅적이고 누구보다도 용기로 충만한 사람인데, 자크 르 그리의 교묘한 술수와 비겁함 때문에 온갖 핍박을 받는 중이다. 그렇지만 가문을 위해서 늘 용기 있게 나서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마르그리트는 사랑하고 존경한다. 늘 자신보다 앞서 후사를 걱정하고, 건강을 걱정하며, 사랑의 즐거움을 나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마르그리트가 얼마나 장 드 카루주에게 억압받고 있었는지 이미 이야기했다. 자크 르 그리에 의한 겁탈 사건에 대한 장 드 카루주의 태도에서 이는 잘 드러나는데, 그는 자신의 것이었어야 하는 땅이나 직위처럼 마르그리트에게 가해진 폭력을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침범으로 여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결투를 신청하고, 자크 르 그리와 겨루게 되는 것이다.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에서 장 드 카루주는 마르그리트가 아주 용기 있게 나섰고, 자신은 상처 입은 마르그리트를 너무나도 따뜻하게 보듬었으며, 자신 역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 결투에 나서는 용맹스러운 선택을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신의 결투에 따라 마르그리트가 화형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염두가 전혀 없다.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정당함을 잘 보여줄 수 있는가만이 중요하고, 마르그리트의 명예와 정당함은 그에 따라오는 부속물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마르그리트를 소중히 여긴다해도, 그녀는 그의 소유물에 불과하다. 이렇게 우리는 마르그리트의 진실로부터 처음 진행되었던 이야기, ‘장 드 카루주가 말하는 진실’을 다시 보게 된다.

이 세 진실이 반복되고 나서 장 드 카루주와 자크 르 그리의 결투가 시작된다. 마르그리트는 화형대에 서서 장 드 카루주의 승리를 간절히 염원하는데, 우리는 이 염원이 장 드 카루주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 때문이 아님을 이제 안다. 그녀는 자신의 정당성을 밝혀야 하는 사건에서 그 스스로 결투에 나설 수 없이 한 사람의 재산으로서 서 있어야 할 뿐이다. 게다가 자신의 목숨과, 어쩌면 목숨보다도 소중할 명예를 걸고서 말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결투가 끝난 뒤에도 그녀는 환호성을 만끽하는 장 드 카루주의 뒤를 처연하게 뒤따를 뿐이다. 남편의 승리는 결코 ‘진실’을 판정해주지 않는다. 그 진실은 오직 마르그리트 스스로만이 밝혀낼 수 있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도 그녀에게 그것을 허용해주지 않았다.

 

리들리 스콧은 이러한 영화의 진실과 함께 이미지의 윤리학을 펼쳐낸다. 과연 이미지를 생산하는 자들은 이미지가 파생시킬 수 있는 폭력들로부터 자유로운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가? 리들리 스콧은 반복되면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축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영화들은 자크 르 그리의 시선처럼, 또 장 드 카루주의 시선처럼 이미지들을 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80대의 거장이 던지고 있는 이 질문은 어느 때보다도 유효하게 다가온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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